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50조 풀겠다 발표한 정부의 속사정
급하게 50조 풀겠다 발표한 정부의 속사정
이진우의 익스플레인 나우
민감한 금융시장 : 서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금융시장은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경기가 좋고 아무 문제가 없으면 신용이 높은 A 회사나 신용이 낮은 C 회사 모두 돈을 쉽게 빌립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신용도가 낮은 C가 A보다 이자를 많이 주므로 기왕이면 C에 돈을 빌려줍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C도 부도가 날 가능성은 A만큼이나 매우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A가 빌린 원금에 대한 이자 비율이나 C의 이자율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나빠지고 경기가 위축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C에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와 C의 이자율 차이는 매우 커집니다. 이 시기가 길어지면 C 중에는 부도를 내는 기업도 생깁니다. 사람들은 <누가 부도를 낼지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서> 돈을 못 빌려주고, 그렇게 돈 구하기가 어려워져 부도를 내는 C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다 경기가 다시 풀리면 괜찮아질 텐데요. 경기가 계속 나빠지고 금융위기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 C뿐 아니라 A도 돈을 못 빌립니다. 신용도가 높은 A라도 이때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겁니다.
돈줄 막힌 금융시장 : 요즘 금융시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신용도가 높은 대상에도 돈을 빌려주지 못하는>일이 자주 생기고 있습니다. 이 뉴스에는 그 상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관련 기사). 한화솔루션, LG유플러스, 심지어는 한국전력도 연 6%에 육박하는 금리를 제시하고도 돈을 빌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공급 늘리기 나선 정부 : 어제 정부가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한 대책을 내놨습니다(🔗관련 기사). 요지는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채안펀드나 산업은행, 기업은행, 증권금융 등을 통해 시중에서 채권을 사들이겠다는 겁니다. 지금은 돈을 빌리려는(채권을 발행하려는) 수요는 많고 돈을 빌려주려는(채권을 사들이는) 공급은 부족해서 가격인 금리가 계속 오르고 있으니 공급을 늘리겠다는 겁니다. 다만 이 정도로 해결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딜레마 빠진 정부 : 정부도 고민이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서 시중에 대량으로 풀면 해결이야 될 문제지만, 도덕적 해이가 걱정스럽습니다. 시장에서 아우성을 칠 때마다 정부가 나서서 도와주고 지원해주고 구출해주면 너도나도 위험한 대출을 기꺼이 하려고 할 겁니다.
예를 들어 이번 사태의 시작이 된 증권사들의 유동성 위기는 증권사들이 부동산 PF 대출을 대규모로 하다가 생긴 일입니다.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는 부동산 개발 사업의 밑그림만 보고 대출을 해줘도 별문제가 없었지만, 갑자기 부동산 경기가 식으면서 사업성이 나빠지고 빌려준 돈을 받을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관련 기사). 이런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증권사들을 정부가 도와주면 다음번에는 너도나도 위험한 부동산 개발 사업에 쉽게 뛰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장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방치하기도 어렵습니다. 강원도가 레고랜드와 관련한 빚보증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때문에 시장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단순한 불경기가 아니라 신용위기로 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관련 기사). 지방자치단체들이 강원도처럼 보증 의무를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임을 약속했다고 정부가 나서서 발표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관련 기사).
우선 시장 안정 기대해보는 것 : 시장에서는 발권력을 가진 한국은행이 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줄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은행채와 공공기관채를 시장에서 사들이는 것을 <검토>한다는 정도로 일단 시장을 달래려 하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한국은행이 은행채나 공공기관의 채권을 사들이면 은행채 등의 금리가 낮아집니다. 그러면 시장에서 은행채를 사려던 수요는 낮은 금리에 실망해서 조금 더 금리가 높지만, 조금 위험한 회사채를 사들일 것입니다. 안 팔리던 회사채가 팔리기 시작하면서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도덕적 해이 문제를 안고 있고 자칫하면 금리를 인상하면서 시중 유동성을 조여가는 통화정책 기조가 흔들린다는 신호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대책을 <발표>만 하고 그 영향으로 시장이 <알아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게 되기를 내심 기대하는 중입니다.
시간 싸움 벌이는 투자자들 : 하지만 시장의 생각은 다소 비관적입니다. 특히 최근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뉴스는 한국전력이 발행한 채권(한전채)이 팔리지 않는 사건입니다(🔗관련 기사). 한국전력이 돈을 빌려 갔다가 부도를 내는 사태를 걱정한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투자자들은 앞으로도 한전채 같은 채권이 계속 시장에 돈을 구하러 쏟아져나올 것인데, 조금 더 기다리면 더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달라고 할 것 같으니 더 기다리자는 것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면 발생하게 됩니다. 우량한 기업이 높은 금리에 돈을 빌리지 못하게 되면 덜 우량한 기업은 더 높은 금리에도 돈을 빌리지 못하는 악순환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관련 기사). 정부가 한전채나 은행채 등 우량한 채권을 사들이겠다는 대책을 내놓은 것도 이런 악순환을 풀어보겠다는 목적입니다.
시장 전망, 정부 기대처럼 밝지만은 않아 : 그러나 하필 이런 일이 금리가 오르고 경기가 위축되는 시기에 벌어지고 있어서 회사채 수요가 살아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게 다소 비관적인 시각을 가진 쪽의 의견입니다(🔗관련 기사).
2년 반 전과 비슷한 뉴스가 쏟아지는 이유
오늘의 이슈
2년 반 전에도 PF 조달 어려워 : 부동산 PF 자금 조달이 잘되지 않아 돈을 빌려준 증권사들이 애를 먹고 있다는 뉴스입니다(🔗관련 기사).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과 정확히 일치하지만, 사실 이 뉴스는 2년 반쯤 전에 코로나가 처음 확산되던 시기의 뉴스입니다.
돈줄 막히면 증권사 자기 자금 손실 커져 : 당시에도 코로나로 인해 경기가 침체될 위기가 닥쳐오자 자금이 돌지 않고, 부동산 사업이 올스톱되면서 아파트 분양 초기 단계에 밑돈을 빌려주던 증권사들이 부담을 떠안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증권사들은 고객들에게 돈을 빌려서 그 돈을 부동산 개발 사업에 빌려주는데요. 그러다 돈이 잘 돌지 않으면 자체 자금으로 그 구멍을 메웁니다. 다시 돈이 돌기 시작하면 다행이지만, (2년 전에는 다행히 다시 풀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증권사는 자기 자금의 손실을 입습니다.
분양 사업 잘 안 되고 있단 뜻 : 요즘 뉴스도 비슷합니다. 요즘 증권사들이 빌려준 부동산 사업 대출의 연체율이 평소의 3배가 넘는다는 소식은 아파트 분양 사업이 진도가 잘 안 나가고 있거나 자금조달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관련 기사). 증권사들이 돈을 빌리기 힘들어하고 있고 일부 증권사들은 부도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금감원은 이런 못된(?) 소문을 내는 사람들을 단속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관련 기사).
PF 대출 부실의 나비 효과
오늘의 이슈
PF 부실에 증권사 주가 하락 : 증권사들이 자칫하면 망할 수도 있겠다는 PF 대출 부실 사태는 당연히 증권사 주가의 하락 요인이 됐습니다. 증권사 주가는 무더기로 연중 신저가 수준까지 하락하고 있습니다.
리츠도 덩달아 급락 : 특이한 점은 부동산 투자회사 리츠의 주가도 급락하고 있다는 건데요(🔗관련 기사). 이유는 이렇습니다. 리츠는 <낮은 금리>로 대출받아서 대형 빌딩을 사들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월세를 배당해주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 <낮은 금리>가 영원한 게 아니라 직장인들의 신용대출처럼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금리가 달라져 차환 대출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즉 새롭게 돈을 빌려 원래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구조인데요. 금리가 높아지면 월세를 받아도 대출이자 갚기가 빠듯하니, 배당이 줄어들 게 확실해지면서 리츠 주가도 급락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회? : 물론 이런 주가 하락을 투자 기회로 삼자는 주장도 있습니다(🔗관련 기사).
놓치면 아까운 소식
> 금리 상승기에도 변동금리 대출 늘었다 : 급격한 금리 상승기에도 불구하고 올해 시중은행의 변동금리형 대출 비중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늘었단 소식입니다(🔗관련 기사). 금융 당국이 고정(혼합)금리형 대출을 늘려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인데요. 실제 올해 4대 은행에서 신규 취급한 변동금리 대출 비중은 7월 말 기준 77%가 넘었습니다. 금리가 비교적 낮은 상태에 머물렀던 지난해보다 변동형 상품의 비중이 늘어난 건데요. 일반적으로 변동형 상품보다 고정형 상품의 금리가 더 높아 대출 희망자들이 여전히 고정형 상품을 선택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파른 금리 상승세에 고정형 상품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당장 금리가 낮은 변동형 상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푸르밀 정리해고 후폭풍 : ‘비피더스’, ‘검은콩이 들어 있는 우유’ 등을 만드는 푸르밀이 갑작스러운 사업종료와 전 직원 일괄 정리해고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를 두고 노동계 안팎에서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푸르밀 노동조합은 23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푸르밀 사례가 합법적인 정리해고 선례가 되면 향후에도 수많은 악용사례가 발생할 것”이라며 국민들의 관심을 호소한 겁니다(🔗관련 기사). 또한 소비자 성향에 따라 사업다각화·신설라인 투자 등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했지만 안일한 경영으로 정리해고 사태까지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제 근로자들이 인원 감축, 임금 삭감에 나선 상황에서도 신준호 회장은 임금을 100% 수령하고 퇴직금 30억원을 타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