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아래아한글로 잡지와 단행본을 만든 적이 있었다.
당시 아래아한글의 인기가 무척 높아서 신제품이 출시되기만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구매하던 시절. 나름 고객들이 원하는 바를 미리 파악해서 신제품에 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었다.
당시 회사에는 다양한 부서가 있었다. 개발부, 영업부, 고객지원부 및 아래아한글로 잡지와 단행본을 만들던 출판부 등이 있었다. 각 부서마다 나름 경쟁과 조화를 이루던 시절, 영업부의 업무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아래아한글을 국회에 납품시키고 싶은데, 교육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이다. 영업부 입장에서는 청와대나 국회 등 정부 기관은 매출 규모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큰 곳이기에 어떻게든 성사시키려고 하는데, 뭔가 가로막는 벽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도와달라는 것이다.
영업 지원이라고 해야 하나, 교육 지원이라고 해냐 하나… 좌우지간 시간을 잡아주면 함께 가서 교육(설득)을 하기로 했다.
정해진 시간, 국회의 어느 회의실에 도착하니 10명의 공무원들이 대기하고 있어다. 알고 보니, 그 분들은 국회에서 열리는 모든 회의의 대화내용을 기록하는 속기사 분들이었다. 정기국회나 임시국회 등 국회에서 열리는 회의는 모든 대화 내용을 기록해야 하는 법률이 있고, 거기에서 빠질 수 없는 분이 속기사 분들이다.
속기사가 모든 회의 내용을 속기로 기록하면, 다시 그것을 일반 구어체로 번역(?) 및 타이핑하는 과정을 거쳐 정해진 부수만큼 인쇄하여 국회에 보관해야 한다는 법률이 있다고 한다. 즉, 수기 속기 => 번역 => 타이핑 => 인쇄 => 제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좁은 범위의 아래아한글, 넓은 범위의 컴퓨터에서 직접 작업하게 되면 수기 속기 => 번역 => 타이핑 이 세가지 과정을 하나로 줄일 수 있다는 내용의 교육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당연히 국회 사무처에는 업무의 효율화와 예산 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국회에 컴퓨터 도입(아래아한글 도입)을 검토하는 것이 맞는데, 수십년 동안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해왔던 국회 속기사들 입장에서는 복잡한 문제였다.
국회 사무처에서의 업무의 효율이나 예산 절감이라는 의미는, 속기사들의 감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양쪽 부서의 첨예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교육을 처음 진행할 때만 하더라도, 그런 문제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아래아한글로 입력하면 업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고, 비용절감이 될 것이라는 내용만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데, 속기사 분 중 한 분이 이렇게 질문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갑자기 말 문이 탁 막혔다.
뭐라고 이야기해줘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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