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타의 수석 엔지니어링 리더였던 에릭 마이어는 최근 취미로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유가 독특하다. “몰입감을 경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더 이상 코딩에서는 그 감각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 “클로드 코드가 75년간의 학술 연구보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더 발전시켰다”고 감탄한 바 있다. 도구의 위력에 경외감을 표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 도구 앞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것이다. 기술의 도약을 목격한 사람이 동시에 상실을 말하는 장면. 이 역설이 지금 소프트웨어 업계 곳곳에서 조용히 번지고 있다.
세무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어웨이큰 택스의 창업자 앤드류 두카는 이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놀랍다. 코딩이 이렇게 재미있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약간 우울하다.”
수만 시간을 들여 익힌 기술이 범용 상품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쳐 숙달한 것이 “이제 대부분 쓸모없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는 이것을 ‘낙담’이라고 불렀지만, 어쩌면 애도에 더 가까운 감정일지 모른다. 무언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감각. 그것이 직업인지, 정체성인지, 아니면 일하는 방식 그 자체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상태에 이름을 붙인 적 있다. 플로우(flow).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자아와 행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 난이도와 능력이 정확히 맞물릴 때 찾아오는 그 몰입의 상태를 그는 평생 연구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다른 언어로 같은 현상을 포착했다. 그의 책 ‘장인’에서 세넷은 “일 자체를 위해 일을 잘하려는 욕구”를 탐구한다. 1만 시간의 반복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손과 머리가 협응하며 기술을 체화하는 그 과정 자체가 자아를 형성한다. 장인에게 숙련은 생계 수단 이전에 존재 방식이다.
코드를 짜는 사람들에게 이 감각은 낯설지 않았다. 버그의 원인을 끈질기게 추적하다 마침내 실마리를 찾는 순간, 더 우아한 해결책이 떠올라 기존 코드를 갈아엎는 순간. 며칠째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 좌절하고, 새벽까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눈이 충혈되기도 했지만, 그 고통 끝에 코드가 마침내 작동할 때 찾아오는 조용한 충만함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인이었다.
이제 AI 도구가 그 과정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 며칠 걸리던 작업이 몇 분 만에 끝난다. 생산성은 올라갔다. 이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비어버린 느낌이 든다. 결과는 더 좋아졌는데 과정이 사라졌다. 플로우가 흐를 틈이 없어진 것이다.
더 프래그매틱 엔지니어의 게르겔리 오로시는 이번 주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AI가 내가 프로덕션에 배포하는 코드의 대부분을 작성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제목은 “AI가 모든 코드를 작성할 때의 상실감”이었다.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스케일AI와 AI 안전 센터가 수백 개의 실제 프리랜스 프로젝트에서 오픈AI, 구글, 앤스로픽의 주요 AI 모델들을 테스트했다. 그래픽 디자인, 3D 모델링, 인터랙티브 대시보드 제작 등 실제 과제를 주고, “합리적인 클라이언트가 이 결과물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기준으로 평가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AI가 독립적으로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첫눈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락된 세부사항, 시각적 오류, 불완전한 작업, 기본적인 기술적 결함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개발자들은 상실감을 말한다. 여기에 이 현상의 본질이 있다. 실제로 대체되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대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다. 위협은 현실이 되기 전에 이미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
개발자들에게 코딩은 단순한 업무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의의 핵심이었다. 수년간 알고리즘을 익히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디버깅의 고통을 견디며 쌓아온 전문성. 그 여정 자체가 정체성을 형성했다. AI가 그 여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가.
이제 그 자리에 남는 것은 AI를 지시하고 검토하는 역할이다. 창작자에서 관리자로. 연주자에서 지휘자로. 어쩌면 더 높은 위치일 수 있다. 전체를 조망하고, 방향을 설정하고, 품질을 판단하는 일. 하지만 현을 직접 튕기던 손끝의 감각, 그것은 사라진다.
이 감각의 상실이 개발자들만의 이야기일까.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근 보고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적절한 교육 없이 AI를 사용할 경우 근로자의 역량이 저하되고 판단력이 약화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AI가 생성한 ‘워크슬롭’—유용해 보이지만 오류가 포함된 콘텐츠—이 매달 거의 40%의 직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통계도 제시했다.
더 우려스러운 숫자도 있다. AI 노출도가 높은 직무에서 22~25세 신입 근로자의 고용률이 약 13% 감소했다. 경력을 막 시작하려는 세대가 출발선에서부터 막히고 있다는 의미다. 오랜 숙달의 과정이 무의미해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 과정에 진입할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니까.
에릭 마이어가 악기를 집어든 것은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일 것이다. 효율과 무관하게, 대체 가능성과 무관하게, 순전히 몰입 그 자체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일. 손끝으로 직접 소리를 만들어내는 일.
철학자 매튜 크로포드는 비슷한 선택을 한 적 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사표를 내고 오토바이 수리공이 됐다. 그의 책 ‘손으로 생각하기’에서 크로포드는 “사무실에서 느끼지 못한 만족을 손으로 무언가를 고칠 때 찾았다”고 썼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회복이었다.
마이어의 악기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거기에는 AI가 대신해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아니, 대신해줄 필요가 없는 무언가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코딩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코드를 쓴다. 다만 이제 그는 두 개의 악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AI와 함께 연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혼자서 연주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결과를 얻고, 후자에서는 과정을 산다.
도래한 이 변화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두 번째 악기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과 과정을 살아내는 일.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무엇을 연주하며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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