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만든 창의성의 역설
김대리는 월요일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까지 50개의 광고를 만들었다. AI 광고 생성 툴 덕분이었다. 과거라면 한 달이 걸렸을 일이었다. 팀장은 만족했고, 클라이언트는 놀라워했다. 하지만 김대리는 허전했다. 50개를 만들었는데 왜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까.
칸 라이언즈에서 메타, 구글, 어도비가 자랑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이었다. “누구나 수십 개의 광고를 몇 초 만에 만들 수 있다.” 생산성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 혁명 뒤에 무엇이 남았는가. 50개의 광고와 0개의 아이디어였다.
양의 폭증, 질의 소멸
AI는 우리에게 양적 풍요를 안겨줬다. 이제 광고 하나를 만드는 데 몇 초면 충분하다. 색깔을 바꾸고, 폰트를 바꾸고, 카피를 바꾸는 것도 클릭 한 번이다. A/B 테스트를 위한 수십 개 버전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AI는 기존에 있던 요소들을 섞어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빨간색 배경에 검은 글씨, 파란색 배경에 흰 글씨, 노란색 배경에 빨간 글씨.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어떤 조합도 진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대리가 만든 50개의 광고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다르게 생겼지만 모두 똑같았다. 같은 템플릿, 같은 구조, 같은 논리. 색깔과 글씨만 달랐을 뿐이다. AI가 준 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변주였다.
과거에는 달랐다. 광고 하나를 만들려면 며칠을 고민해야 했다.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파악하고, 타겟 고객을 분석하고, 메시지를 고민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는 달랐다. 진짜 새로운 것이었다.
생각 없는 생산
AI 시대의 마케터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클라이언트는 “어제 요청한 광고안 50개는 언제 나와요?”라고 묻는다. 예전처럼 “이 브랜드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이 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AI가 50개를 금세 만들어주는데 왜 시간이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김대리는 이제 창작자가 아니라 선별자가 되었다. AI가 만든 수십 개의 결과물 중에서 ‘그나마 나은’ 것을 고르는 일이 주업무다. 창의적 사고는 뒷전이고, 선택의 기준도 애매하다. 클릭률이 높을 것 같은 것?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것? 그마저도 AI가 추천해준다.
칸 라이언즈에서 떠들어댄 “빠른 반복”이 이런 뜻이었다. 생각은 빠르게, 생산은 더 빠르게. 하지만 생각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완벽보다 빠른 실행이라더니, 실행만 남고 완벽은 포기하게 됐다.
마케팅이 공장이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 아이디어 대신 조합들이 흘러간다. 김대리는 품질관리원이 되어 불량품을 골라낸다. 하지만 애초에 제품 자체에 영혼이 없다면 품질관리가 무슨 소용인가.
똑같은 AI, 똑같은 결과
모든 회사가 비슷한 AI 도구를 쓰기 시작하자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결과물들이 닮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알고리즘으로 학습하고, 같은 데이터로 훈련받은 AI들이 만드는 광고는 필연적으로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리의 경쟁사도 AdCreative.ai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광고와 김대리가 만든 광고는 브랜드명만 다를 뿐 거의 똑같았다. 같은 레이아웃, 같은 색상 조합, 같은 카피 패턴. AI가 ‘효과적’이라고 학습한 것들의 무한 반복이었다.
차별화는 사라졌다. 개성도 없어졌다. 모든 브랜드가 AI가 만든 ‘최적화된’ 광고를 쓰자, 광고들은 구별되지 않았다. 소비자들은 어떤 브랜드의 광고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할 만한 특징이 없었으니까.
과거에는 광고를 보면 “아, 이건 그 회사 광고네”라고 알 수 있었다. 독특한 스타일이 있었고, 일관된 톤앤매너가 있었다. 이제는 모든 광고가 AI 스타일이다. 깔끔하고, 최적화되고, 클릭을 유도하도록 설계된. 하지만 영혼이 없는.
크리에이터의 몰락
AI는 크리에이터와의 협업도 바꿨다. 예전에는 광고에 나올 모델을 섭외하고, 포토그래퍼와 촬영 컨셉을 논의하고, 디자이너와 비주얼을 만들어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AI가 모델도 만들고, 배경도 만들고, 디자인도 완성한다. 실제 사람은 필요 없다. 비용도 적게 들고, 시간도 단축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무언가가 사라진다.
진짜 모델의 미묘한 표정, 포토그래퍼의 독특한 시각, 디자이너의 개성 있는 터치. 이런 것들이 광고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AI는 그런 것들을 평균화한다. 가장 무난하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예측 가능한 결과물을 만든다.
김대리는 요즘 실제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모든 것이 컴퓨터 안에서 해결된다. 동료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대신 AI와 대화한다. 클라이언트와 컨셉을 논의하는 대신 AI가 제안한 옵션을 보여준다. 소통이 사라지고 있다.
데이터의 독재
AI는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어떤 광고가 클릭률이 높았는지, 어떤 색깔이 전환율이 좋았는지, 어떤 카피가 참여도를 높였는지. 모든 것이 숫자로 측정되고, 그 숫자가 다음 광고의 기준이 된다.
문제는 측정할 수 있는 것만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클릭률은 측정할 수 있지만 감동은 측정하기 어렵다. 전환율은 알 수 있지만 브랜드 애착은 모호하다. AI는 측정 가능한 것만 최적화한다.
김대리가 만든 50개의 광고는 모두 데이터에 기반했다. 빨간색이 파란색보다 클릭률이 3% 높다고 AI가 알려줬다. 짧은 카피가 긴 카피보다 참여도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50개 모두 빨간색에 짧은 카피였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측정되지 않았다. 그 광고를 본 사람이 브랜드를 얼마나 좋아하게 됐는지, 얼마나 오래 기억할지, 친구에게 얘기하고 싶을 만큼 인상 깊었는지. 이런 것들은 데이터로 나타나지 않는다.
데이터는 과거를 말한다. 지금까지 무엇이 효과적이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창의성은 미래를 만든다.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것을 제시한다. AI는 과거의 성공을 반복할 뿐, 미래의 혁신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속도의 함정
“빠른 테스트가 새로운 기준”이라고 했다. 실패해도 비용이 적게 들고, 수정도 쉽고, 다시 시도하는 것도 간단하다. 그래서 일단 만들고 보자는 식이 됐다.
김대리는 매일 수십 개의 광고를 만든다. 월요일에 만든 것을 화요일에 테스트하고, 수요일에 수정하고, 목요일에 다시 만든다. 속도는 빨라졌지만 깊이는 사라졌다.
예전에는 하나의 광고를 만들기 위해 몇 주를 고민했다. 브랜드의 철학을 이해하고, 소비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메시지의 진정성을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진짜 통찰이 나왔다.
이제는 그런 시간이 없다. 클라이언트는 내일까지 결과를 원하고, AI는 지금 당장 50개를 만들어준다. 고민할 시간에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 없는 창작물에 영혼이 있을 리 없다.
속도는 양을 가져왔지만 질을 앗아갔다. 효율은 올랐지만 의미는 사라졌다. 김대리는 하루에 50개를 만들지만, 그 중 하나라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잃어버린 것들
AI가 가져온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제작 비용은 줄었고, 시간은 단축됐고, 접근성은 높아졌다. 작은 회사도 대기업 수준의 비주얼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분명한 혜택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잃은 것도 있다. 창의적 사고의 시간, 동료와의 협업, 클라이언트와의 깊은 소통. 무엇보다 ‘왜 이 광고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김대리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50개를 만드는 것과 1개를 제대로 만드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을까. 빠르게 만드는 것과 깊이 있게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진짜 고객에게 도움이 될까.
AI는 도구일 뿐이라고 한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도구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다. 빠르게 많이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왜 만드는지, 무엇을 전달하려는지는 부차적이 됐다.
50개의 질문
김대리는 퇴근길에 자문한다. 오늘 만든 50개의 광고 중에서 정말 자랑스러운 것이 있었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었나.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나.
답은 없다. 50개 모두 그냥 그랬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AI가 만들어준 무난한 결과물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광고들.
우리는 정말 발전하고 있는 걸까. 더 많이, 더 빠르게 만드는 것이 발전일까. 아니면 더 깊이,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발전일까.
AI는 우리에게 50개의 광고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줬다. 하지만 1개라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앗아갔다.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미래인가.
김대리는 내일도 출근해서 50개를 만들 것이다. AI가 시키는 대로. 데이터가 말하는 대로. 하지만 가끔은 궁금하다. 50개가 아니라 1개만 만든다면, 정말 혼신을 다해 1개만 만든다면, 어떤 광고가 나올까.
그런 광고는 AI가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50개의 시대에, 1개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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