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주목할 만한 숫자 하나가 공개됐다. 벤처기업들이 창출한 일자리가 이미 국내 4대 그룹 전체 고용인원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한국중소기업학회가 벤처기업협회, 중소기업중앙회와 함께 개최한 ‘제1회 혁신벤처포럼’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 자리에서 학자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의 벤처 생태계가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진병채 학회장은 개회사에서 벤처기업의 성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벤처기업은 지난 30년간 국가 경제 성장률을 상회하는 성장을 해왔다. 저성장 시대에 경제 성장을 주도하고, 한국 경제 구조를 전통 제조업 중심에서 지식 집약형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중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상황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세 가지다. 먼저 유능한 인재가 벤처 생태계로 유입될 수 있도록 스톡옵션 제도를 정비하고, 획기적인 세제 개편을 통해 민간자금을 끌어들이며, 투자 회수 시장 활성화를 위해 벤처기업 M&A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도 비슷한 맥락에서 “소수 대기업 중심의 산업정책을 중소·벤처기업 중심 생태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AI 서비스를 제조·유통·물류·서비스업에 활용해 중소·벤처기업 생산성을 높이고, AI 팩토리 확산을 위한 「스마트제조산업 육성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발제에 나선 배종훈 서울대 교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지난 10년간 창업지원체계가 고도화되면서 창업가들이 부담하는 위험은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제는 ‘생존율 기반 지원’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 지원’으로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 교수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대칭적 규제 도입, 상품이 아닌 가치사슬 수준의 아이디어 발굴, 컴퓨터 연산 지원 서비스가 포함된 공유 데이터센터 구축 등을 제시했다. 창업 생태계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질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박성혁 카이스트 교수는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 방안으로 ‘플립(flip)’에 주목했다. 플립은 기업을 매각하지 않고도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방식으로, AI 스타트업 임팩트에이아이 사례를 통해 ‘이연플립(deferred flip)’ 방법론을 소개했다.
진병채 교수는 또 다른 발제에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대한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대기업의 지방 유치는 지역 주민 소득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만, 지역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 창업생태계 확산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벤처기업 육성이 지역의 경제 성장과 고용창출, 기술혁신을 견인한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역 혁신특구가 성공하려면 “특구 지정만으로는 효과가 없고, 정부 차원의 재정 투입, 지역 중심의 민간 투자생태계 조성, 거점 지방대학을 중심으로 한 인재 양성이 연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합토론에서 이정민 벤처기업협회 사무총장은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대한민국의 청년과 미래를 위해 벤처정책은 국가 경제정책의 최우선 아젠다가 돼야 한다”고 말하며, 68개 법정기금의 벤처·스타트업 투자 의무화, 주52시간 제도 등 근로시간 제도 개편, 규제혁신 기준 국가 목표제 도입 등을 제안했다.
이날 포럼에는 중소벤처 분야 연구자들과 실무자들뿐만 아니라 벤처기업 업계 관계자들도 대거 참석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벤처 생태계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현실적인 정책 대안들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의 벤처 생태계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도약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 이날 포럼의 핵심 메시지였다. 이제는 단순히 창업 숫자를 늘리는 것을 넘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혁신기업들이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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