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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떠난 정원사가 남긴 숲

이민화 회장 6주기, 그가 남긴 DNA는 어떻게 진화하고 있나

고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c)플래텀

1985년 어느 날, 한 남자가 사무실에서 초음파 진단기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씨앗을 심고 있다는 것을.

그때 그는 어떤 넥타이를 매고 있었을까. 어떤 펜으로 설계도에 메모를 남겼을까. 그런 사소한 것들이 역사가 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을까.

이민화라는 이름.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벤처라는 단어조차 생경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씨앗이 땅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32세, 불가능이라는 이름의 땅

사람들이 웃었다. “한국에서? 의료기기를?”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이민화만 웃지 않았다.

의료진들이 고개를 저었다. “한국 기술로 만든 초음파 진단기를 누가 믿겠느냐.” 그들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몇 년이 걸렸을까. 아니, 정확히는 평생이 걸렸다.

메디슨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회장님보다는 형님 같은 분이었어요.” 성공한 CEO를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했다.

그가 꿈꾼 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그 뒤의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다른 사람들도 도전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을.

협력하는 괴짜가 되라

2017년, 본지 후배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1세대 벤처 창업인으로서 90년대 벤처붐 시절부터 지금까지 현장에 있었는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주신다면요?”

그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이미 우리는 16년 전에 지금보다 더 많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1차 벤처 붐 시절 성과를 따져보면 기업 가치 천억원에 달하는 벤처가 460개쯤 됐어요. 그들의 전체 매출액은 350조원이었으므로 삼성보다 많았습니다.”

기자는 놀랐을 것이다. 16년 전이 지금보다 나았다니.

“2000년대에 세계 최고 벤처 생태계가 조성된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었어요. 정부 지원도, 예산도 없었을 시절에 이뤄낸 성과입니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2000년대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다. “후배 창업가들에게 조언해 줄 부분이 있다면요?”

그가 주저 없이 답했다. “‘협력하는 괴짜’가 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때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안다. 개별적 성공에만 매달리는 분위기, 함께 키워나가야 할 생태계를 잊고 있다는 우려였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들

몇 년 전 나는 한 벤처 행사에 갔다. 그곳에서 만난 젊은 창업가는 이민화라는 이름을 몰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청년이 바로 그의 씨앗이었으니까.

그 청년은 AI 모델을 만들고 있었다. “혼자서는 안 되더라고요. 데이터도, 컴퓨팅 파워도, 자본도 다 협력해야 구할 수 있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늘 하던 말을 떠올렸다. 남들과 다른 시각을 가지되, 혼자 하지는 말라는.

괴짜는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안다. AI 시대가 되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

그 청년이 말을 이었다. “저희 팀에는 의사도 있고, 디자이너도 있고, 개발자도 있어요. 각자 완전히 다른 사람들인데, 함께 하니까 전혀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들이 나와요.”

협력하는 괴짜. 그 청년은 이미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서서히 자라나는 숲

그는 떠났다. 우리는 지금 그 그늘 아래 서 있다.

그가 32세에 심은 씨앗들이 계속 자라고 있다. 어떤 씨앗은 큰 나무가 되었고, 어떤 씨앗은 아직 새싹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씨앗들이 다시 씨앗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실패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특히 창업자들이 자신의 실패 경험을 나누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는 실패를 숨기려 했는데.

메디슨의 부도조차 자양분으로 만들었던 그의 철학이 뿌리내리고 있다. “실패를 창업가 정신의 일부로 인정”했던 그의 가르침이 현실이 되고 있다.

그는 기업가정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기업가 정신은 새로운 가치와 비용 사이에서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소산을 사회와 나누는 것입니다.”

그 소산을 사회와 나눈다. 그 말이 중요했다. 혁신을 통해 가치를 만들되, 그 결과를 혼자 독차지하지 말라는 것. 씨앗 하나가 천 개의 씨앗을 만들어내듯, 한 사람의 성공이 더 많은 사람의 성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괴짜는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고, 협력은 그 시각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도 새로운 씨앗을 심는 일이다.

그가 떠난 지 6년이 흘렀다.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 씨앗을 심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민화. 그 이름을 기억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심은 씨앗들이다. 그 씨앗들이 자라서 숲이 되는 날까지, 우리는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

한국과 중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현장 중심으로 취재하며, 최신 창업 트렌드와 기술 혁신의 흐름을 분석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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