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생직장, 철밥통은 없다. 아울러 성공적인 삶의 테크트리 공식도 희미해지고 있다. ‘위드 코로나19’ 시대는 기존 직업군을 강제로 재편시키고 있다. 현재 직장이 마지막 회사라고 생각하는 직장인은 거의 없다. 많은 직장인들이 저마다의 플랜B를 준비하고 있다. 한 번은 창업을 해야만 하는 시대, 자기 직업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시기가 성큼 다가온 상황이다.
혁신이 동반되는 시기는 개인이나 기업에게 우호적인 환경만은 아니다. 사양산업군에 속한다면 회사는 존폐의 기로에 놓인 것이고 개인은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 혁신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서 계속 변해야하는 시대인 것이다.
각기다른 배경을 가진 세 명의 직업인을 한 날 만났다. 30대 후반, 30대 중반, 20대 후반 나이도 각각이고 그간 걸어온 커리어도 다르다. 공통점은 같은 학교(국민대학교 소프트웨어융합대학원) 동문이라는 것, 대학교 전공과는 무관한 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 짧지 않은 시간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불혹을 앞둔 오재송씨는 10년차 프리랜서 개발자다. 개발은 학교가 아니라 현장에서 배웠다. 30대 중반 워킹맘 이선희씨는 20대에는 창업자였고 지금은 교육 콘텐츠 개발자이다. 20대 후반의 강지혜씨는 대학교에서 경력을 쌓다가 최근 교육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완결형이나 성공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 이야기라 특별했다.
자기 소개를 해주세요. 각자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오재송 : 프리랜서 개발자입니다. 지금은 금융권 프로젝트에서 백엔드 개발자로 일하고 있어요. 대학시절에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학생이었어요. 스무 살에 입학해서 10년 간 12학기를 다녔는데, 졸업을 못 했어요. 재적당하고 재입학하고 그랬죠. 10대 때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못 한 것이 20대에 왔어요. (웃음) 뭔가를 잘 못한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 했어요. 자신의 못난 모습이 보기 싫어서 학교를 멀리한듯 싶고요. 학교간다고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했죠. 부족한 것이 있으면 공부를 해서 따라잡았어야 했는데 피하는데 치중했던 시절이에요. 악순환이었죠.
개발자를 업으로 삼은 것도 늦게 결정했어요. 서른 살이 넘어서 무슨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컴퓨터 만지는 걸 좋아해서 무작정 도전한 케이스에요. 당장 업무에 필요한 걸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녔죠. 회사에 취업한 후에는 퇴근하고 저녁에 학원을 갔고요. 그렇게 고졸인 상황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공부를 다시 시작한 건 결혼하고 나서에요. 학원 수료 후에 무작정 취업을 한 케이스라 배경지식 없이 일을 했어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학교를 다녔죠. 공부를 하면서 예전에 무작정 했던 것들과 학문적인 것이 맞닿는 부분을 계속 찾아가고 있어요. 그게 즐거워요.
강지혜 : 대학교 학부 조교와 국가사업 연구원으로 일을 했고, 최근 네이버 커넥트재단으로 이직했어요. 대학은 공대(건설시스템공학)를 나왔는데, 저랑 딱 맞는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전공분야 취업이 조심스러웠어요. 그러던 차에 운이 좋게 국민대에서 조교를 하게 됐어요. 1년 8개월 정도 조교 역할을 하고, 같은 대학에서 국가사업 행정 연구원 일을 3년 8개월 했죠. 그 일을 하면서 소프트웨어 교육에 관심이 생겼고, 전문성을 더 키우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커넥트재단으로 이직도 소프트웨어 교육과 조금 더 밀접한 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선희 : 현재 온라인 소프트웨어 교육회사(위즈스쿨)에서 콘텐츠 개발자로 일하고 있어요. 그전에는 프리랜서로 소프트웨어 교육 강사 일을 하면서 협동조합을 운영했어요. 지금은 교육분야 일을 하고 있지만, 대학 때 전공은 식품영양학이었어요. 전공보다는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경영을 복수 전공해서 은행권에서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처음 접했죠. 그런데 사무실 안에서 데이터를 보고 파일을 작성하는 업무는 저랑 안 맞더라고요. 이후 유통기업쪽 입사를 준비했는데, 우여곡절이 있어 무산됐어요.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가구제조업 창업이었어요. 5년 정도 했는데, 나름 열심히 했다고 자평해요. 여러 회사랑 콜라보도 하고, 유명 배우와 브랜드도 만들었죠. 하지만 중국쪽 업체에 오더를 뺏기기도 했고, 학교나 기관에서 오더를 받아서 하는 일이 여러모로 어려웠어요. 초기 생산 단가는 줄일 수 있는데 보관 단가는 감당 범위를 넘더라고요. 사업을 더 이어가는게 힘들게 됐죠.
다른 일을 찾던 중에 15년차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둘째 언니가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빅데이터 전문가 양성과정을 추천해줬어요. 개발자가 되려고 하는 학생, 혹은 졸업생들이 듣는 수업이었는데요. 저는 그쪽 분야를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다보니 수업을 열심히 소화하는데 집중했어요. 과정을 마친 뒤 멘토였던 분 회사의 대표님이 소프트웨어 교육 일을 추천해 줘서 소프트웨어 강의 현장을 여러군데 다녔죠. 거기서 적성을 찾았어요. 그 이후 온갖 강사양성과정 교육을 다 찾아다녔어요. 그걸 다 합치면 한 800시간 정도 될거에요. 학생을 가르치는게 저한테 잘 맞았어요.
이후 비전공자이다 보니 깊이가 부족해서 방통대 컴퓨터과학과에 편입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국민대 대학원에 내가 찾던 과정(소프트웨어융합대학원)이 개설된 걸 알았죠. 지금 하는 말이지만 그때만해도 학교 교수님들의 명성을 몰랐어요. 그저 설명회에서 이민석 교수님(현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학장)의 설명을 듣고 배우고 싶은 학문이라서 지원을 했어요. 방통대를 다닐것인지 대학원을 다닐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는데, 그냥 두 가지를 다 하기로 결정했죠. 올해 대학원을 졸업했고, 방통대는 한 학기 남은 상황이에요.
성급한 일반화겠지만, 개발자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 현역보다는 관리직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일하면서 힘든건 없나요.
오재송 : 시작이 늦었기에 선택지가 넓은 편은 아니에요. 그리고 관리직으로 가려면 충분히 뒷받침이 되는 회사여야 가능할겁니다. 제가 처음 일한 회사는 창업자인 대표와 저밖에 없었어요.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일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인연이 된 분들 덕분에 여러 프로젝트 일을 했어요. 관리직은 성향도 중요한 것 같은데, 저는 사람들 감독하는 것 보다 컴퓨터 만지고, 데이터 뽑아내고 하는 쪽이 더 적성에 맞는 듯 싶어요. 기술을 좀 더 알아서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한 편입니다. 지금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그것을 위한 밑거름 쌓기고요. 특별한 이변이 없는한 개발직에서 계속 있고 싶어요.
이 냉정한 사회에서 프리랜서가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를 제안받는다는 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일겁니다. 취업 오퍼는 받지 않았나요.
오재송 : 받기는 했는데, 어디에 속하기 보다 프리랜서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의미있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프리랜서가 일반 정직원보다 단가는 높아요. (웃음) 믿어주는 가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죠.
선희님은 학생 가르치는 일이 본인에게 맞다고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건가요.
이선희 :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그것을 가르친다는 것에 희열이 있어요. 배우는 학생이 쉽게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 오는 뿌듯함이죠. 스타트업에 있기에 남의 일 내 일 구분 없이 업무는 많아요. 하지만 수업을 하면서 힘든 부분이 대부분 상쇄되요. 그렇게 저는 만족하며 일하고 있어요. 가족한테 미안할 뿐이죠.
지혜님은 두 분에 비해 다소 노멀한 커리어를 걸어왔다고 할 수 있어요. 5년 간 학교 생활을 뒤로하고 네이버 커텍트재단 입사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강지혜 : 대학원에 입학하며 교육분야에서 전문성을 살리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교육기관과 스타트업도 좋지만, 개인 성향에는 비영리기관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교육의 실현과 이윤 추구라는 상충되는 상황보다 이상적인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맞겠다 싶었죠. 그래서 커넥트재단에 지원했고 원하는 부서에 배치됐어요. 지금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문입니다만, 재송님은 개발 일이 재밌나요? 재밌다면 왜 그런가요.
오재송 : 재밌죠. 내가 원했던 그림이 실제 구체화 돼서 나오는 것, 사용자들이 그걸 잘 사용하는 걸 볼 때 느껴지는 특별함이 있어요. 개발자로 일하며 종종 느끼는 건데, 개발을 요청한 클라이언트가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고 과제를 주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들어,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에둘러 요청하는데, 바로 가는 길을 몰라서 본인이 아는 선까지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때 클라이언트가 진짜 원했던 것들을 찾아내서 제시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리고 개발 일을 하면서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도 소중해요. 끌어주는 선배들과 동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환경도 좋죠. 내 일이 구체화되는 것을 보는 즐거움, 그 일을 통해 인정받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긍심도 커요.
코로나19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사회 전체 시스템이 비대면으로 바뀌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이선희 : 대면 교육을 할 때 학생들 얼굴을 보면서 하는 건 좋았는데, 준비할 것이 많았어요. 준비물을 가지고 다니는 건 시간과 체력이 필요한 일이죠. 반면에 온라인 수업은 몸은 편하지만, 화면으로만 학생을 만나는게 답답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적응이 되니 온라인 교육의 장점이 더 많아요. 프로그램 등 제반시설만 제대로 되어있다면, 더 의미있게 할 수 있겠더라고요.
다만 한 번에 많은 학생과 하기엔 당분간 힘들것 같아요. 대면수업은 20~30명의 학생과 할 수있었지만, 온라인 수업은 10명 이내가 적절하다고 봐요. 그 이상이 넘어가면 화면으로는 학생의 작업을 확인하기 힘들어요. 모든 학생의 화면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시스템은 아직 없기 때문이에요.
강지혜 : 재택근무를 하면서 화상회의가 잦은 편입니다. 다른건 괜찮은데, 뭘 물어보고 싶을 때 상대방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머뭇거리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아직 이직한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저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고요. 차차 적응할거라 봅니다.
오재송 : 프리랜서라 업무환경이 자유롭다고 보는 시선이 있는데, 상황에 따라 다를거에요. 최근 SI쪽에서 금융권 프로젝트를 3년 정도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한 사무실에 모여서 일을 해요. 보안 이슈가 여타 업종에 비해 민감해서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일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요. 사회적거리두기 3단계 정도 되야 비대면 근무가 가능할거에요.
재송님이 생각했을 때 본인이 주도적으로 한 개발 프로젝트 중 가장 잘 한 케이스는 뭔가요.
오재송 : 주관적인 것이라 객관화할 순 없겠지만, 굳이 꼽는다면 모 지자체 인사과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들 수 있겠네요. 당시 이직했던 회사에서 진행한 첫 프로젝트였는데, PM이 두 번 교체될 정도로 미뤄지던 일이었어요. 팀 내 불화도 있었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협업 담당자와 마음이 잘 맞아서 주도적으로 백엔드 개발을 했죠. 결론적으로 자초될 뻔한 사업이 조금 늦춰지는 수준에서 잘 마무리됐어요. 그게 공이되서 회사 합류 3개월만에 올해의 사원으로 뽑혔고요. 200명 규모의 회사에서 나름 인정 받았던 셈이죠.
재송님은 대학원에서 블록체인을 전공하고 있어요. 전공 선택을 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몇년 전 코인 열풍이 불면서 블록체인이 크게 관심을 받았는데, 지금은 시장이 일확천금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재편되는 분위기입니다. 동향을 관심있게 바라보고 계실텐데, 업계 상황은 어떻다고 보시나요.
오재송 : 블록체인은 기술을 어디에 접목할지가 관건이라고 봐요. 뭔가를 만든다는 관점에서 블록체인은 데이터베이스를 보관하는 방법론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기본지식이 있다면 몇 달정도 공부하면 간단한 서비스도 구현할 수 있고요. 하지만 단점이 굉장히 크죠. 데이터인데 저장할 수 있는 양이 적고 신뢰성있게 관리하기도 어렵거든요. 단점들을 커버할 만한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야 의미가 있어요.
블록체인에서 엄청난 비전을 봤다거나 졸업하고 난 뒤에 어떤 일을 해야겠다라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전공을 선택한 건 아니에요. 재미있어 보였고, 새로운 분야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졸업하기 전까지 블록체인으로 작더라도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싶다는 계획은 있어요. 그게 잘 되면 회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하다는 결론이 날 때까지는 고민을 많이 할 듯 싶어요. 저 스스로가 납득하는 비전이 있어야 가족도 설득할 수 있겠죠. 사실 블록체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와서 공부를 하다보니 조금 알게 되고 된 수준이에요. 현재는 알면 알 수록 두려움이 커지는 단계이고,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선택은 제 몫이겠죠.
기자입장에서 하루에 가장 많이 받아보는 게 블록체인 프로젝트 보도자료에요. 저 같은 비전문가는 프로젝트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이 쉽지 않은데요. 재송님이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있다고 판단한 프로젝트는 뭐였나요.
오재송 : 우선 ‘메이커다오’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아요. 쉽게 말하면 대출 서비스에요. 블록체인이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활용되는 배경에는 탈중앙화된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일거에요. 메이커다오는 그걸 실질적으로 구체화 시킨 사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최근에는 디파이(De-fi, 탈중앙화 금융) 열풍이 불면서 화제가 되고 있는 탈중앙화거래소 ‘유니스왑’도 관심있게 보고 있어요. 두 프로젝트 모두 기술적인 부분 뿐만아니라 철학적인 의미도 담고 있어요. 그 부분을 높이 평가해요.

배움은 1020대보다 3060이 더 절실할거에요. 공부는 때가 있다고 하잖아요? 나이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습득력의 차이, 사회적 역할로 인한 현실적 제약이 난관일거에요. 사회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며 겪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오재송 : 많죠. 머리 회전도 느리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어요. 가족에게 시간을 못 내는 것도 미안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워요. 고맙게도 주변에서, 특히 가족이 많이 도와주고 배려해주고 있어요. 대학원을 다닌다고 뭔가 당장 바뀌는 것도 없는데, 가족이 믿어주고 지원해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아내 자랑이에요. (웃음)
이선희 : 공부하는 삶은 익숙해요. 사업을 접고 IT분야 공부를 시작할 때 안산에서 서울 강남까지 이동시간만 1시간 30분, 왕복 3시간 걸렸는데 4개월 간 육아와 병행하면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수업을 빠짐없이 참석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즐거움이 더 컸어요. 내가 하고 싶은걸 위해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고요. 하지만 가족 구성원으로써의 제 역할 때문에 고민도 많았어요. 당시 진지하게 남편과 대화를 했어요. “이 공부를 꼭 하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남편도 “가족을 생각하느라 제대로 못 하는게 느껴져서 걱정했다”라고 이해해 주더라고요. 가족의 양해를 얻고나선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강남으로, 판교로 공부를 하러 다녔어요.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에 소프트웨어 방과 후 강사를 하면서 잘 가르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더 열심히 배우러 찾아다녔죠. 단기간에 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라 막상 현장에 가서 많이 헤맸어요. 명색이 강사인데 잘 모른다는 것이 싫어서 거의 모든 교습 내용을 암기하다시피 했죠. 저는 잘 못 하는 일이 주어지더라도 해보겠다는 의지가 강한 편이에요. 처음엔 조금 창피한 모습일지 모르지만, 도전을 하면 조금이라도 성장하니까요. 방통대와 대학원에 온 이유 중 하나도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들에 한계가 왔다고 느껴져서에요. 학생들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는데 강사가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방통대 공부는 졸업이 최우선 목적이 아니었군요.
이선희 : 졸업은 해야죠. 한 학기 남았어요. 전공 7과목은 힘들지만, 재밌어요. 하나 하나 알아갈 때 마다 느끼는 희열, 성장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거든요. 저 역시 가족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저는 남편 자랑이에요. (웃음)
세 분은 올해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어요.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배우는 입장에서 온라인 교육은 어땠나요? 국민대는 시험 부정방지 프로그램도 도입했던데.
이선희 : 대면수업과 온라인 수업은 결이 달라요. 처음에는 쉽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교수님의 눈을 계속 봐야할 것만 같았어요.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 상호작용이 좋아서 저도 학생 입장에서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수업을 3~4시간 하고나면 힘들어서 한 동안 누워있게 되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적응했어요.
오재송 :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온라인 수업을 해서 적응이 쉽지 않았고, 아쉬움도 있었어요. 학생만큼 교수님들도 힘드셨겠죠. 하지만 세 번째 학기가 되니 서로 익숙해진 듯 싶어요. 저도 이제 온라인 수업과 대면수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분이 된 상황입니다.
강지혜 : 온라인으로 학기를 보내며 제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다는 걸 알았어요. (웃음) 누군가 옆에서 직접 보면서 체크해줘야 잘 하는 학생이었던 거죠. 그걸 느끼고서 스스로를 좀 바꿔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태해지지 않는 의지가 중요하더라고요.
이선희 : 온라인 수업이 시행된 뒤 중고교 학생들 성적의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해요. 자기주도 학습이 되는 학생은 바로 적응했지만, 그게 준비되지 않은 아이들은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개인적으로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이기도 해요.
선희님은 교수법에 관심이 많은듯 싶어요. 학생 교육을 위해 다양한 기획을 하실거라 보는데요. 어떤 부분이 특히 학생의 반응이 높던가요.
이선희 : 우리 회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추구하는건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는 즐거운 수업이에요. 자바스크립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만들어보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거죠. 재미가 있고 성취감이 있고, 동기부여가 돼야 아이들이 잘 따라와요.

세 분은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대학원 동기입니다. 선희님은 첫 졸업생이기도 하고요. 지난 과정을 돌이켜본다면요.
이선희 : 제 학창시절 모두를 돌아봐도 국민대 교수님들만큼 열심히 가르치는 분들을 본 적이 없어요. 학생들이 뭘 원하는 지를 파악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이전에 해 왔던 방식에 학생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를 주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커리큘럼에 대해 건의를 하면 바로 수정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았어요. 교수님이라기 보다 멘토들이었어요. 대학원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봅니다.
오재송 : 단순한 부분일 수 있겠지만, 재직자 입장에서 토요일에 수업을 한다는 것은 진짜 장점입니다. 국민대를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에요.
코로나19와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세상이 강제로 바뀌고 있어요. 평이한듯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정말 무서운 경험을 하고 있는건데요. 이 변화를 어떻게 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적응하고 계세요? 근래 비대면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는 중이기도 한데.
이선희 : 회사 업무는 여건상 온라인으로만 하기는 쉽지 않아요. 개발자, 디자이너 전부 다 모여 해야하기에 재택을 최대한 미뤘죠. 출근하면 일에 바로 집중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잘 돼서 문제해결이 빨라요. 재택은 출퇴근 시간은 절약되지만, 기본적으로 근무시간이 길어요. 장단점을 떠나서 그냥 출근하는게 편해요.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앞으론 온라인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 인재가 될 거에요. 알아서 할 일을 찾아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죠. 기업에서 집체교육식 신입사원 교육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오재송 :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거에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변화에 익숙해겠죠. 구성원의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시스템이 어떻게 짜여져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제도와 인식의 보완이 필요할거에요. 제가 하는 현재 프로젝트는 전체적으로 일 하는 시간이 있어서 정해진 시간에 같이 컴퓨터를 켜고 같이 컴퓨터를 꺼요. 다 같이 일을 해야 하는 경우라서 업무시간이 늘거나 하지는 않아요.
강지혜 : 출근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선 균형을 잘 잡아야 해요. 물론 정해진 시간에 일을 제대로 해야겠지요. 일상과 일을 제대로 분리할 수만 있다면 비대면 근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재택근무 덕에 가족이랑 대화가 늘고, 같이 보내는 시간도 많아지는 건 긍정적인 부분이고요.
과거처럼 조직이라는 배경이 오랫동안 조직원을 지켜주지 않아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고리타분해진지 오래고요. ‘나만의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것이 콘텐츠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는데요. 어떻게 준비하고 계세요?
이선희 : 스타트업에 근무하는 것이 좋은 건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의 실현이 구체적으로 가능하다는 거에요. 프리랜서를 그만두고 회사에 들어간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해요. 협업을 통해 체계적으로 만들고 서비스하는 과정을 보고 싶었어요.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고, 계속 발전시켜 점점 더 완벽해지는 과정에 동참하는 거죠.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인다면 훗날 저만의 길을 찾을 수도 있겠죠.
사회생할을 하면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부당함이나 유리천청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있다면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강지혜 : 저는 없었어요. 여성 비율이 높은 곳이기도 했고, 여성에 대한 배려가 있다고 느끼는 상황이 더 많았어요.
이선희 : 제조업 창업을 했을 때 느낀적이 있어요. 그런 부당함이 있을 때 맞서 싸우기도 했고요. 지금은 가족 구성원 역할을 못 하고있다는 고민이 있어요. 남편이 많이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내 역할을 못 하는게 신경 쓰이죠.
오재송 : 아내는 유능한 헤어디자이너이고 자신의 매장을 운영하는 사업자였죠. 한동안 맞벌이 부부로 살다가 작년 아내가 전업주부가 됐어요. 맞벌이로서의 삶이 너무 힘들었고, 특히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됐어요. 맞벌이를 할 때 일요일 하루만 쉬었는데, 미뤄둔 집안일을 하고 나면 진짜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없었죠. 지금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긴 한데, 능력있는 아내가 집에만 있는게 미안할 때가 많아요.
슬하의 아이는 어떻게 교육을 하고 계세요? 그리고 어떻게 크길 바라세요? 꼭 그런건 아니지만, 믿음으로 대하면 자기 주도적으로 바뀌는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오재송 : 부모가 키우고 싶은대로 성장하는게 아님을 알기에 ‘착한 아이’로만 컸으면 좋겠어요. 현재 가지고 있는 유일한 교육 철학이에요. 아이가 잘 하는것도 있을거고 못 하는것도 있을거에요. 그저 잘 지켜봐주려고 노력합니다.
이선희 : 아이가 어려워하는 것이 많았던 편이에요. 그럴 때 ‘잘 안 되도 괜찮다’고 계속 시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익숙해져서인지 아이가 도전도 잘 하고 쉽게 포기하지도 않아요. 참을성도 많아졌고요.
여러분의 꿈은 뭔가요? 장단기 마일스톤을 이야기해 준다면요.
이선희 : 학생을 잘 가르치고 싶어요. 그걸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다른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창업이 될 수도 있을겁니다.
강지혜 : 5년 뒤 10년뒤 내 모습은 아직 상상이 되지 않아요. 지금은 이론만 있고 실전이 없는 병아리니까요. 하지만 경험이 쌓여 성장한다면 나만의 무기가 생길거라고 봐요. 장기적으로 국내외 소프트웨어 교육 현장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 관심이 많고, 그 일에서 오는 만족감도 커요.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믿고요. 그걸 제대로 하기위한 성장을 할겁니다.
오재송 : 장기 마일스톤은 아직 명확하지 않아요. 단기적으로는 내년 졸업하는 시점에 어떤 퀄리티가 됐든 간에 앱이나 웹서비스를 만들려고 해요. 중장기적으로는 클라이언트나 대중이 진짜 원하는 것을 만들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개발자가 되는 거에요.
끝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세상에, 혹은 도전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괜찮습니다.
강지혜:제 경험이 일관되지 않고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게 전부 하나로 이어지더라고요. 누구나 과거의 경험이 의미있는 연결이 되는 순간이 온다고 봐요. 도전을 생각한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경험해 보면 좋겠어요. 그게 좋은 결과로 찾아올 겁니다.
이선희 :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 우선 사람들이 뭔가에 대한 경험을 즐겼으면 좋겠어요.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면 돼요. 그리고 저한테 선생님은 늘 존재감이 컸어요. 누군가를 교육하는 입장에서 저도 그런 존재감있는 사람이 되서 책임감있게 가르치려고 해요.
오재송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멈추지 말고 계속 춤을 추라”는 대사가 있어요. 그게 요즘 시대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아무리 힘들고 혼란스럽고 어렵더라도 멈춰있으면 안 되는 거죠. 몸에 익은 스텝을 밟다 보면 이뤄지는 것이 있습니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얻는 매리트가 분명 있어요.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