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험은 스타트업이, 과실은 기성 기관이”…반복되는 패턴의 구조적 원인
규제샌드박스는 ‘먼저 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고치자’는 제도다. 기존 법령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혁신 서비스를 일정 기간 시험할 수 있게 해준다. 실험이 성공하면 제도화하고, 실험에 참여한 기업은 시장에 안착한다. 적어도 설계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실험은 스타트업이 하고, 제도화의 과실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12일 역삼동 마루360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루센트블록이 던진 질문도 여기서 시작된다.
7년간 시장을 개척한 기업, 제도권 진입에서 밀리다
루센트블록은 2018년 대전에서 창업한 STO(토큰증권) 스타트업이다. 금융위원회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돼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를 운영해왔다. 50만 명의 이용자, 누적 300억 원 규모의 자산 유통, 4년간 무사고 운영. 허세영 대표는 “758개 규제샌드박스 참여 기업 중 대기업에 인수되거나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본래의 사업 모델을 지키며 생존해온 사실상 유일한 스타트업”이라고 말했다.
그런 이 회사가 지금 STO 장외거래소 인가 심사에서 탈락 위기에 놓여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9월 이번 인가가 “금융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운영되어 온 시범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실제 심사에서는 샌드박스 실적이 아닌 다른 기준이 작동했다는 것이 허 대표의 주장이다.
허 대표가 공개한 비교표에 따르면, 한국거래소는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2년간 STO 장내거래소를 운영할 수 있었지만 실제 유통 실적은 0건이었다. 반면 루센트블록은 누적 300억 원을 유통하고 50만 명의 고객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사업계획, 기술력 및 안정성’ 항목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한국거래소와 넥스트레이드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수년간 축적된 실증 데이터보다 거대 기관이 제출한 서류상의 계획과 기관의 간판을 더 높이 샀다는 방증입니다.”
배타적 운영권, 왜 작동하지 않았나
금융혁신지원특별법 제23조는 ‘배타적 운영권’을 규정하고 있다. 규제샌드박스에서 먼저 혁신을 시도한 사업자가 정식 인허가를 받으면, 일정 기간 그 서비스를 배타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다. 후발 주자가 성과를 가로채는 것을 막기 위해 20대 국회에서 도입했다.
허 대표는 “입법 취지는 ‘혁신가 보호’인데 행정 현실은 ‘기득권 특혜'”라며 이 제도의 취지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루센트블록이 배타적 운영권을 실제로 부여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인허가 자체를 받지 못하면 이 권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방패는 있었지만, 방패를 들 자격을 먼저 증명해야 했다. 제도가 보호하겠다고 약속한 대상이 정작 제도권 진입에서 막히는 역설이 벌어진 셈이다.
NDA를 맺고, 정보를 받고, 경쟁자가 됐다
허 대표는 넥스트레이드에 대한 ‘기술 탈취 의혹’도 공식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넥스트레이드는 인가 신청 이전에 투자 및 컨소시엄 참여를 검토한다며 비밀유지각서(NDA)를 체결했다. 루센트블록은 재무정보, 주주명부, 사업계획, 핵심 기술 자료를 넘겼다. 그러나 넥스트레이드는 투자도, 컨소시엄 참여도 하지 않았다. 대신 2~3주 만에 동일 사업 영역에 직접 인가를 신청했다. 손을 내밀어 지도를 건넸는데, 돌아온 것은 경쟁자의 깃발이었다.
이 의혹은 지난 10월 20일 국회 정무위원회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제기됐다. 당시 박범계 의원은 넥스트레이드에 대해 “법률 이전에 신의와 상도의 문제”라며 “루센트블록이 개척한 혁신 시장을 공공성을 가진 기관이 가로채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비판했다. 한국거래소에 대해서도 “구단주가 자기 팀 선수들과 경쟁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허 대표는 “금융위가 국정감사에서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했음에도 단 한 번도 소통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다자요가 겪은 일, 루센트블록이 겪고 있는 일
이 패턴이 낯설지 않은 창업자가 있다. 제주 빈집 재생 스타트업 ‘다자요’의 남성준 대표다.
다자요는 방치된 농어촌 빈집을 숙박시설로 재생하는 모델을 제시했다. 2019년 농어촌정비법 규제로 사업이 중단됐고, 이후 규제샌드박스 ‘한걸음 모델 1호’로 선정돼 조건부 특례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조건은 가혹했다. 50채 제한, 연간 300일 영업일 제한, 기존 숙소 소급 적용 불허, 연접 가구 동의 의무, 매출 1.5% 마을 기부. 남 대표는 “17개월을 손가락만 빨고 있어서 다음달이 파산 직전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규제 17개월, 소급 미적용으로 새로 집을 재생하는 데 17개월. 총 34개월의 공백은 치명적이었다. 2015년 창업한 다자요는 뭔가 해보려 하니 이미 ‘7년 초과 기업’이 돼 후속 투자 기회를 잃었다. 정부는 다자요의 확장이 느리다며 추가로 규제샌드박스 업체를 선정하기 시작했다. 느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규제와 부가조건 때문이었는데도.
이후 정부는 빈집 재생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규제가 풀렸다. 그러나 실증특례에 참여하지 않은 기업도 동일 사업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 다자요가 개척한 모델은 ‘빈집재생숙박업’이라는 범정부 차원의 제도가 됐다. 남 대표는 “이름도 없고 과실도 먹어본 적 없다”고 했다. 적자를 지속하면서 정부에 제도를 만들어준 셈이다.
남 대표는 이번 루센트블록 사태에 유감을 표명하며 소셜네트워크에 썼다. “결국 우리는 매만 맞고 남 좋은 일 하고 있었던 거다. 정책이 잡은 물고기에 밥주겠나.”
“희망고문”이라 불리는 제도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발간한 ‘2025 국정감사 정책자료집’은 규제샌드박스를 “희망고문”이라 표현했다. 루센트블록과 다자요 모두 이 자료집에 선도기업 역차별 사례로 소개돼 있다.
자료집의 진단은 명확하다. “규제특구·샌드박스 제도는 대부분 R&D 실증 단계에 머물러 상용화·투자 유치로 연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과도한 부가조건 탓에 선도기업이 역차별을 받거나, 규제 완화 이후 자본력이 큰 후발 주자에게 시장을 빼앗기는 사례가 발생한다.”
자료집은 대안도 제시했다. 일정 기간 시장 우선권 보장, 데이터 활용권 인정, 후속 투자 매칭 자동 연계. “리스크를 감수한 퍼스트무버를 보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기업의 탈락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
허 대표는 이번 사안의 본질을 “한 기업의 탈락 문제가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혁신을 먼저 시도하고 사업을 계속 영위하던 기업이 제도화 과정에서 강제 퇴장을 당하고 그 자리를 기득권이 채우는 문제입니다. 대학을 잘 다니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퇴학당하고, 그 자리를 기득권의 자녀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차지하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신사업에 진출하지 못해서 생기는 불만이 아니라, 영위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중단되고 폐업하게 된 상황. 허 대표는 “이 구조가 반복된다면 향후 창업과 혁신에 대한 도전 의지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다만 “저희에 대한 특혜를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제도 취지에 부합하는 관점에서 원리 원칙에 따라 재점검해달라”고 호소했다.
금융위원회와 넥스트레이드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금융위원회는 14일 정례회의에서 해당 안건을 최종 의결할 예정이다.
규제샌드박스는 ‘실험’을 허락하는 제도다. 그러나 실험의 위험은 스타트업이 지고, 실험의 성과는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면, 누가 다음 실험에 나서겠는가. 루센트블록이 던진 질문은 결국 여기에 닿아 있다.





![[BLT칼럼] 알래스카 LNG가 던진 질문, 바다 위 LNG 공장은 해답이 될 수 있을까 b05d1ed55e524](https://platum.kr/wp-content/uploads/2026/01/b05d1ed55e524-150x150.png)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