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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8] BMW 탄 플라톤 : ‘문송’은 옛말➀

모빌리티와 인문학ⓒ앨피

지난달 28일 사내 스터디 모임에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들른 서울 종로의 한 대형서점.

독특한 이름을 가진 책 3권이 나란히 ‘인문 신간’ 매대에 진열돼 있었습니다. <모빌리티 이론>, <모빌리티와 인문학>, <모바일 장의 발자취>(2019, 앨피). 공유경제와 구독경제에 대한 책을 구입하고 나오던 차에 우연히 들른 인문 코너에서 ‘모빌리티’란 단어를 만난 것입니다.

플라톤, 모빌리티 혁명을 만나다

3권 모두 좌측 상단에 ‘Mobility Humanities/Interconnect’(모빌리티 인문학/상호연결)라는 로고도 새겨져 있었습니다. 인문 매대에서 모빌리티란 단어를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호기심에 바로 집어 들었습니다. 인문학이 더 이상 모빌리티를 연구 대상에서 외면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직감과 함께 말이죠.

콘텐츠 미디어 스타트업에 몸담고 있다는 핑계로 저는 모빌리티를 콘텐츠업과는 다른 산업군으로 분류해두고 있었습니다. 전통 제조업에 기반하지만 정보통신기술(ICT)이 진두지휘하는 산업으로 한정해둔 것이죠. 최근 글로벌 경영 컨설팅 업체 <맥킨지(Mckinsey)>가 내놓은 보고서에서 자율주행 기술이 2030년엔 연간 1조6000억달러(약 1815조원)의 매출을 창출할 것이라는 분석을 보고 얼마간 놀라긴 했지만, 역시 그때 뿐이었습니다. 콘텐츠와는 그리 큰 관계가 없다는 통념에 갇혀 있었던 것이죠.

그러다 인문 코너에서 모빌리티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내세운 책 3권이 연달아 출간된 것을 보고 기존 관념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빌리티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문학마저 이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면 모든 산업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칠 패러다임으로 이미 자리잡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돈 냄새를 맡은 산업계가 먼저 기민하게 움직이면 그 뒷정리를 학문이 보통 도맡곤 하는데, 그렇다면 이미 한발 늦은 셈이기도 했습니다.

건국대학교 모빌리티 인문학 연구원ⓒ건국대학교

모빌리티 총서’만 100권이라니

때문에 뒤늦게라도, 책 출간과 관련한 앞뒤 사정을 파악해봐야 했습니다. 책은 건국대학교가 최근 <모빌리티 인문학 연구원>을 열면서 내놓은 ‘모빌리티 총서’의 서막에 해당하더군요. (모빌리티가 붙은 국내 인문학 연구원도 건국대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 연구원은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에 선정됐고, 올해 상반기에만 번역서와 학술서, 대중 교양서를 추가로 6권 더 출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같은 ‘모빌리티 총서’는 100권 규모로 2026년까지 발간됩니다. 정말 담대한 계획이지요.

먼저 나온 3권은 모두 번역서입니다. 이는 기술 선진국들에선 모빌리티 담론이 이미 풍성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실제로 오는 6월, <모빌리티 인문학 연구원>은 영국 랭커스터대의 <모빌리티 연구센터>와 공동 학술대회를 영국에서 엽니다. 10월에도 미국·영국·호주 등 10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학술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합니다. 신인섭 연구원장은 지난달 25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1세기 인간은 가만히 머무르거나 멈춰 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인문학도 학제 간 융복합을 넘어 ‘영역 파괴’라는 열린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죠.”

杞憂, 인문학도들의 실업 걱정

‘모빌리티 혁명’ 앞에서 인문학도들이 실업을 걱정하기보다, 자신의 전공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연마한 뒤 사회 변화에 담대하게 맞서라는 주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술을 우리 사회에 안착시키는 데에는 어디까지나 인문사회학도들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빌리티 인문학 연구원>이 펴낸 이번 번역서들은 모두 인문학도(철학·문학·역사 등)들이 번역을 도맡았습니다. 원저자들도 해외에서 인문지리학 등을 공부한 이른바 ‘문과’ 계통입니다. 모빌리티 인문학 자체가 유럽에서 199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연구가 시작된 신생 학문이다보니 미답지도 여전히 넓습니다.

‘모빌리티 인문학’은 단순히 인터넷과 모바일 등에 기반한 사이버 공간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예컨대, 공항과 고속버스 터미널, 철도역 등도 주요 관찰 대상입니다. 이 공간들은 탐사 저널리즘 소재로도 자주 다뤄져 온만큼 인문학도들의 진로도 폭넓게 열려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한상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같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국가·지역으로 고정돼 있었다면, 지금은 그 영역과 경계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대중교통 인프라 같은 정책적 연구뿐 아니라, 역사·문학 등 인문학에서도 이동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픽사베이

BMW가 인문학도를 채용하는 이유

실제 해외 사례를 볼까요. 프랑스 철도공사(SNCF)는 2011년 연구기관 ‘이동하는 삶 포럼’을 만들고 저탄소 에너지 이용 방안이나 모빌리티 세대의 언어 장벽 개선 같은 주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독일 BMW는 <모빌리티 연구소(IMFO)>에서 운전자 인구 변화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첨단 기술이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드러내자, 인문학 연구 결과를 토대로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것이죠. 사회 변화에 적실하게 대응해야만 비즈니스 현장에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몰랐다’기보다는 ‘모르려 했다’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이번 <플래텀> 연재를 통해 “연결(Connect)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거듭 말해오면서도 여전히 콘텐츠업 내부 연결에만 치중했던 것 같습니다. 틀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죠.

그렇다면 모빌리티 혁명 시대에, 저와 같은 이른바 ‘문과’생들은 어떻게 ‘문송’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맥킨지의 최근 연구 결과가 그 해답을 찾는 실마리가 돼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빌리티 혁명 + 인포테인먼트 = 800조원

맥킨지는 최근 한국 자동차와 첨단 기술 업체 관계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모빌리티 혁명을 4가지 키워드로 압축한 바 있습니다. 자율주행(Autonomy) · 연결(Connectivity) · 전기화(Electrification) · 공유(Sharing)가 그것이죠. 콘텐츠 미디어 스타트업이라면 맥킨지가 주목한 키워드 중 ‘연결’을 다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장의 크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죠.

맥킨지는 글로벌 소비자의 40%가 더 나은 ‘연결’을 위해 자동차 브랜드를 바꿀 의향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같은 비율은 최근 4년 새 2배가 늘었다고 하네요. 맥킨지는 이를 토대로 “2030년엔 신차의 45%가 개인화된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정보+오락) 콘텐츠와 광고를 장착할 수준까지 연결성이 고도화 될 것”이며 “이 산업은 4500억~7500억달러의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요컨대, 모빌리티에 장착될 콘텐츠 시장 규모가 향후 10년 안에 우리 돈으로 80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속 방지턱

시장의 크기 뿐만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목격하는 시대에도 살고 있습니다. 구글 기술자 수천명이 미 국방부가 구글의 AI 기술을 살상무기에 활용하려고 하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안면 인식 AI가 시민 감시에 쓰인다는 비난이 거세지자 윤리위원회를 시급히 설치하는 시대 말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발전만 거듭하고 있는 과학기술에 경종을 울리는 것도 결국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정주(定住) 문화를 벗어나면서부터 비로소 문명을 일구었듯,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일 것이고, 그 움직임은 가늠하기 어려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모빌리티 혁명이 뿜어내는 경제·사회 가치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것입니다. 위 사례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 흥망성쇠를 결정할 열쇠는 결국 ‘연결’에 있으며, 그 때문에라도 인문학도와 개발자들 간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플라톤과 엘론 머스크의 티타임

그러니 스타트업 대표님들께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송’하다는 편견에서 자유로운 인문학도들을 적극 채용해 활용해보자고 말입니다. 공학에 대한 지식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일종의 제너럴리스트로서 비즈니스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때론 과속 방지턱 기능까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미학을 전공한 직원이 컴퓨터공학 전공자와 업무에 필요한 티타임을 매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내 문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업 리스크에도 흔들리지 않는 유니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카운터컬쳐>가 조직 운영과 콘텐츠 기획 면에서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픽사베이 

출판사 보도자료

필자 소개 : 레이먼드 권(Raymond Kwon) / 前 <한겨레신문> 기자, 어쩌다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콘텐츠 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스타트업 <카운터컬쳐>(Counter-culture) 커뮤니케이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mail : raymond@counter-culture.co

외부 전문가 혹은 필진이 플래텀에 기고한 글입니다. 외부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고문의 editor@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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