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호사가 인공지능 때문에 실직한다는 말, 이제 그만 하죠.”
톰슨로이터가 19일 발표한 ‘2025 전문직 분야의 생성형 AI 활용 보고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계 곳곳의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1,800명에게 물어본 결과, 이들은 AI를 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반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보고서 속 숫자들은 꽤 극적이다. 2024년에는 생성형 AI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고 답한 조직이 12%였는데, 올해는 22%로 껑충 뛰었다. 거의 두 배다. 특히 세무 법인의 경우 작년 8%에서 올해 21%로 세 배나 늘었다.
이런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대중화되면서 전문가들도 하나둘씩 시도해봤고, 그 결과가 생각보다 쓸 만하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업무의 일부가 되고 있다.
더 흥미로운 건 세무 전문가들의 마음가짐 변화다. 작년에는 52%만이 ‘생성형 AI를 일상 업무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71%가 그렇게 답했다. 거의 20퍼센트 포인트나 오른 것이다. 변화가 이렇게 빠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 세무 분야가 가장 앞서 나갈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세무는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업무가 많기 때문이다. 세법 조항을 찾고, 비슷한 판례를 검색하고, 복잡한 계산을 하는 일들. 이런 업무들은 AI가 가장 잘하는 영역과 겹친다.
톰슨로이터의 엘리자베스 비스트롬 세무 및 회계 전문가 부문 사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초기의 회의론은 빠르게 생산성과 고객 서비스 향상이라는 현실 인식으로 바뀌고 있다.” 즉,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실제 경험이 판단 기준이 됐다는 얘기다.
조사 결과를 보면, 세무 및 회계 전문가들이 생성형 AI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업무는 세무 리서치(77%), 세금 신고서 작성(63%), 세무 자문(62%) 순이었다. 모두 정보 처리와 문서 작성이 핵심인 업무들이다.
법률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생성형 AI 사용률이 작년 14%에서 올해 26%로 늘었다. 법무법인 응답자 중 45%는 이미 생성형 AI를 쓰고 있거나 1년 안에 중요한 업무에 도입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89%의 법률 전문가가 생성형 AI가 업무에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도 눈에 띈다. 하지만 48%는 아직 관련 정책이 없다고 답했으니, 이들도 아직 준비 중인 셈이다. 기술 도입보다 제도 정비가 더디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기업 법무팀의 경우 더욱 적극적이다. 기업 법무 전문가의 90%, 기업 세무 전문가의 92%, 기업 리스크 전문가의 88%가 생성형 AI가 자신들의 분야에서 활용 가능하다고 답했다. 외부 의뢰인을 상대하는 법무법인보다 내부 업무에 집중하는 기업 법무팀이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톰슨로이터의 라구 라마나탄 법률 전문가 부문 사장은 말했다. “법률 전문가들이 회의적인 시각에서 전략적 채택으로 전환하고 있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다.” 그는 또 “법률 산업은 생성형 AI를 위협이 아닌 동반자로 수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재미있는 건 고객들의 반응이다. 세무 서비스를 받는 고객 중 77%는 자신이 고용한 세무 법인이 생성형 AI를 활용하길 원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59%는 해당 법인이 실제로 AI를 쓰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라고 할까.
이런 현상은 꽤 흥미롭다. 고객들은 AI 활용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아마도 더 빠르고 정확한 서비스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전문 서비스 회사들이 AI 도입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고 있다. 아직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이는 전문직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한편으론 AI를 활용해 효율성을 높이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객이 ‘사람이 아닌 기계가 일했다’고 느낄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우려는 기우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이 바뀌고 있는 걸까? 우선 업무 방식부터 달라졌다. 예전엔 변호사가 판례를 찾기 위해 몇 시간씩 법률 데이터베이스를 뒤져야 했다면, 이제는 AI에게 물어보고 몇 분 안에 관련 판례 목록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결과를 검토하고 판단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지만, 시간은 크게 단축됐다.
세무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세법 조항을 해석하거나 유사한 사례를 찾는 작업을 AI가 도와준다. 계산 실수도 줄어들고, 놓치기 쉬운 공제 항목도 AI가 챙겨준다.
톰슨로이터의 로라 클레이튼 맥도넬 기업 부문 사장은 이렇게 평가했다. “생성형 AI는 정보 과잉을 해소하고 부서 간 장벽을 허물며 비즈니스를 혁신하고 있다. 이는 효율성과 의사결정을 강화하는 핵심 도구다.”
실제로 기업 세무 부서에서의 생성형 AI 채택률이 1년 사이 75%로 20%나 상승했다. 글로벌 확장, 인수합병, 관세 변동성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기업 리더들이 더 시의적절하고 정보에 기반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장미빛 미래만 있는 건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89%는 생성형 AI의 업무 적용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64%는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는데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법률 전문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89%가 AI 활용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48%는 아직 공식적인 AI 관련 정책이 없다고 답했다. 개인적으로는 써보지만 조직 차원의 준비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마나탄 부문 사장의 지적이 와닿는다. “도전 과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조직 차원의 문제다. 즉, 윤리적 고려사항을 포함한 법률 실무의 특수성을 반영하면서도 강력한 도구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의 문제다.”
보고서는 전문 서비스 기업들이 이제 생성형 AI를 ‘그냥 한 번 써보는’ 수준이 아니라 회사 전반에 제대로 도입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AI 활용 정책, 교육, 고객과의 소통 방식을 새로 짜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중요한 건 신뢰성이다. 톰슨로이터 코리아 김준원 대표가 말했듯이, “신뢰할 수 있고 정확한 솔루션의 필요성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법률이나 세무 업무에서 작은 실수도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전문 서비스 회사들이 범용 AI보다는 해당 분야에 특화된 AI 솔루션을 선호한다. 법률 전문 AI, 세무 전문 AI처럼 해당 분야의 데이터로 훈련된 모델을 쓰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일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더 전략적이고 창의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반복적인 작업은 AI가 대신한다.
예를 들어 변호사라면 판례 검색보다는 법적 전략 수립에, 세무사라면 단순 계산보다는 절세 방안 컨설팅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바꿔야 하며, 때로는 기존의 사고방식까지 바꿔야 한다. 특히 경력이 오래된 전문가일수록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
조사 결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기업 전문가의 95%가 향후 5년 내 생성형 AI가 자신이 속한 조직의 핵심 업무 흐름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거의 확신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했던 미래가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다만 그 미래는 인간과 기계가 대립하는 모습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습에 더 가깝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고, 이제 어떻게 적응할지를 고민할 차례다.
결국 중요한 건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도구로 쓰인다면, 전문직의 미래도 그리 어둡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변화의 흐름을 거부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가 보여주는 것도 결국 이것이다.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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