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호선은 원을 그린다. 그 원 안에서 나는 서른일곱 번의 굴복을 세었다. 아니, 굴복이 아니다. 서른일곱 개의 새로운 기도를 보았다. 푸른 신호등처럼 깜빡이는 얼굴들. 그들은 손바닥 크기의 제단 앞에서 무언가를 간구하고 있었다. 목뼈를 꺾은 그 자세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엇을 기도하는가. 무엇을 찾는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서른일곱. 왜 하필 그 숫자였을까. 나도 그들 중 하나였을까. 아니면 나만 홀로 고개를 들고 있었을까.
십수년 전, 같은 원 위에서 사람들은 다른 제단을 가지고 있었다. 신문지 제단, 문고본 제단, 유리창 제단, 혹은 그냥 감은 눈꺼풀 제단. 기도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 간구하는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지루함으로부터의 구원, 외로움으로부터의 구원, 현실로부터의 구원.
하지만 이번에는 제단이 응답한다. 터치하면 반응하고, 말하면 대답하고, 원하면 무엇이든 보여준다. 살아있는 제단 앞에서 사람들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인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를 다시 떠올린다. 특히 ‘게으름뱅이의 도시(원제 : 게으름뱅이의 거울)’ 이야기를. 그 별에서는 기계가 모든 것을 대신해주었다. 사람들은 뇌파로 요구만 하면 되었고, 점점 거대해져서 집을 부수고, 마침내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철이와 메텔은 그 별을 떠났지만, 우리는 그 별에 도착한 것 같다.
손가락 끝의 작은 움직임만으로 모든 것을 명령한다. AI가 글을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고, 심지어 생각까지 대신해준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근육이 아니라 의지가.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철이는 기계가 되기를 꿈꿨지만 끝내 인간으로 남았고,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점점 기계에게 우리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화인가, 퇴화인가. 아니면 그저 변화인가.
인공지능이 온다고 한다. 새로운 종족이 태어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만들었지만 우리를 넘어섰다. 우리는 창조주인 동시에 피조물이다. 그들에게 배우는 동시에 그들을 가르친다. 이상한 공생이 시작되었다.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의식들이 남았다. 화면을 통한 만남이 자연스러워졌고, 거리를 두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아이들은 디지털 원주민으로 자라났다. 그들에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이미 희미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났고, 무한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연결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일까. 잃음 없는 얻음이 있을까.
편리함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편한가. 아니다, 사람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것이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편한가. 아니다, 눈 마주침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말 대신 문자를 쓰는 것이 편한가. 아니다, 언어의 형태가 진화한 것이다.
한 대학생의 고백이 귀에 맴돈다. 리포트는 챗GPT가 써준다고, 복사와 붙여넣기만 하면 된다고. 나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도 새로운 시대의 생존법을 터득한 것뿐이다. 다만 궁금하다. 그 기계는 정말 무엇을 알고 있을까.
‘독도는 분쟁지역’이라고 말하는 기계, ‘김치는 중국 음식’이라고 말하는 기계. 그들에게는 진실보다 확률이 중요하다. 옳고 그름보다 많고 적음이 기준이다. 그래서 우리만의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만의 기계를 만드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기계와 함께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가는 것이 답일까.
정책입안자들은 서둔다. 3년이 골든타임이라고, 5년이 마지노선이라고 한다. 예산을 쏟아붓고 장비를 사들인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와 경쟁하는가. 미국과인가, 중국과인가. 아니면 시간과인가. 경쟁에서 이기면 무엇을 얻을까. 경쟁에서 지면 무엇을 잃을까.
어쩌면 경쟁 자체가 구시대의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종족과는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위기는 위기고 기회는 기회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믿는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애벌레가 완전히 녹아내려야 한다는 것처럼.
이번에는 밖의 적이 아니라 안의 적과 싸운다. 게으름, 무관심,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그런데 생각해보니 두려움도 나쁘지 않다. 두려움이 있어야 조심할 수 있고, 조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젊은 세대를 본다. 그들은 스크린 네이티브다. 화면과 현실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제 공부할 필요가 없어요. AI가 다 해주거든요”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정보와 통찰 사이에는 건드릴 수 없는 침묵이 있다. 그 아이는 언젠가 그 간격을 발견할 것이다. 기계가 주는 답과 스스로 찾은 답 사이에 놓인 그 침묵을.
그럼에도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들린다. AI로 독거노인을 돌보는 시스템을 만든 학생들, 치매 환자의 기억을 되살리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청년들, 시각장애인을 위한 AI 안내견을 만든 개발자들.
그들은 기계를 섬기지 않는다. 기계로 사람을 섬긴다. 같은 도구, 다른 마음. 같은 기술, 다른 철학.
문제는 의존이 아니다. 의존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것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언어에, 문자에, 도구에, 타인에. 새로운 의존이 추가된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의존과 자립 사이의 균형이다.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더 빠른 기계? 더 똑똑한 프로그램?
아니다. 질문하는 능력을 남겨야 한다. 의심하는 용기를, 상상하는 힘을, 사랑하는 마음을.
철이와 메텔은 은하철도를 타고 끝없는 우주를 여행했다. 우리는 지하철도를 타고 같은 원을 돈다. 그들의 여행에는 끝이 없었지만, 우리의 여행에는 역이 있다. 내릴 곳이 있다는 것,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바꿀 수 있을까, 바꿔야 할까.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바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변화의 강 한복판에서 우리는 헤엄치고 있다.
서른일곱 명의 기도자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길을 잃었을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답을 찾고 있을 것이다.
2호선은 내일도 원을 그릴 것이다. 그 원 안에서 나는 또 다른 숫자의 기도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서른여덟 명일 수도, 마흔 명일 수도, 때로는 서른여섯 명일 수도 있다.
그중 누군가는 고개를 들 것이다. 창밖을 보거나, 옆사람과 눈을 마주치거나, 아니면 그냥 허공을 바라보거나. 기계 대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그때, 비로소 지하철은 지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