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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파산’ 28개국 중 27위에 머문 한국 사회

신뢰는 사회의 근간을 지키는 공동 자산이다. 하지만 그 자산이 지금 심각하게 고갈되고 있다.

17일, 에델만 코리아가 발표한 ‘2025년 신뢰도 지표 조사‘는 한국 사회의 불신이 얼마나 깊은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사 대상 28개국 중 27위. 우리나라의 신뢰 지수 순위다. 이보다 아래는 단 한 나라뿐이다.

지난해 10월 25일부터 11월 16일까지 전 세계 3만 3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 조사에서 한국인 1150명의 응답은 암울했다. 정부(38%), 기업(43%), 미디어(38%), 비영리단체(46%) 모두 불신의 영역에 머물렀다. 신뢰받는 기관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한 불신을 넘어 ‘의도적 기만’에 대한 우려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응답자들은 정부 지도층(70%), 기자 및 언론 관계자(68%), 기업 지도층(63%)이 대중을 의도적으로 속인다고 생각했다. 기만당한다는 느낌. 이보다 더 신뢰를 해치는 감정이 있을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보고서는 고용 안정성 감소, 소득 수준에 따른 신뢰 격차 확대, 그리고 지도층에 대한 불신 심화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는 전 세계적 흐름과도 일치한다.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 글로벌 사건들이 신뢰의 토대를 계속해서 침식해왔다.

특히 소득에 따른 신뢰 격차는 충격적이다. 전 세계적으로 고소득층의 신뢰지수는 61점인 반면, 저소득층은 48점에 불과했다. 13점 차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시스템을 신뢰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불신한다. 이는 불평등이 단순한 경제적 격차를 넘어 사회적 신뢰의 파편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불신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46%가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온라인 공격(30%), 허위 정보 확산(32%), 폭력 행사(25%), 공공 및 사유재산 훼손(29%)을 정당화했다. 특히 18~54세 응답자의 50% 이상이 이런 적대적 행동을 지지한 것은 앞으로 사회가 더욱 격렬한 갈등으로 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젊은 세대의 분노는 미래에 대한 비관론과 맞닿아 있다. 다음 세대가 현재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믿는 한국인은 24%에 불과했다. 글로벌 평균(36%)보다도 훨씬 낮은 수치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더욱 염려되는 것은 불신이 커질수록 제로섬 사고방식이 강화된다는 점이다. 불만 수준이 낮은 응답자의 26%만이 제로섬 사고를 보인 반면, 불만이 높은 응답자에서는 그 비율이 57%로 두 배 이상 높았다. ‘내가 잘되려면 남이 망해야 한다’는 믿음이 확산될수록 사회적 협력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응답자들은 미디어와 정부의 역할에 주목했다. 80%의 응답자가 미디어는 자극적인 뉴스보다 사실 전달을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다. 같은 비율로 정부 역시 국민의 요구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에서 가장 윤리적이라고 평가된 기관이 비영리단체인 반면,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된 기관은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는 각 기관이 신뢰 회복을 위해 서로 다른 역할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윤리성과 유능함이 함께 가야 진정한 신뢰가 쌓인다.

글로벌 데이터는 또 다른 희망을 제시한다. 신뢰도가 가장 높은 집단(9점 만점에 9점)에서는 86%가 경제적 낙관론을 보였고, 단 8%만이 높은 불만을 표했다. 반면 가장 불신이 높은 집단(1점)에서는 27%만이 낙관적이었고, 55%가 높은 불만을 보였다. 신뢰가 회복되면 불만은 줄어들고 낙관론이 살아난다는 증거다.

기업 리더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응답자의 77%는 CEO와 기업이 사회 문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75%는 비즈니스 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면 사회 문제 개입이 정당화된다고 답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신뢰 회복의 핵심 요소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깊어진 불신의 늪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이 가라앉을 것인가. 에델만 보고서가 제시하는 네 가지 교훈을 다시 생각해보자. 첫째, 불만을 해소해야 한다. 둘째, 기업은 행동할 권한이 있다. 셋째, 기업은 혼자 행동할 수 없다. 넷째, 신뢰가 있을 때 낙관주의가 불만을 이긴다.

각 기관이 공감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긴밀히 협력해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신뢰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신뢰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투명성, 일관성, 약속 이행을 통해 하나씩 쌓아 올려야 하는 벽돌과 같다.

불신의 시대에 신뢰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순진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처럼 불신이 팽배한 시대일수록 신뢰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깊은 분열과 불평등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불신이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과 진정성 있는 소통이다.

에델만 보고서가 보여주는 현실은 암울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희망의 씨앗도 있다. 신뢰는 여전히 회복 가능하며, 그것이 회복될 때 우리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불신의 시대를 넘어 신뢰의 시대로 가는 길. 그 첫 걸음은 각자의 자리에서 약속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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