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흡이라는 나지막한 혁명
숨쉬기.
우리가 태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이자, 죽음의 순간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행위다. 그 사이에 우리는 대략 하루 2만 번의 호흡을 한다. 자각하지 못한 채로.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 당연한 일이 고통스러운 투쟁이 된다.
국내에만 300만 명의 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와 145만 명의 천식 환자가 있다. 세계적으로는 COPD가 사망 원인 3위다. 그런데 1차 의료기관에서 폐기능 검사를 시행하는 비율은 고작 4.5%에 불과하다. 마치 당뇨는 혈당 측정 없이, 고혈압은 혈압 측정 없이 진단해야 하는 상황과 같다.
이 모든 통계 뒤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진단을 받지 못해 치료 시기를 놓친 사람들. 경증에서 중증으로 진행된 질병.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삶의 질이 저하된 일상들. 그 현실을 바꾸겠다며 나타난 물리치료사가 있다. 티알(TR)의 김병수 대표다.
점자 명함에 새겨진 세계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특별한 명함을 건넸다. 일반적인 명함과 달리 점자가 새겨져 있었다.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시각장애인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처음 만났을 때 목소리만으로 저를 기억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저를 기억할 수 있게 점자를 넣기 시작했죠.”
작은 배려처럼 보이지만, 이 일화는 그가 추구하는 ‘누구나 접근 가능한 의료’라는 비전과 맞닿아 있다. 배제된 사람들을 향한 작은 손짓. 그의 제품 개발 철학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무력감이 남긴 자국
대학병원 인턴 시절, 김병수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환자분이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충격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감정이 무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는데, 많은 경우 악화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처음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임상에서는 특히 만성 질환자들에게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죠. 그때 깨달았어요. 조기 진단과 예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삶의 분기점은 특별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깨달음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병동 전화를 통해 들은 환자의 부재가 그런 순간이었다.
연구실에서 피어난 씨앗
학부 시절부터 호흡재활 연구실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던 김병수는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재활 기기를 개발하려 했다. 그러나 진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재활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제품이 잘 개발된 것을 기뻐하시지만, 재활 쪽으로도 빨리 넘어갔으면 하시죠. 저도 그 방향으로 가려고요. 다만 순서가 있어요. 진단이 먼저입니다.”
가끔은 다른 순서로 세상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들은 누군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순서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를 넘는 도전
의료기기 개발은 물리치료학과 출신에게 쉬운 도전이 아니었다. 코딩, 하드웨어 설계, 제품화 과정 모두 생소한 영역이었다.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어요. 코딩은 독학으로 배울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제품화가 불가능했죠. 전문가들이 함께해 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더스피로킷(The Spirokit)’은 AI 기반 폐기능 검사 시스템이다. 기존의 복잡한 진단 과정을 간소화했고, 특히 비전문가도 쉽게 검사를 수행하고 결과를 해석할 수 있게 했다.
“폐 관련 지침이나 치료 지식에 정통한 의사는 소수예요. 1차 의료기관의 의사들은 대부분 소화기내과나 순환기내과, 가정의학과 출신이죠. 이들에게 복잡한 폐기능 검사 결과를 해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치 아동교육을 전공한 사람에게 노인교육을 하라는 것과 비슷해요.”
더스피로킷의 AI는 이 간극을 메운다. 검사 결과를 분석하고, 의사에게 진단과 처방까지 안내한다. 단순한 편의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이다. 1차 의료기관에서의 정확한 초기 진단은 환자의 삶의 질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증 호흡기 환자들은 산소통을 항상 지녀야 해요. 그 무게와 불편함을 상상해보세요. 더 중요한 것은 심리적 부담입니다. 평생 산소 공급 장치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삶의 질을 얼마나 저하시키는지… 그런데 많은 경우 초기에 발견했다면 이런 상태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혁신이란 때로 거창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단순히 올바른 도구를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해외에서 마주한 의료 불평등
베트남 하이드앤 병원 방문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나름 유명한 병원이었지만, 환자들은 병원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누워 있었다. 위생적이지 않은 행태도 목격했다.
라오스, 몽골, 카자흐스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여러 국가의 의료 현장을 방문하며 그는 ‘적정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첨단 기술이 있어도 현장에서 쓸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전기가 없거나 인프라가 부족한 환경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술도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각 환경에 맞게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적정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가 일회용 필터의 재사용 요청을 받고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정수기 같은 구독 형식으로 바꾼 일화는, 기술이 현실과 만나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때로는 완벽한 기술보다 불완전하지만 사용 가능한 기술이 세상을 더 많이 바꾼다.
‘악바리 근성’으로 걸어온 길
대학원 박사과정 중 창업을 한 김병수는 다중역할의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대학원 수업을 듣고, 주말에는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에 3-4시간 자면서 일했어요. 병원 아르바이트는 밤에 갔고, 환자 한 명당 10만 원인데 그중 20%가 제 수입이었어요. 하루 3명 보면 6만 원이고, 기본 시급까지 더해 하루 11만 원 정도… 그렇게 3시간 일하고 대학원 과제하고 회사 일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기 위해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김병수에게 그 시간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간이었다.
“창업이란 남의 가정까지 책임지는 일이에요. 저희는 20명의 직원과 그 가족들의 생계가 달린 일을 하고 있죠. 그만큼 처절하고 치열해야 합니다.”
이런 “악바리 근성”은 티알의 조직 문화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끈기를 넘어,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와 책임감을 의미한다.
투자 유치의 교훈
“투자 유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예요. 투자자가 저희를 얼마나 믿어주느냐가 핵심이죠. 투자자를 볼 때는 두 가지에 주목합니다. 계약서의 내용과 그들이 하는 질문의 성격입니다.”
그는 특히 초기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 과정에서 투자자의 매출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초기 투자부터 매출액에 매몰되는 것은 문제예요. 기술도 있고, 의료기기 인증도 받은 업체에게 ‘매출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만 따지는 건 적절한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투자란 결혼과 같아야 하는데, 이혼을 전제로 대화한다는 인상을 받곤 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다루는 투자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신뢰였다.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이 그러하듯.

미래를 향한 비전: 호흡 건강의 토탈 솔루션
티알의 비전은 호흡기 질환에 대한 진단부터 치료, 재활까지 아우르는 토탈 솔루션이다. 이를 위해 네블라이저 ‘더냅(The Neb)’과 가정용 디지털 치료제(DTX)도 개발 중이다.
“더냅은 기존 네블라이저의 문제점을 해결했어요. 기존 제품은 크고 소음이 심해 휴대하기 어려웠죠. 저희 제품은 작고 가볍게 만들었고, 앱과 연동해 환자가 얼마나 약물을 사용했는지 기록할 수 있게 했어요.”
김병수는 흡입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생각보다 어렵다고 설명한다.
“흡입기는 흡입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야 하는데, 많은 노인분들이 이것을 어려워하세요. 마치 노래방에서 반주는 흘러가는데 자기 멋대로 부르시는 것과 비슷해요.”
작은 비유 속에서도 그의 임상 경험이 묻어난다. 세상을 바꾸는 발명가들은 종종 사용자의 작은 불편함을 놓치지 않는 관찰력을 갖고 있다.
“의료의 미래는 비대면으로 시작될 거예요. 원격 진료, 원격 약 배달, 그리고 구독 모델이 보편화될 것이며, AI가 의료진을 보좌하는 시스템이 확립될 거예요. 의사도 모든 분야의 최신 지침을 다 알 수는 없으니, AI가 그 지식을 보충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겠죠.”
김병수는 호흡기 질환에서 시작해 심장 질환, 순환기 질환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호흡계와 심장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예요. ‘심폐 지구력’이라는 말이 왜 있겠어요? 그래서 호흡 계통 이후에는 심장 계통으로, 이어서 순환 계통으로 확장해 나갈 거예요.”
숨 쉬는 세상을 디자인하다
김병수 대표와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의 여정이 단순한 사업 성공 스토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의료 현장에서 느낀 무력감과 좌절을 극복하고, 기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숨결을 선물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숨 쉬고, 보편적인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가 저희의 모토예요.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저희의 존재 이유입니다.”
5년 후 티알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목표는 명확하다.
“5년 후에는 ‘호흡기 질환 분야에서 티알(TR)만한 기업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고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기 때문이죠. ‘호흡기 질환에서는 얘네들이 제일 기술도 좋고 가격도 합리적이니 이 제품은 믿고 써도 된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요.”
국내 의료기관 4만여 개 중 폐기능 검사 시스템을 갖춘 곳은 1,800여 개에 불과하다. 이는 티알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진단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하다.
예비 창업자들에게 김병수는 이렇게 조언한다.
“창업을 쉽게 봐서는 안 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에요. ‘와이 낫 미(Why not me?)’인 거죠. 자신이 부족하다 느낀다면 공부하면 돼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다만, 마음은 단단히 가져야 해요. 창업은 남의 집안 경제까지 책임지는 일이니까요.”
숨쉬기.
우리 모두에게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사는 일. 티알은 그저 이 단순한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거창한 선언 없이, 조용히.
“기술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숨을 쉬는 일에 어려움이 없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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