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세계 정점을 찍은 이문행 안무가가 전하는 ‘꿈을 이루는 비결’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 지 4년 만에 라스베이거스 힙합 댄스 쇼의 주연이 되었던 최초의 한국인, 이문행 안무가.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가 처음 춤을 접한 계기는 중학교 2학년 방학 때 동네 청소년회관에서 수강했던 힙합 춤 강좌였다. 또래들 사이에서는 ‘힙합’ 만화책을 보며 브레이크 댄스를 따라 출 줄 아는 게 당시 멋의 기준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는 신림동 댄스팀 ‘비트’에 막내 춤꾼으로 들어갔고, 어느새 춤 실력은 그의 전교 석차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춤을 직업으로 택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직업으로 택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해봐야 백댄서.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제일 컸다.
억눌러왔던 열정이 한순간에 공허함으로 바뀐 건 그가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온 후부터였다.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공부한 건가?’ 마침 미국 유학을 제안받았던 때였던지라, 그는 일단 짐을 챙겼다.
현재 세계적 공연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태양의 서커스’에서 공연 및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잠시 한국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고선 인터뷰를 요청했다.
‘태양의 서커스’ 소속 공연 및 안무가 이문행(29)씨.
낯선 곳에서의 생활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외국인 친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국인 학생들끼리만 몰려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학교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감정이 북받칠 것 같아서 차마 한국에 전화할 수는 없었다. 그때 다시 혼자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은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배우는 원초적인 언어이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질 즈음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가게에 손님 한 분이 왔는데, 다른 직원과 이야기하다가 자신은 춤추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고 하더라. 같이 일하는 친구들은 내가 춤을 좀 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그 사람에게 소개해줬다. 간단한 통성명 후 주차장에서 팁을 걸고 댄스 배틀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국 유명 비보이팀에서 활동하는 춤꾼이었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한 그와의 인연 덕분에 비보이팀에 합류하여 공연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어떻게 라스베이거스까지 진출할 수 있었나.
댄스 배틀을 나가고 수상 경력이 쌓이다 보니 주변에서 “너는 왜 LA 안 내려가?”라고 했다. LA는 내로라하는 춤꾼들이 오디션을 보는 곳이었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수도인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었고, LA는 차로 5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주말마다 오디션을 보러 가다가 나중에는 아예 LA로 내려가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수시로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모아둔 돈이 떨어지면 다시 올라와 새크라멘토 유명 관광지에서 깡통 하나를 앞에 두고선 친구들과 길거리공연을 했다. 관광객들이 깡통에 돈을 많이 넣고 갔기 때문에 수입이 쏠쏠했다.
유학길에 올랐던 학생이었는데, 많이 변했다.
그게 그곳 길거리 춤꾼들의 문화였다. 20불만 있으면 집이 있는 친구들에게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때 춤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많이 배웠다.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건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안정된 직장, 집과 차에 대한 강박관념 없이 자유롭게 살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도 그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았다. 뭔가 목표가 생기면 그것만 뚫어지게 보고 가다가, 목표를 달성하면 다시 자유로워졌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살 순 없겠지만, 난 분명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합격하기까지 몇 번이나 오디션을 보았나.
세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1년 반 동안 약 1,000번의 오디션을 보았다. 그것도 1차에서 떨어지면 상관없는데, 주로 마지막 단계에서 떨어졌다. 그 정도가 되면 내가 왜 떨어졌는지 궁금해진다.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말해주면 내가 다음번 오디션에는 그 문제점을 보완해서 갈 수 있겠지만, 10번 중 6~7번은 “너는 우리가 생각하는 캐릭터에 맞지 않게 생겼다.”고 했다.
오디션 마지막 단계까지 가면 춤은 거의 안 보는 것 같았다. 대부분 뽑히는 친구들은 흑인, 백인, 히스패닉이었다. 실제로 미국 댄스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동양인이 제일 많지만, 프로 세계에서는 동양인 수가 제일 적다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열심히 연습해서 가면, 면전에다가 “No.”라고 했다. 하루에 두세 번씩 “넌 아냐.”, “넌 아냐.”, “넌 아냐.”를 들었다. 그걸 몇백 번 들으면 ‘내가 정말 아닌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건가?’라며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걸 받아들이기가 가장 힘들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길도 없었다. 다른 길이란 건 안 보이니까. 그래서 계속 자기 암시를 했다. 오디션을 보는 이 자체도 즐거운 거라고, 어느 순간 춤을 못 추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이렇게 도전해본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 아니겠냐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1년 반을 버틴 건가.
이왕 실패할 거면 크게 실패하는 게 어정쩡하게 실패하는 것보다 배울 게 많을 거로 생각했다. 오디션에서 떨어질 때마다 매일 일기를 썼다. 공부해야 할 것, 준비해야 할 것을 썼다. 옆 친구들이 오디션에 붙는 걸 보면서 뭐 하나라도 나보다 나은 점을 배우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그곳은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춤꾼들이 모인 곳이었고, 오디션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나는 그 노트를 ‘꿈 노트’라고 불렀다. 그리고선 “내 마음과 비전이 이미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있다. (My mind and vision were here, therefore now I’m here.)”라고 썼다. 내가 오늘 비록 오디션에 떨어져서 기분이 나빴어도, 꿈 노트에는 내가 원하던 바가 이뤄진 것처럼 일기를 쓰곤 했다. 실제로 오디션 합격 소식이 있기 2년 전, 처음으로 라스베이거스를 구경한 후 노트에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했다.”라고 쓴 적이 있었는데, 이후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하면서 이 문장을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받은 오디션 합격 통보
이후 ‘자바워키즈(Jabbawockeez)‘라는 팀이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드는 최초의 힙합댄스쇼 ‘뮤즈아이씨(Mus.I.C.)’의 오디션에 3차까지 붙고 나서 100여 명의 합격생과 한 달간의 합숙 미션에 들어갔다. 매일 8시간씩 춤추고 저녁에 오디션을 봐서 탈락시켰고, 마지막 날에 내가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그게 2011년이었다.
심사위원은 내게 “네가 가장 재능있는 춤꾼은 아니다. 다만 너의 성실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재능을 이겼기 때문에 널 주연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사실 그동안 자기 암시를 했어도 오디션에서 계속 떨어지면서 내 나름의 콤플렉스가 많이 쌓였었다. 그런데 이 피드백 한 마디가 그 콤플렉스를 잊게 해주었다.
사진 출처 : http://www.fb.com/MJONE
태양의 서커스 공연 및 안무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이뤘다. 지금까지 가장 보람 있던 때가 언제였나.
태양의 서커스는 1984년도에 캐나다에서 설립되어 연 매출 1조 원 이상을 올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연 회사이다. 나는 1,800석 규모의 라스베이거스 태양의 서커스 전용극장에서 ‘마이클 잭슨 원(Michael Jackson ONE)’이라는 공연에서 공연 및 안무를 맡고 있다.
난 늘 보람을 느낀다. 작년에 오프라 윈프리가 우리 공연을 보고 나서 한 명씩 악수하며 덕담을 건네준 적이 있는데, 감격스러웠다. 물론 60여 명의 공연가 중 한 명이었던 나를 기억할 리는 없겠지만, 내가 꿈꾸던 사람을 만나 악수를 하고 눈을 맞췄다는 게, 그녀가 내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게 기뻤다.
재작년에는 국민대학교에서 강연한 적이 있었는데, “형, 저도 한 번 해볼래요. 미국에 가서 도전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보람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서 춤추는 친구들이 한국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좀 더 큰 시장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말에, 책임감마저 느꼈다.
앞으로의 계획 및 목표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 보니 한국과 교류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바이메인(Bymaen)’이라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케이팝(K-pop)이 인기 있고, 한국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미국 안무가를 쓰는 일이 많다. 그러나 한국시장과 미국시장을 연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딱히 없어 그들의 재능을 100% 활용할 수 없거나 미국 시장 상황을 정확히 몰라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두 시장을 연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후배들이 세계 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싶다.
나는 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꿈을 갖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꿈을 갖되 지금 이 지점에서 꿈의 점까지 연결할 수 있는 걸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늘 꿈을 꾸는 ‘드리머(Dreamer)’가 되길 바란다. 드리머가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원문 : [우리지금만나 11] 춤으로 세계 정점을 찍은 이문행 안무가가 전하는 ‘꿈을 이루는 비결’
안경은 앱센터 외부필진 /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즐깁니다. 글로 정리해 사람들과 공유할 때 신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