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무겁다. 우리가 내리고 싶지 않았던 결정이다.”
지난 10월 초, 싱가포르 패션 렌털 스타트업 스타일 씨어리(Style Theory)의 공동창업자 레이나 림(Raena Lim)이 고객들에게 보낸 서한의 첫 문장이다. 9월 30일, 회사는 모든 구독 서비스를 종료했다. 미사용 기간 환불은 없다. 빌린 옷은 보유해도 되지만 가방은 반납해야 한다. 위탁판매자들에게 지급할 돈은 청산 절차로 넘어갔다.
2016년 ‘클라우드 속 옷장’이라는 비전으로 출발한 회사는 2019년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로부터 1,500만 달러를 유치하며 동남아 패션 렌털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인도네시아로 확장하고, 의류에서 디자이너 가방까지 카테고리를 넓혔다. 하지만 지난 6월 인도네시아 사업을 접은 데 이어, 본거지 싱가포르에서도 9년 여정을 마감했다.
레이나 림은 “운영비 상승과 핵심 투자자 철회로 지속이 어려웠다”고 밝혔다. 가능한 모든 대안을 검토했지만 결국 종료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정말 옷을 빌려 입고 싶었던 걸까.
구독자가 늘수록 깊어지는 적자
패션 렌털의 역설은 간단하다. 고객 한 명이 옷을 빌릴 때마다 세탁비, 수선비, 배송비가 발생한다. 옷이 손상되면 교체 비용이 든다. 무제한 구독 모델에서 열성 고객은 회사에 가장 큰 부담이 된다. 규모의 경제를 기대했지만, 회전이 늘수록 변동비가 누적되는 구조였다.
스타일 씨어는 이를 인식하고 중고 리세일 서비스 ‘Second Edit’를 병행했다. 수익원을 다변화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파티와 행사가 사라지자 드레스 수요가 급감했고, 재택근무가 확산되며 ‘옷장 구독’의 필요성 자체가 흔들렸다. 2025년 핵심 투자자가 발을 빼자 회사는 급격히 무너졌다.
패션 렌털의 저주는 시장 규모와 무관했다. 미국의 렌트 더 런웨이(Rent the Runway)는 스타일 씨어리보다 10년 먼저 시작했고, 시장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이 컸다. 2019년 기업가치 10억 달러를 넘겼고 2021년에는 나스닥에 상장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상장 후 주가는 90% 이상 폭락했다. 물류와 세탁 비용은 시장이 크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렌털의 경계선, 경제성의 함정
자동차는 빌린다. 5천만 원짜리를 하루 10만 원에 빌릴 수 있다면 합리적이다. 웨딩드레스도 빌린다. 300만 원짜리를 30만 원에 빌려 단 하루 입는다면 경제적이다. 고가이면서 사용 빈도가 낮거나,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렌털 시장이 작동한다.
그렇다면 옷은?
패션 렌털의 함정은 바로 여기 있었다. 월 20만 원이면 자라나 유니클로에서 옷을 여러 벌 살 수 있다. 샤넬 재킷을 빌려 입을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지만, 그 비용이 누적되면 결국 중저가 브랜드를 소유하는 것보다 비싸다. 3개월이면 60만 원, 1년이면 240만 원이다. 그 돈이면 괜찮은 옷을 충분히 살 수 있다. 게다가 빌린 옷은 내 것이 아니다.
반대로 월 20만 원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애초에 고가 브랜드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빌림’은 편의가 아니라 타협이다. 소유할 수 있는데 왜 빌리는가.
더 치명적인 건 고객 행태였다. 구독자들은 비싼 옷을 집중적으로 빌렸다. 당연하다. 20만 원을 내는데 5만 원짜리 셔츠를 빌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고가 아이템일수록 세탁과 관리 비용이 더 들었다. 고객이 합리적으로 행동할수록 회사는 손해를 봤다.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내장된 모순이었다.
결국 패션 렌털은 ‘비싼 옷을 경험하고 싶지만 살 돈은 없는’ 좁은 틈새를 노려야 했다. 그런데 그 시장은 회사를 유지하기엔 너무 작았다. 월 20만 원을 기꺼이 낼 의향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옷을 사기엔 부담스러운 사람. 그 교집합은 생각보다 좁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2010년대 중반 등장한 패션 구독 서비스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일부는 살아남았다. 방법은 명확했다. 일상복 무제한 구독을 포기하고 중고 명품 대여로 피벗한 것이다. 고가이면서 일시적 수요가 있는 카테고리. 그 좁은 영역에서만 패션 렌털은 작동했다.
투자금은 연료였지, 산소가 아니었다
2019년 대형 투자를 유치한 후 스타일 씨어리는 재고와 물류 인프라를 빠르게 확장했다. 동남아 시장 특성에 맞춘 수거·교환 시스템을 구축하고 카테고리를 넓혔다. 하지만 단위경제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확장은 위험했다.
투자금은 성장을 가속하는 연료일 뿐, 회사를 살리는 산소는 현금흐름에서 나온다. 회전당 손실이 나는 구조에서 고객을 늘리는 건 파산을 앞당기는 일이다. 2025년 투자 환경이 바뀌고 핵심 투자자가 발을 빼자, 연료 공급이 끊겼고 회사는 추락했다.
지난 9월 한 고객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3개월 치 구독료를 날렸다”며 분노를 토했다. 빌린 옷은 그대로 가져도 된다지만, 이미 반납한 가방과 미래에 빌릴 수 있었던 옷들의 가치는 증발했다. 위탁판매자들은 받지 못한 정산금을 청산 채권으로 신고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화려한 브랜드 경험 뒤에 남은 건 청산 절차였다.
구독 경제가 멈춘 곳
음악은 소유하지 않아도 된다. 스트리밍으로 듣는 음악과 CD로 듣는 음악의 경험 차이는 크지 않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소프트웨어도 구독으로 넘어갔다. 심지어 자동차도 구독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옷은 다를까. 옷은 몸에 닿는다. 매일 선택한다. 옷장을 연다는 건 단순히 기능을 고르는 게 아니라 오늘의 나를 결정하는 일이다. 정체성과 소유욕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답은 더 단순했다.
9년의 실험이 증명한 건 간단하다. 구독 경제에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 그 선은 ‘몸에 닿는가’가 아니라 ‘경제성이 성립하는가’였다.
레이나 림은 “현재의 경제 환경이 지속 가능성을 약화시켰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스타일 씨어리가 직면한 건 경기 순환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객이 합리적으로 행동할수록 회사가 손해를 보는 구조, 시장이 클수록 적자가 커지는 모델, 성장이 곧 파산을 앞당기는 역설. 그것은 비즈니스 모델 자체의 한계였다.
모든 것이 구독 가능한 시대에도, 경제성이라는 경계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스타일 씨어리는 그 선을 넘으려 했고, 옷장은 그 선 너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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