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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와 좀비 사이” 스타트업 생존의 딜레마

한때 스타트업계에서 회자되던 말이 있다. ‘존버 정신’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버틴다’는 뜻인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를 발견한 것 같아 씁쓸하게 웃었다. 한때 ‘긱 이코노미’니 ‘디지털 노마드’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존버’라는 단어는 너무나 정직하고 적나라하다.

다윈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고 했다. 스타트업 생태계만큼 이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 화려한 사업계획서, 유명 대학 출신의 창업진, 매력적인 비전을 가진 ‘강해 보이는’ 스타트업들이 매일같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남는 것은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고객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작은 성공이라도 꾸준히 쌓아온 기업들이다.

90년대에 우리는 ‘벤처’라는 말을 배웠다. 모험을 뜻하는 영단어에서 온 이 말은, 당시 우리에게 희망찬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 믿었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2024년의 스타트업들은 ‘벤처’보다는 ‘존버’를 이야기한다. 버티는 것, 그것도 필사적으로 버티는 것이 미덕이 된 시대다.

얼마 전 한 스타트업 대표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3년째 적자라고 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요.” 그의 대답에서 나는 묘한 결연함을 느꼈다. 그것은 절박함이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어떤 스타트업들은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VC로부터 받은 투자 계약서에는 때때로 창업자를 옥죄는 독소조항들이 숨어있다. 청산 시 창업자가 떠안아야 할 채무나, 개인 자산으로 변제해야 하는 조건들. 이런 상황에서 창업자들은 좀비처럼 회사를 끌고 가야만 한다. ‘존버’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는 순간이다. 한 연쇄 창업가는 이런 말을 했다. “첫 창업의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지만 실패할 때는 빨리 망해야 해요. 질질 끌면 다음을 시작할 수 없거든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모든 ‘버티기’가 미덕일까? 스타트업계의 또 다른 화두인 ‘좀비기업’을 생각해보자.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상태가 3년 이상 지속되는 기업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쉽게 말해 빚을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외부 자금으로 연명하는 기업들이다.

존버와 좀비. 발음도 비슷한 이 두 단어 사이에서 우리는 미묘한 경계선을 발견한다. 언제까지가 가치 있는 인내이고, 어디서부터가 무의미한 연명인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회생했다. 반면 2022년 파산한 FTX는 끝까지 ‘버티기’를 시도하다 더 큰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나는 종종 조선 시대 실학자들의 글을 읽는다. 그들은 400년 전에 이미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버리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쓸모없는 관습을 고집하는 것을 비판했고,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낡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스타트업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존버 정신’이란 단순한 버티기가 아니라, 혁신을 위한 인내여야 한다. 무조건적인 생존이 아니라 의미 있는 진화여야 한다. 좀비기업들이 시장의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점유하는 동안, 정말 가치 있는 혁신기업들이 자금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최근 한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들려준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투자하는 건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인지, 그게 제일 중요해요.” 그의 말은 ‘존버 정신’의 진정한 의미를 짚어준다. 그것은 현재의 사업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아니라, 혁신가로서의 본질적인 끈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은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데, 경제는 거북이처럼 더디게 움직인다. 스타트업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빠른 혁신을 요구받으면서, 동시에 더 긴 ‘버티기’를 강요받는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존버’와 ‘좀비’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결국 관건은 ‘무엇을 위해 버티는가’이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좀비의 길이다. 하지만 더 나은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진정한 ‘존버 정신’일 것이다. 박제가가 말했듯이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우리 스타트업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좀비가 될 것이고, 일부는 진정한 혁신가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 그렇듯이, 창업에도 ‘적절한 포기’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걸었던 꿈을 내려놓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존버 정신’이란 어쩌면 포기할 줄 아는 용기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환경에 적응하면서 버텨낸 기업들만이 나중에 우리가 ‘강한 기업’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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