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가디언에 실린 앨리스 볼린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의 ‘위대한 남성’ 신화를 해부한 그 글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볼린은 위워크의 아담 노이만이 공유 오피스를 “세상을 바꾸는” 테크 기업으로 포장하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아론 소킨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여성을 무시하고 친구를 배신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그려지며, 파이어 페스티벌의 빌리 맥팔랜드가 사기꾼에서 기업가 정신의 아이콘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이런 서사들이 대부분 마케팅용 허구라는 것이 그의 핵심 논점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에게도 비슷한, 하지만 우리만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공 신화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성공 신화는 미국과는 다른 토양에서 자라났다. 1980년대 말 3저 호황 시절에 정착된 재벌 창업주들의 서사가 그 출발점이다. 보릿고개를 넘어 대기업을 일군 이야기,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폐허에서 맨손으로 일어선 불굴의 의지. 이런 서사에서 당시의 특혜적 정부 정책이나 정치권과의 밀착, 국가 주도 성장 정책의 수혜 같은 구조적 배경은 조용히 사라진다. 남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혜안뿐이다.
2000년대 초 닷컴 열풍과 함께 등장한 포털 신화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대학 기숙사나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된 검색엔진, 몇 명의 젊은 개발자들이 만든 커뮤니티 사이트. 이런 이야기들 뒤에는 막대한 초기 자본과 기존 통신 인프라에 대한 접근권, 정부의 IT 육성 정책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복잡한 배경보다는 단순하고 명료한 개인 서사를 선호한다.
스마트폰 시대와 함께 등장한 O2O 스타트업들의 신화는 더욱 정교해졌다. 후드티를 입은 젊은 CEO들이 기존 산업의 관행을 뒤흔든다는 서사, ‘기존 질서에 대한 창조적 파괴’라는 수사학. 실제로 변화한 것들도 분명히 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모바일로 음식을 주문하고 몇십 분 안에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런 기술적 진보와 개인 신화가 뒤섞이면서, 실질적 변화의 복합성이 개인의 혁신 능력으로만 설명되는 점이다. 플랫폼의 편리함 뒤에 숨은 배달 노동자들의 현실이나 수수료 부담으로 달라진 소상공인들의 경영 환경 같은 것들은 성공 서사에서 빠진다.
이런 신화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미디어 환경이다. 볼린이 아론 소킨의 영화들을 분석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드라마가 있다. 재벌 3세를 다룬 드라마들은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캐릭터 서사로 바꾸어 놓는다. 갑질과 노동 착취는 ‘까칠하지만 능력 있는’ 개성이 되고, 독과점과 불공정 거래는 ‘강한 추진력’의 발현 정도로 여겨진다. 창업을 다룬 드라마들은 더 직접적이다. 쉬는 청년 50만 명과 부동산 절망의 시대에 ‘열정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한국 사회의 특별함 중 하나는 유교적 권위주의가 이런 성공 신화들과 만나는 방식이다. ‘어른 공경’과 ‘성공한 사람에 대한 존경’이라는 문화적 코드가 작동하면서, 나이 많고 성공한 남성들에 대한 존경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벌 총수들의 회고록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들의 경영 철학이 대학 강의에서 다뤄지는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발언은 ‘명언’으로 포장되어 SNS에서 공유되고, 그들의 행동은 ‘리더십’의 사례로 소비된다.
성공한 기업인을 ‘국가 대표’ 정도로 여기는 언론의 시각도 이런 분위기를 강화한다. 세계적 기업의 CEO가 되면 그에 대한 비판은 어딘지 배은망덕한 일처럼 느껴진다. 개인의 성취가 곧 국가의 성취로 등치되면서, 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린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만큼 잔혹한 거짓말도 없다. 이 말이 전제하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개천은 그대로 둬도 된다’는 논리다.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성공 가능성으로 포장하는 완벽한 알리바이다. 볼린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 책임으로 전가”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실제로는 서울대 입학생 중 강남 3구 출신 비율이나 사법시험 합격자 중 서울 출신 비율, 대기업 임원 중 명문대 출신 비율 같은 숫자들이 우리 사회 사다리의 경직성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성공 스토리들 뒤에는 언제나 지워진 이야기들이 있다. 재벌 기업들의 성장이 국가 정책과 특혜, 노동자들의 희생과 하청업체들의 기여 위에 이뤄졌다는 사실들. IT 기업들의 성공이 창업자 개인보다는 정부의 IT 투자와 통신 인프라, 그리고 수많은 무명 개발자들의 집단적 노력에 더 크게 의존했다는 현실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복잡하고 재미없다. 영웅 서사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볼린은 뮤지컬 《해밀턴》을 언급하며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말하는가?”라고 물었다. 린마누엘 미란다가 알렉산더 해밀턴을 진보적 이민자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반민주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인물이었다는 지적이었다.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성공 서사를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주로 성공한 이들 자신이거나,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미디어들이다. 이들이 만드는 ‘성공’의 정의와 ‘능력’의 기준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정치권과 경제계를 오가는 회전문 인사들이 이런 서사를 더욱 공고히 한다. 학벌 네트워크도 한몫한다. 같은 대학 출신들이 핵심 요직을 차지하면서, 자신들의 성공 경험을 일반화한다.
그러는 사이 다른 목소리들은 사라진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가장 열광하는 성공 서사가 실제로는 가장 국제적으로 평준화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기업가 정신’, ‘혁신’, ‘창조적 파괴’ 같은 언어들. 정작 우리만의 독창적인 가치나 문화적 성취—사회적 기업가의 공동체 혁신, 시민운동가의 사회적 변화, 예술가의 문화적 기여—는 ‘성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가장 단조로운 이야기에 매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볼린이 제시한 해법은 “독점 해체, 세제 개혁, 금융 규제, 노조 활동” 같은 구조적 변화였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과제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생긴다.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조차 실제로는 구조적 변화의 수혜자였다는 사실이다. 재벌들은 국가 주도 성장의 최대 수혜자였고, IT 기업들은 정부 투자와 규제 완화의 산물이었다. 결국 개인 신화를 해체하는 일은 그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진실—그들도 시스템의 피조물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원한다. 누군가 한 명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바꿔주기를 기다린다.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창업 동아리’ 문화가 그 증거다. 취업 대신 창업을, 월급쟁이 대신 CEO를 꿈꾸는 청년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도 결국은 기존 시스템 안에서의 성공일 뿐이다.
볼린의 글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똑똑한 놈과 미친 놈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 미친 놈이다. 그리고 그는 매일 더 미쳐간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들은 정말 더 똑똑해서 성공한 것일까, 아니면 더 미쳐서 성공한 것일까? 합리적 판단보다는 무모한 도전이, 신중한 계획보다는 광적인 집착이 더 큰 성과를 낸다는 믿음. 이것이 우리가 숭배하는 ‘기업가 정신’의 한 면이다.
우리는 여전히 개인의 성공 서사에 취해 있다. 구조적 변화보다는 새로운 영웅을 찾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성공 신화를 가장 열심히 소비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 신화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들이다. 아마도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를 견디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그렇다면 성공 신화는 성공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위안이었던 셈이다. 가장 잔혹한 위안.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