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up’s story #281] “음지의 동인 문화를 산업으로” 이미호 캡슐코퍼레이션 대표
‘5차 산업을 4차 산업 길목에서 틀어쥐려는 후조 스타트업’
캡슐코퍼레이션이 스스로에 대해 내린 정의다. 이들은 동인 문화를 향유하는 일명 ‘후조시(腐女子·부녀자)’의 활동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만든다. 타깃도 관련 문화가 시작되었고 산업으로 인정받는 일본시장이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법무팀에서 잔뼈가 굵은 이미호 캡슐코퍼레이션 대표는 ‘캔디캔디’로 시작해 ‘드래곤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만화에 입덕하며 20여 년 간 동인 작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미호 대표를 만나 독특한 사업 아이템을 선택한 이유와 사업에 대해 들어봤다.
캡슐코퍼레이션이라면 연상되는 만화가 있다.
맞다. 그거. 드래곤볼 속 부르마 아버지가 세운 주식회사.
알겠다. 현실의 캡슐코퍼레이션은 무엇을 만드는 회사인가.
후조시의 활동을 지원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다. 일본을 기반으로 한다. 후조시들이 개최하는 이벤트 정보를 모아 보여주는 ‘오타카츠(otakatz)’가 우리의 첫 서비스다. 오타쿠 판 ‘온오프믹스’라고 이해하면 쉽다. 오타카츠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창작 활동을 하는 후조시들을 위한 온라인 출판 플랫폼을 만들 생각이다. 오타쿠 판 ‘스팀’ 같은.
처음 사업 모델을 듣고 ‘새로운 아이템이긴 한데 과연 시장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시장이 작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국세청 신고 기준으로 연간 동인 시장 규모가 2조 원이다. 작가들이 만화나 소설을 책으로 만들어서 내는 동인지 시장만 1조 원이다. 이 동인지를 판매하기 위해 개최하는 오프라인 이벤트 규모는 500억 원 규모고. 오타쿠 시장까지 포함하면 6조 원에 달한다.
‘오타쿠’와 ‘후조시’는 어떤 부분이 다른가? 위키백과에서는 ‘후조시’를 여성 오타쿠를 총칭하는 단어라고 설명한다.
서비스명에 ‘오타쿠’라는 단어를 가져다 쓰고 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오타쿠와 후조시를 구분해서 보고 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성별이 아닌 콘텐츠 소비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 그룹 팬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오타쿠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지표를 남기는 것, 즉 ‘내가 이 상품을 수집했다’, ‘내가 이 행사를 갔다 왔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후조시는 좀 더 대상 지향적이다.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 대상에 애정을 쏟는다. 큰 의미로 보면 ‘우리 오빠 콘서트에 빈자리가 있으면 안돼’의 마음으로 공연 티켓을 사는 아이돌 팬도 후조시라고 부를 수 있다.
‘야오이 물을 즐기는 여성’ 정도가 후조시라는 단어에 대한 대중의 이해다. 의외다.
그렇게 시작한 게 맞다. 후조시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80년대부터 사용됐다. 원래 ‘귀부인’을 뜻하는 한자를 사용했었는데, 2000년대 초반 일본의 니찬(2channel)이라는 커뮤니티에서 조롱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썩을 ‘부(腐)’자를 붙였다 . ‘썩은 여자’라는 뜻이다. 그 이후 후조 집단이 자조적으로 그 단어를 수용하면서, 현재의 후조시로 이어졌다.
오타쿠가 부정적 의미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긍정적 의미를 내포하며 확대된 것처럼 후조시의 의미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여성 중에도 오타쿠적 성향이 짙은 사람이 있고, 남성 중에서도 후조시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서브컬처를 즐긴다는 점에서는 오타쿠와 후조시가 유사하지만, 그것을 향유하는 방식이 다른 거다. 일본에서는 이 후조시를 하나의 산업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동인 문화를 즐겼다고 들었다.
6살 때 동인 문화를 처음 접하고, 초등학교 때 대학생인 척 하면서 슬램덩크 통신 소설을 썼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퇴마록 동인지를 냈고. 어렸을 때부터 원작을 보고 나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드래곤볼 계에서는 유명한 동인 작가라고 들었다.
그냥 시사회에 초대되는 몇 안 되는 팬 정도다. 일단 동인물 소비는 28년, 창작은 20년을 해왔다. 캔디캔디로 시작해 드래곤볼까지 20년을 그리다 보니 직장인이 되어서도 일본 동인 행사에 참여하려고 매년 책 300권 정도를 이고 지고 바다를 건넜다. 주변을 보니 매년 그 행사 참여하려고 건너가는 한국 작가만 100명이 넘더라. ‘수요가 넘치는 이 시장을 온라인으로 가져올 수 없을까?’라는 생각에 진지하게 시장 조사를 시작했다.
창업 전 대기업 법무팀에 재직 중이었다. 연차도 꽤 쌓였고.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선뜻 그만두고 나오기가 어려웠을 텐데.
일본에 매년 두 번 열리는 ‘코미케’라는 만화동인지 행사가 있다. 이 행사에 3일간 몇 명이 모일 것 같은가. 무려 60만 명이다. 전시 부스도 4만5천 개나 들어선다. 행사 동안 발생하는 거래액만 2조 원이다. 나는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작가인데도, 하루에 200~300권을 팔았다. 유명 작가는 그 자리에서 2만 부를 판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다. 일본은 아예 정부 차원에서 동인 시장이 사장되면 관광 사업 자체에 타격이 크니까 2차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풀어주기까지 했다. *편집자 주: 일본 정부는 지난 2015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정을 맺을 당시, 2차 창작에 대한 저작권 단속을 강화할 경우 코미케, 아키하바라 문화 등 관광사업과 관계가 깊은 창작 문화 전체가 쇠퇴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동인지를 포함한 패러디 작품은 저작권 침해 단속 강화 대상으로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가 동인 문화와 행사를 관광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음지 문화로 시작했지만, 확실히 하나의 산업군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시장은 크지만 돌아가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다. 일본에서는 한 해에만 몇백 개의 동인 행사가 열린다. 하지만 정보 공유가 안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코미케로만 몰린다. 규모가 작은 이벤트는 홍보가 여의치 않다. 각 개인이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SNS를 활용하는 게 전부다. 그렇다 보니 작가 입장에서는 독자 수요 파악하기가 어렵고, 독자 입장에서도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놓치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동인 행사 정보 채널인 ‘오타카츠’를 만든 이유다. 미국 이벤트브라이트나 국내 온오프믹스처럼, 오타카츠 내에서 해당 일에 열리는 동인 행사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관심 장르나 분야를 체크해두면 관련 행사 개최 시 알림이 간다.
오타카츠 앱의 현재 수치 현황은 어떤가.
일본 마켓에서 정식으로 돌아가고 있고, 곧 안드로이드 버전을 업그레이드 할 예정이다. 현재 월 사용자는 2천 명 정도 된다. 활성 사용자가 10만 명 정도가 되면 동인지 오픈마켓인 ‘죠세카이’를 출시할 예정이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인지도가 없으면 온라인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 오타카츠가 죠세카이를 위한 기반이 되어줄 것이라 본다.
현재 다수의 웹툰 플랫폼에서도 BL 카테고리가 있다. 굳이 독자들이 죠세카이에 가서 구매할 이유가 있을까?
좀 다른 시장이라고 본다. 거긴 연재물이고 동인지는 보통 단권으로 끝난다. 웹툰 플랫폼에서는 작가를 수급하고 그들이 지속해서 올리는 콘텐츠가 수익 모델이 되지만, 우리는 좀 더 개인 창작자 위주 그리고 단권 단위의 오픈마켓이다. 대형 웹툰사들도 아직 무르익지 않은 2차 창작자들을 무리하게 플랫폼으로 끌고 가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우리 같은 회사에 투자하는 게 장기적으로 윈윈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우리 플랫폼을 통해 천천히 실력과 팬층을 쌓은 준비된 작가들이 많아진다면, 그쪽 입장에서도 좋은 것이지 않겠나.
수익은 수수료에서 발생하나.
그렇다. 티켓값의 10% 정도의 수수료가 우리의 수익이 된다. 40명 규모의 작은 교류회를 해도 장소를 열고, 참가자의 입 퇴장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티켓이 필요하다. 인터파크와 같은 대형 티켓 판매처보다는 훨씬 더 개인의 목적에 부합하는 플랫폼이다. 후에 선보일 동인지 오픈마켓도 수수료 기반의 비즈니스다.
행사 주최자 혹은 동인 작가를 플랫폼으로 최대한 많이 데려오는 게 핵심이겠다.
일본인에게 드래곤볼의 위상은 인기 만화 그 이상이다. 늘 자랑거리고, 세계적으로도 팬도 많다. 운이 좋게 드래곤볼 동인 작가로 활동해 왔고 덕분에 함께 작가 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2년간 사업을 준비하면서, 우리 플랫폼에서 활동할 의사를 밝혀준 친구가 200명 정도 된다. 그렇게 핵심 사용자를 확보하고 점차 세를 넓혀갈 계획이다.
일본 현지에서 외국인 창업을 하는 셈이다. 한국에 사업 기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려움은 없나.
자본금 문제로 영업 법인을 아직 못 세웠다. 그래서 놓친 기회가 많다. 예를 들어 ‘시부야 N.E.T 페스티벌’이라고 인디 밴드 30개 정도가 모여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행사가 있다. 이 행사 주최 측과 MOU를 체결했기에 마케팅을 할 수 있었는데, 법인이 없어서 못 했다. 그냥 크로스마케팅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아쉬웠다.
향후에 한국에 진출할 계획은 있나?
국내 시장이 어느 정도 성숙했다고 판단되면 채널을 열 생각이 있다. 일본의 경우 약 20만 명의 동인 작가가 있는데 한국은 많이 쳐봐야 5천 명 정도다. 하지만 작품의 퀄리티 측면에서는 한국이 월등히 높다. 국가별로 차이가 있는 거 같다. 중국의 경우 약 2천만 명의 후조시가 있다고 한다. 중국 작가는 독자의 반응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작품을 만든다. 반면 한국 작가들은 ‘스스로도 인정되고,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정해줄 때’가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래서 질이 높고 경쟁력이 있다. 향후에는 이들의 작품을 번역해서 유통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투자유치 IR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생소한 분야라 투자자를 이해시키는 게 어려울듯싶다.
일단 동인 문화나 창작물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분들이 대다수다. 서브컬쳐의 특성과 상생관계를 이해시키는 것이 어렵다. 나 역시 창업을 한 지 얼마 안되서, 우리 사업을 설명하는 게 서툴기도 하고.
반대로 이렇게 생소한 사업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투자자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면.
일단 이 동인 시장 자체가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는 건 수치만 보여줘도 다들 납득한다. 지금껏 음지에 가려져 있던 분야지만, 누군가 발굴해서 사업화를 하면 크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20년 넘게 동인 작가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적임자가 나라고 늘 말하고 다닌다. ‘어차피 될 사업인데, 이왕 투자하실 거면 나를 밀어달라’는 식이다.
팀원 구성이 재밌다고 들었다.
총 6명이다. 그중 정직원은 나와 안드로이드 개발자 둘이다. 나머지 4명은 모두 본업이 따로 있다. 일본 성우를 덕질하는 마케팅 팀장, 동인녀 개발자, 오타쿠 미국 변호사 등 후조시와 오타쿠가 모인 집단이다. 각기 다른 기반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덕심 하나로 뭉쳐있다. 상주 개발자 한 명을 빼고는 모두 무급으로 일한다. 최근 투자를 받으려고 뛰어다니는 이유도, 나머지 멤버들을 모두 풀타임으로 채용하고 싶어서다.
사업을 전쟁처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업을 하다 보면 시간에 따른 성장 단계가 있지 않나. 어떤 기준점을 잡고 점프업을 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같은 설명만 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 부분이 나를 전사로 만드는 거 같기도 하고.
캡슐코퍼레이션의 사업, 더 나아가 동인 문화를 ‘이렇게 바라봐주었으면 한다’는 희망 사항이 있다면.
동인 문화는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옛날부터 문인들이 모여 자비로 출판했던 게 동인 문화의 시작점이었다. 이것이 미디어 변화에 따라 서브컬쳐로 안착한 거다. 한국은 내세우기에 부끄럽지 않고, 멋있고, 거대한 분야만을 ‘산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의 엣시(Etsy)는 빈티지 수제 제품을 팔아 기업 가치 4조 원으로 나스닥에 상장했다. 일본 역시 70년대 동인 문화가 자체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내버려 뒀고,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루자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하고 육성했다. 이것이 일본이 만화 강국이 될 수 있는 자산이 됐다. 서브컬쳐가 만들어내는 영향력과 시장성에 대한 주목이 필요하다고 본다.
창업가로서 ‘이 부분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랑할만한 부분이 있나.
기존 산업을 온라인으로 가져와 새로운 판을 짜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장벽들이 있다. 그걸 견딜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나는 ‘생존에 특화된 인간’이라고 말한다. 서바이벌이 특기다.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고 싶어서 동인 회지를 만들어 팔았고, 반쪽짜리 학사로 대기업 법무팀에 들어갔다. 로펌에 다니면서도 경매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사람이니, 믿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올해 단기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를 말해달라.
올해 단기 목표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엔젤 투자를 유치해서 일본에서 정식 영업을 할 수 있는 법인을 세우는 거다. 더불어 4명의 팀원이 이 일을 본업으로 할 수 있도록 정식 채용하고 싶다. 또 현재의 오타카츠 앱을 좀 더 고도화할 예정이다. 내년부터는 아예 일본에 상주하며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생각 중이다. 더 공격적으로 이벤트 호스트와 작가 수급에 나설 예정이고.
캡슐 코퍼레이션의 장기적 목표는 5년 안에 동아시아 내에서 동인계의 유일무이한 기업이 되는 거다. 10년 후에는 동인 콘텐츠에 대한 마이너리티리포트를 만드는 게 꿈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해 콘텐츠 소비 패턴을 분석하고, 인기 콘텐츠의 공식을 발굴해나가고 싶다. 지켜봐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