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꿈 중 하나는 세계여행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 여행을 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 청년의 꿈도 그러했죠. 아무리 휘둘러도 손에 잡히지 않을 꿈과 같은 이야기로만 들렸던 것을 이 청년은 해 내고 말았습니다.
총 27개국, 130여개의 나라, 50,200km의 주행거리, 53번의 행사를 400일동안 버스를 타고 해낸 김치버스의 류시형 팀장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이번 소셜인터뷰는 류시형 팀장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인터뷰는 원래 탈고를 마치고 2013년 1월에 나올 제 책에 (가제: 블로그로 꿈을 이루는 방법) 들어갈 내용인데요, 스타트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닮은 점이 많아서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팀빌딩과 자금조달, 서비스 기획과 런칭, 운영, 지속성까지 닮은 점이 많았는데요, 어쩌면 창업을 하고 경영을 한다는 것이 설레기도 하지만 우여곡절도 많은 여행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여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김치를 알린 김치버스의 류시형 팀장과의 인터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Q1. 김치버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모티브는 2006년에 유럽을 무전 여행으로 다녀와서 26유로 책을 썼을 때 였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무전 취식을 하다보니 한국 요리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한식당에 가도 전문적이니 못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 때 여행을 같이 하던 친구가 2명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세계 여행을 가자고 했었어요. 처음엔 세계 자동차 여행을 하기로 했고, 자동차 여행을 갈 때 그 차 이름을 정했습니다. 그 때 지은 차 이름이 김치 버스였어요. 처음 생각은 봉고 정도의 크기였는데, 이름을 우선 김치 버스로 정하고 나니 정말 버스를 타고 다녀오게 되더군요. 네이밍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때 그 네이밍 때문에 김치 버스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먼 미래라 흐지부지 되었어요. 그러던 차에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네이버 여행 분야의 파워블로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 중 2명과 꿈을 지원해주는 3억 프로젝트였던 조니워커 프로젝트에 지원했는데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벌써 두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서 혼자서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에 김치버스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협찬을 받지 못해도 그냥 무작정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때 학교 후배 석범이가 같이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엔 그간 팀 구성의 힘들었던 점 때문에, 멤버 구성이 쉽지 않은 것이라 만류했지만, 후배는 김치버스 프로젝트에 대해 공부를 해오고, 열심히 준비까지 해와서 그 열정을 보고 합류시키게 되었습니다. 꿈과 비전이 맞지 않는다면 팀은 깨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죠. 또 한명의 후배가 합류하게 되었고, 그렇게 팀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김치버스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자동차 세계 여행이 협찬과 기획에 맞춰가다보니 애국심과 홍보가 더해지게 되면서 김치버스가 완성되어 갔죠.
Q2. 협찬이랑 기획은 어떻게 하였나요?
두번의 실패를 하다보니 이런 식으로 되지 않는거라고 판단되었어요. 무전여행 때도 협찬을 받기 위해 무작정 기획서를 등기로 보내곤 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뿐이었죠. 그래서 지인을 통해서 우선 뚫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실무진들과 미팅을 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역시 99%는 부정적인 답변만 돌아왔습니다.그러던 중 운이 좋게도 현대자동차에서 5개월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협찬을 받기로 했지만, 개인의 자격으로는 계약이 되지 않기에 책임을 지고 돈을 전달해줄 주최 회사를 찾아야만 했죠. 그러다 우연히 한 프로덕션을 알게 되었고, 올로케이션으로 방송을 찍기로 하고 주최회사를 맡아주었습니다. 김치는 감칠배기에서 협찬을 받았고 배송은 광주 시청에서 해 주었죠. 코오롱에서는 분기별로 침낭, 텐트, 옷등을 협찬받게 되었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도 조리도구와 장비등을 협찬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요, 협찬을 받은 금액은 출발을 한 후에 들어오게 되었죠. 그러나 출발을 우선은 해야 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에게 5천만원을 빌려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차를 구매했어야 했는데요, 개조된 차량을 구하는 것이 관건이었어요. 정식적으로 개조된 캠핑카는 국내에 20여대 밖에 없었고, 소유주를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차량 소유주가 팔지 안 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죠. 김치버스는 98년식 현대차 카운티를 개조한 차인데요, 이 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트위터 덕분이었습니다. 트위터에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고 김치버스를 구한다는 트윗을 날렸는데 트위터 친구 중 한 친구가 자신의 자동차 딜러 친구를 소개시켜주었고, 그 딜러 친구는 마침 애국심이 강한 친구였죠. 그친구가 자신의 모든 소스를 동원하여 합법적인 차를 구하게 되었고, 그렇게 김치버스를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Q3. 김치버스를 보니 미니버스이고 종종 고장도 났었던 것 같은데 기존에 자동차에 대한 상식이 있었나요?
아니요. 자동차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어요. 막상 닥쳐서 고장이 나면 그 때마다 공부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다. 부품은 왠만한 것은 다 갈았어요. 부동액 누수로 인해 왠만한 호스도 다 갈았죠. 클러치 디스크 나갔고, 알터네이터도 나갔었어요. 한번은 오스트리아에서 차가 밤 중에 가다가 눈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땐 너무 힘들었어요. 운전 중 배가 아팠는데, 화장실이 있는 주유소가 나오지 않았어요. 마침 기름도 넣어야 했는데, 주유소가 안나오니 마음이 다급해지게 되었죠. 그래서 급하게 한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마을로 들어가서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차가 미끄러져서 눈밭으로 들어가게 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거에요. 차는 4톤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차가 나오려고 공회전 소음을 내다보니 주변 마을 사람들이 10명이 나와 도와주었어요. 그러나 10명으로는 어림도 없었죠. 설상가상으로 차가 나오다가 미끄러져서 후미등이 나가는 사고를 당하기까지 했죠. 그런 와중에도 배가 너무 아파서 우선 근처 호텔에 가서 일을 치르고 나왔죠.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닷지같은 차를 무조건 잡아서 도움을 요청했어요. 닷지가 줄로 묶어서 끌어주니 다행히도 나올 수 있게 되었죠. 그 닷지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미국에 갔을 때는 알터네이터가 나갔었죠. 그 때도 마찬가지로 끌어도 안되어 가슴을 조리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차가 직접 뒤에서 밀어주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그 차는 새차였는데, 앞 범퍼가 나갔더라고요. 인심 좋은 그 분은 아무런 댓가없이 도와주셨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물탱크가 터져서 차 안에서 물이 세기 시작하여 출발 직전에 못갈 뻔한 큰 사건이 두번 정도 있었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Q4. 포르투칼에서 차가 유리창이 깨졌는데 어떤 사건이었나요?
포르투칼에서 지난 무전여행 때 만났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급하게 내리다보니 네비게이션을 붙여놓고 들어갔었죠. 그 다음 날 일어나보니 유리창을 깨고 캐논 600D 카메라와 방수 카메라, 카메라 렌즈, 프로젝터, 네비게이션까지 모두 다 떼어갔어요. 스페인에서도 같은 일이 또 있었죠. 그 사건이 있은 후 유리를 못 갈았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차종의 유리가 없어도 비슷하게 만들어 장착해주는데, 그곳에서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차종의 유리창이 아니면 교체가 안되었어요. 수소문을 하다가 우연히 플라스틱 공장에서 강화 플라스틱을 비슷하게 만들어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유리 대신 강화 플라스틱을 임시로 덧대었죠. 그렇게 스페인을 갔는데 그 당시에는 김치버스를 취재하는 팀도 같이 있어서 취재팀과 함께 차를 대놓고 시내로 갔죠. 그런데 그 강화 프라스틱을 깨고 또 다 가져갔어다. 그 땐 노트북 2대와 취재오신 pd님 배낭, 옷까지 모두 가져간 적이 있었어요.
Q5. 정말 당황했을 것 같은데, 그 때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대처할 수가 없었어요. 빨리 순응하고, 인정해야 했죠. 경찰에 가도 리포트만 작성하면 그만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Q6. 그럼 여행자 보험같은 것에 대해서는 고민해본적이 없나요?
보험이 500만원이라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보험이 너무 비싸서 만약 보험을 들었다면 여행을 가지 못했을거에요.
Q7. 노트북이랑 카메라에 담긴 정보나 기록이 도난당할 경우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했나요?
다행히도 외장하드는 차에 남아있었어요. 그 일이 있은 후 백업을 생활화 했죠. 적어도 2, 3번씩은 백업을 해 두었습니다.
Q8. 김치버스는 현장에 가서 어떻게 진행이 되었나요?
어레인지를 미리 하고 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어요. 보통 즉석으로 하게 되었죠. 대사관이나 문화원에 가서 요청을 하기도 했어요. 나중에는 페이스북에서 요청이 많이 들어왔죠. 특히 유럽에서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페이스북을 통해서 외국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이 되었죠. 처음에 좀 알려지는데 한달 정도 걸렸고, 이후에는 많이 알려지게 되어 행사도 많이 하게 되었어요.

행사는 진행 방법은 가는 곳마다 달랐어요. 레스토랑을 빌렸을 경우는 레스토랑에 우리 메뉴를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고, 차에서 직접 나눠주기도 했죠. 시청, 공원, 해변등 많은 곳에서 김치버스를 하게 되었어요. 장소만 있으면어디든 다 했죠.
메뉴는 주로 김치 퓨전 요리나 한식을 만들어서 나눠주었어요. 김치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는 브로셔를 나눠주기도 하고, 강의를 하기도 했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뭐든 다 할 수 있었어요. 맞춰서 웬만한 것은 다 해 주었죠. 어느 나라든 영어로 다 이야기했는데요, 현지 학생이나 서포터를 해 준 사람은 우선 우리와 커뮤니케이션이 되기 때문에 그 친구들이 통역을 해 주기도 했어요. 무전 여행을 통해서 영어가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도 강의를 많이 했는데, 전세계 TOP 10의 손가락에 꼽는 조리학교들 중에 6개 정도는 가서 행사를 진행하고, 강의도 했어요. 미국의 CIA 조리대학과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조지 브라운 조리 대학, 프랑스의 폴보퀴즈, 스페인의 루이즈 이리자 조리학교, 모스크바의 28번 기술대학등을 다니며 강의를 했어요. 모두 각 나라에서는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조리 학교였죠. 강의 내용은 한식 강의와 장과 김치에 대해 했어요. 다들 매우 관심있어하고 좋아했습니다. 강의 후 음식도 나눠주고 같이 먹고 나누며 교제를 나누었죠.
Q9. 그럼 사람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겠군요?
동유럽에서는 거의 한류스타였어요. 바르샤바 문화원에서는 300km가 떨어진 곳까지 따라온 팬들이 있을 정도였죠. 폴란드 전체에 한류 펜클럽을 통해서 연락이 되어서 행사장에 50명이 꽉차게 되었죠. 김밥을 말았는데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주기도 해서 한류스타가 된 느낌이었어요.
Q10. 김치버스를 타며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차가 고장 났을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김치버스는 차가 생명인데 차가 고장나면 정말 미칠 것 같았죠. 멤버들끼리 싸울 때도 있었어요. 리더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원래 알던 사이다보니 그런 부분에서 부딪혔던 것 같아요. 400일 동안 다니며 안 싸울수도 없는 일이니 서로의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갈등이 있긴 했었어요.
Q11. 김치버스를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요?
외국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고, 김치를 궁금해하고 만들려고 할 때 보람을 느꼈어요. 보는 사람마다 한국 번호판을 보고 한국차라는 것을 물어보았는데, 전세계를 한국 번호판을 달고 다닌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거에요. 미국 캠핑 유저들에게는 respect라는 소리까지 들었죠. 운전을 하고 있으면 옆에 가던 차에서 김치버스 사진을 찍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 보람을 느꼈어요
Q12. 김치버스가 400일간 50,000km를 완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꿈 덕분이었요. 더하여 협찬으로 인한 의무감과 책임감도 있었죠. 또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에 육적이나 심적으로 이겨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내 꿈과 나를 지켜봐주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의무감을 갖게 되었죠. 나를 멋지게 봐주고 나로 인해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태해지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Q13.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애피소드는 무엇인가요?
에전에 무전여행을 했던 26유로 때 만났던 친구들이 차를 타고 와서 환대를 해 준 것이 너무 좋았어요. 너무 많아서 하나만 찍기는 힘들 것 같네요. 애피소드들을 블로그에 풀어 놓을테니 제 블로그를 통해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책도 출간할 예정이니 책으로도 이야기하도록 할께요.
Q14. 요즘 많은 SNS가 있는데 어떻게 활용하시고 계신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SNS를 누구는 자랑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떤 것을 하고 있고, 어떤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 생각해요. 전 블로그에 답글을 안단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트위터 팔로워가 10만명이 넘지만, 트위터에서도 메세지나 멘션에 답글을 안단 적이 없죠. 페이스북도 모두 언급을 하여 답글을 달아줍니다. 이번 제 생일 때는 수백개의 축하 메세지가 와서 생일 답글을 달아주는데 몇시간 걸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게 재미있고, 즐거워요. 그렇다고 댓글이 없어도 전전긍긍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즐겁고 기쁘죠.
트위터를 하며 느낀 것은 아는 척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같아요. 강남의 어떤 맛집이 맛있네는 아닌 것 같아요. 그건 소통이 아니라 통보죠. 통보가 아닌 느낌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 것이 소통인 것 같습니다.
Q15. 김치버스에 있어서 소셜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김치버스에 있어서 소셜의 영향력은 굉장히 큽니다. 김치버스 제안서를 냈었을 때도 SNS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죠. 다행히 제가 파워블로그였고, 파워트위터리안이었기에 먹혔던 부분도 있습니다. 출발할 때도 SNS의 힘을 많이 받았죠. SNS가 없었다면 협찬사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협찬사에게 계속 피드백을 어렵게 할 필요 없이 채널이 연동되어 있기에 리소스를 덜 수 있었어요.
Q16. 블로그로 꿈을 이루어가려는 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 한마디만 해 주세요.
블로그든 SNS든 단순한 도구로서만 사용하면 안될 것 같아요. 생활처럼 진실되게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아요. 편안하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학교 수업처럼 경직된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블로그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꿈을 이룰 수 있을거에요.
Q17.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김치 버스에 관련하여 계속 일을 할거에요. Food flea market(벼룩시장)나 홈메이드 파머스 마켓 같은 것을 열 예정이에요. 김치버스 차량 전시와 카페도 만들어 볼 예정이고, 앞으로 김치버스 2기도 보내어 김치버스를 지속 할 예정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면서 살수 있구나’ ,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꿈을 위해서 살고 있나요?
김치버스 홈페이지: http://www.kimchibus.com
류시형 팀장 블로그: http://blog.naver.com/silchris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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