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과 유튜버가 점령한 여자아이들의 장래 희망란에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적히는 날이 조만간 올까? 그 첫 대답을 들은 것 같은 자리가 있었다. 지난 23일 여성 중심 멤버십 클럽 헤이조이스(Hey Joyce)가 ‘여성 VC (Women VC)’ 행사를 개최했다.
벤처캐피털리스트(VC)의 사전적 정의는 ‘유망 벤처기업을 발굴, 벤처 캐피털 회사로부터 지분투자나 자금 지원을 이끌어내고 이들을 상장기업까지 키워내는 벤처 투자전문가’이다. 이 문장들만 놓고서 봤을 때는, 딱히 성별 간의 선천적인 역량 차가 존재하는 직업군 같지는 않다. 그러나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여성 VC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2015년 기준 국내 벤처캐피털 업계의 여성 심사역 수는 전체 747명 중 57명 수준이다.
이처럼 수 자체가 적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좀처럼 없었다. 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VC로 일하게 되었을까? 여성 VC가 바라보는 투자, 스타트업 업계의 모습은 어떨까. 태풍이 예고된 저녁, 균형 있는 투자 생태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여성 VC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제일 먼저 무대에 선 박희은 알토스벤처스 수석 심사역은 과거 소셜데이팅 서비스 이음소시어스를 공동 창업한 인물이다. 이음의 투자사였던 알토스벤처스와 연을 맺고, 투자 업계로 첫발을 내디뎠다.
박 심사역의 투자처 선정의 기준은 시장, 사람, 숫자다. 먼저 시장은 크기와 방향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기업이 도전하고 있는 시장의 규모가 최소 1천억 이상은 되어야, 투자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는 설명이다.
또 시장이 회사가 가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알토스벤처스는 2014년 1인 가구 증가 흐름에 맞춰, 아파트가 아닌 월셋집 정보에 초점을 맞춘 서비스를 내놓은 직방에 투자했다.
그는 “파도의 역방향으로 걸으면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제자리일 가능성이 크지만, 파도가 치는 방향으로 급물살을 타면 훨씬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논리”라고 설명했다.
창업자 개인을 평가할 때는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을 중요시한다. 그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아는가를 구분할 줄 알고,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패했을 때, 그 이유를 정직하게 복기하고 향후 개선점을 찾아 나가는 인재를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여성 창업가에게 “투자자와 만날 때는 그들의 언어, 즉 감보다는 숫자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긴장하거나 위축될 때에도, 친밀감을 형성하기보다는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태도를 관철하는 것이 더 프로답게 느껴진다”고 조언했다.

임소희 옐로우독 심사역은 과거 임팩트투자사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에서 ‘젠더 안경을 쓰고 본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해 주목을 받았다.
이는 재직 당시, 투자 심사 과정에서 ‘젠더 편향’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착수한 작업이다. 에스오피오오엔지는 보고서 발간 후 심사에 젠더 관점의 투자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고, 사전 면접 시 ‘젠더 관찰자’를 동석시키는 제도를 도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투자를 받은 국내 스타트업 중 6.5%만이 여성 창업 기업이다. 이마저도 금액으로 따지면 4.1% 수준에 머문다. 실적이 안 좋아서일까? 미국 퍼스트라운드캐피털의 자체 조사에 따르면 10년 투자 실적을 비교한 결과 여성 창업 기업이 65% 더 높은 투자 성과를 안겨다 줬다.
청중석에서는 모수 자체가 다른 상태에서 남녀 창업 기업의 실적을 비교하는 것이 합리적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참관 중이던 옐로우독 제현주 대표는 ‘바로 그 모수가 다르다는 것 자체가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VC 투자를 받은 여성 창업 기업의 실적이 더 높다는 것은 여성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여성 창업가들이 자본 접근성 측면에서 훨씬 좁은 문을 뚫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능력치가 월등히 뛰어나지 않으면 투자받을 수 없는 여성 창업 기업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설명이다.
임 심사역은 이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자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여성의 수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최종 투자 의사 결정권자, 즉 대표 파트너가 여성인 국내 VC는 옐로우독, 카카오벤처스, 에이치비인베스트먼트, 본엔젤스 네 곳이다. 여성 심사역의 수는 2015년 기준 전체 심사역의 7.1%에 불과하다. 이처럼 격차가 크다 보니 성비 균형이 맞춰지기 위해서는 꽤 장기간의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당장 시도해볼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일까? 임 심사역은 여성 창업자를 향한 질문을 바꾸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남성 창업가에게는 장기적인 미래 성과에 대해 묻는 증진적(Promotion) 뉘앙스의 질문이 많은 반면, 여성 창업가에게는 다소 방어적(Prevention) 질문이 많은 편이다. 여성 창업자를 향한 방어적 질문들을 증진적 질문으로 계속해서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어서 패널 토론 시간도 마련됐다. ‘벤처 투자 업계에 여성 심사역 비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소프트뱅크벤처스 진윤정 수석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여성의 경우 주위에 벤처 투자 업계에서 일하는 지인, 선배 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 원인 중 하나”라면서, “실제 VC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을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모임과 네트워킹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