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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하여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확실한 진리가 아닐까. 그런데 기업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글로벌 재물보험사 FM이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업들을 들여다봤다. 560명의 경영진과 의사결정권자들에게 물었다. 당신네 회사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느냐고. 대답은 예상 가능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국 기업 응답자의 44%가 그렇게 답했다. 과거 자사에 영향을 미친 리스크 대부분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고. 그들 중 76%는 매출과 수익성에 큰 타격을 입었고, 68%는 공급망이 심각하게 흔들렸다고 했다.

FM은 이런 현상에 멋진 이름을 붙였다. ‘리스크 간극’. 발생 가능성이 낮다고 임의로 판단하거나 충분히 대비했다고 착각하는 리스크가 실제로 터질 때, 피해가 더욱 커지는 현상 말이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들과 닮았다. 비 올 확률이 낮다고 우산을 안 가져갔다가, 정말 비가 와서 쫄딱 젖는 것처럼. 다만 기업에게는 그런 ‘쫄딱 젖음’이 수십억, 수백억의 손실로 돌아온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 기업들은 뭘 가장 무서워할까? 응답자의 90%가 ‘설비및 장비 사고’를 꼽았다. 화학물질 유출, 화재, 폭발 같은 것들. 이는 아태 지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이후, 기업들이 핵심 자산 피해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법이 바뀌니 인식도 바뀐 셈이다.

그런데 정작 글로벌 산업의 핵심 화두인 ‘기후 변화’와 ‘자연재해’는 우선순위 꼴찌를 차지했다. 기후변화는 85%, 자연재해는 95%의 기업이 중요하다고 답했지만, 실제 대응 우선순위에서는 뒷전이었다.

이게 바로 위험한 지점이다.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들. 그런 것들이 실제로 터질 때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리스크 간극의 전형적인 사례다.

한국 응답자의 49%가 ‘내부 소통 부족’을 리스크 대응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았다. 수직적 경영 구조, 부서 간 벽, 고위 경영진에게만 집중된 의사결정. 익숙한 풍경이다.

더 웃긴 건, 68%의 기업이 ‘외부 전문가 참여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우리끼리만 하겠다는 뜻이다. 마치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34%의 기업이 과학 기반이나 엔지니어링 기반 예방 도구를 아예 안 쓴다고 했다. 58%는 도입을 고려 중이라고 했지만, 실제 계획을 세운 곳은 9%뿐이었다.

‘고려 중’이라는 말만큼 애매한 표현이 또 있을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닌. 영원히 고려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는.

FM은 네 가지를 제안했다. 데이터에 투자하기, 사전 예방적 사고, 협업 구조 마련, 타인의 경험에서 배우기.

특히 마지막 항목이 인상적이다. 타인의 경험에서 배우기. 우리는 왜 남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을 이렇게 어려워할까.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귀찮아서일까.

결국 모든 것은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하다. 개인의 삶도, 기업의 운명도. 차이가 있다면 개인은 혼자 당하면 그만이지만, 기업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걸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하고, 더 겸손해야 한다. 모든 걸 예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큼은 예상할 수 있으니까.

권성준 FM 한국지점 대표의 말처럼, “단순한 규제 대응을 넘어 기업이 변화하는 리스크 환경 속에서 지속 가능한 회복탄력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말하면 이런 뜻이다. 세상은 예측불가능하니까, 그래도 살아남을 준비는 해두자는 것.

이 이야기는 FM과 이코노미스트가 2024년 9월부터 10월까지 아시아태평양 7개국 560명의 기업 경영진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했다.

기자 /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달하며, 다양한 세계와 소통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 I want to get to know and connect with the diverse world of start-ups, as well as discover their stories and tell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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