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P는 11월 26일 2028 회계연도까지 전 세계적으로 4,000~6,000명을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제품 개발, 내부 운영, 고객 지원 부문이 대상이다. 엔리케 로레스 CEO는 “이번 조치로 3년간 10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것”이라며 그 이유로 “인공지능을 활용한 운영 효율화”를 명시했다.
이 발표가 특별한 건 숫자와 시기, 그리고 이유가 모두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AI로 인해 사라질 직업”은 전망의 영역이었다. 순위표가 나오고 토론이 벌어졌지만, 그건 미래 시제의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HP 발표에는 회계연도가 찍혀 있다. 2028년. 3년 후다.
HP만이 아니다. 인텔은 2025년 말까지 약 24,000명(전체 인력의 15~22%)을 감축한다고 발표했으며, 2025년 5억 달러, 2026년 추가 10억 달러의 비용 절감 목표를 제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5년 한 해 동안만 15,000명 이상을 단계적으로 감축했다. 액센츄어는 약 11,000명을 감축하며 “AI 시대를 위한 인력 재편성”이라고 밝혔다. 메타, 아마존, 구글을 비롯한 빅테크 기업들이 지난 2년간 수만 명 규모의 구조조정을 진행했고, 상당수가 “AI 인프라 구축”을 명분으로 제시했다.
과거의 구조조정이 경기 침체나 실적 부진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지금의 감축은 다른 성격이다. 이건 비용 절감이 아니라 재투자를 위한 재구조화다. 절감한 10억 달러가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다. 세일즈포스는 AI 기반 고객 지원 시스템 ‘Agentforce’ 도입으로 케이스 처리 건수가 줄어들자 4,000명의 고객 지원 직무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업무가 줄어든 게 아니라 AI가 대체한 것이다.
전망이 일정표가 된 순간, 사람들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의 성격도 달라진다. “언젠가”와 “2028년까지”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전자는 추상적 경고지만, 후자는 구체적 마감시한이다.
흥미로운 건 한국 기업들의 대응 방식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AI 전환을 위해 몇 년까지 몇 명을 감축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대기업은 없다. 그렇다고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표현이 다를 뿐이다.
업계에서는 신규 채용 축소를 “채용시장 불확실성”으로, 조직 개편을 “효율화”로 설명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AI 도입과의 직접적 연결고리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방식이다. 이는 사회적 반발을 고려한 선택일 수도 있고,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차이는 중요하다. 미국식 접근은 적어도 당사자들에게 준비 시간을 준다. 2028년까지라는 구체적 시한이 있으면, 개인들은 재교육이나 전직을 계획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대응 방안을 논의할 시간이 생긴다. 반면 암묵적 접근은 당사자들이 변화를 늦게 인지하게 만든다. “서서히 밀려나다가, 갑자기 자리가 없어진” 상황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스타트업 현장에서는 이미 변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4~5년 전만 해도 개발자 채용은 품귀 현상이었다.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코딩 부트캠프가 성업했고, “6개월 배우면 취업 보장”이라는 말이 통했다. 지금은 다르다. 신규 개발자 채용이 줄었고, 대신 GitHub Copilot이나 Cursor 같은 AI 코딩 도구 활용이 필수가 됐다. 같은 팀 규모로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 인원이 줄어들었다.
이 변화의 속도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건 타임라인이다. 업계 관계자들의 관측으로는 이 과도기가 길어야 2~3년이다. 지금부터 2027~2028년 사이에 “누가 AI를 최적화했는가”가 가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HP가 2028년을 목표 연도로 잡은 것도 같은 계산일 수 있다. 3년이면 조직 내에서 누가 새로운 방식에 적응했는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다.
문제는 이 적응이 단순한 도구 사용법 습득이 아니라는 점이다. ChatGPT나 Claude 같은 AI 도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지만 “많이 써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생산성 격차는 실리콘밸리에서 말하는 x10, x100 수준까지 벌어진다. 이건 교육으로 메울 수 있는 종류의 격차가 아니다. 매일 수십 번씩 AI와 대화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최적화 패턴을 체득하는 경험치의 문제다.
그래서 지금은 과도기다. 도구는 평등하게 주어졌지만, 결과는 불평등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불평등이 2~3년 후에는 “적합한 사람”과 “부적합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HP 발표에 담긴 2028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목표가 아니다. 여러 기업들이 동시에 맞춰놓은 시계다. 과거에 “AI 시대”를 말할 때 사람들이 상상했던 건 먼 미래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기업들이 발표하는 건 회계연도가 찍힌 실행 계획이다. 전망이 일정표가 됐고, 추상이 구체가 됐다.
시계는 이미 작동하고 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