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 부대표(매니징 파트너)가 6월 28일 코엑스에서 열린 스타트업 종합대전 ‘넥스트라이즈 2021, 서울’ 연사로 참석해 실리콘밸리로 대변되는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와 문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김범수 부대표는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VC 펀드 규모가 미국 연간 투자 규모(50조 원)의 1/8 수준(6.5조 원)에 달한다. 수백 억 원 투자도 해외 자본이 리드하는 게 아니라 국내 자본들이 리드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수백 억 원에서 최대 2조 원에 달하는 M&A도 등장했고 인재들이 유입이 가속화되고 있다”라며 “스타트업 생태계에 어떤 긍정적인 현상이 나타나려면 생태계 전체 시스템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성숙해져야 된다. 현재 한국이 그런 과정으로 가고 있다. 예전에 실리콘밸리에서 봤던 것이 지금 한국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실리콘밸리의 낙관론’을 언급하며 스타트업 버블에 대한 판단이 시기 상조라 언급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는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가 인간의 삶을 바꾸고 그걸 하는 비즈니스에 똑똑한 인재들이 계속 들어온다면 일시적인 부침은 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다는 믿음이 있다.”라며 “지금 시점에 숫자를 돌려보고 고평가, 저평가를 구분하는 단순한 방식보다는 길게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 부대표는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인재와 자본이 몰려오고 있는데, 두 가지가 풍성하다면 결국은 뭔가가 일어난다. 현재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다가오는 더 큰 미래의 시작 단계다. 향후 상상도 할 수 없는 더 많은 성공, 더 많은 혁신이 나올 것이라 전망한다”라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이하 전문 정리.
한국과 미국에서 투자 업무를 했고 창업도 했다.
연세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첫 직장은 삼성이었다. 99년부터 한국 ktb에서 투자하다가 200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투자 업무를 하다 창업을 했다. 그 다음에 다시 VC 업계로 돌아와서 트랜스링크 인베스먼트에서 근무하고 있다. 회사에 매니징 파트너가 네 명 있는데, 나는 한국과 미국을 오고가며 커버를 하고 있다.
17년 전에 실리콘밸리에 갔을 때 여러가지 부러운 것이 많았다. 지금은 실리콘밸리가 우리에게 먼 곳이 아니지만 2003년 당시에는 차이가 컸을 때다.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부러웠던 것은?
우수한 인재의 스타트업 생태계 유입, 투자 규모, 그리고 활발한 M&A다. 우선 스타트업들이 굉장히 많이 팔리고 있었고 사는 대기업도 많았다. 합병된 뒤 창업자들이 인수 기업에서 일하다 나와서 다시 창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두 번째는 굉장히 우수한 인재들,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스타트업계에 뛰어드는 걸 위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VC 투자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거였다. 한국에서 가장 큰 벤처캐피털도 500억 원이 넘는 펀드가 많지 않을 때다.
세 가지 중 체감적으로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2003년 11월 말에 실리콘밸리에 갔는데 당시 회사가 시리즈 A 라운드에 투자를 했던 ‘에어스페이스’가 시스코에 4500만 달러(약 5천억) 규모에 매각이 됐다. 이때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2003년 당시 한국에서 100억 원 규모 M&A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투자사가 투자를 하고 엣싯을 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그렇게 큰 규모로 이루어질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였지만 그 스타트업이 정말 그렇게 가치가 있는 회사인지, 어떻게 확신을 하고 그 큰 돈을 주고 사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뒤에 실리콘밸리에서 2003년부터 2008년 말까지 투자를 했던 7~8개 포트폴리오사의 회수 과정을 지켜보니 대부분이 M&A였고 IPO(상장)는 딱 하나 있었다. IT 대기업들이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을 큰 금액을 주고 사 갔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 피치북(Pitchbook, VC동향 조사 업체) 통계를 보면 지난 10년 간 IPO가 M&A보다 더 많은 금액을 회수한 해는 없었다. 이는 90년 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닷컴 버블 때 한 번 정도 빼고는 거의 같은 결과값을 보여준다. 사실 미국에서 이건 굉장히 흔한 일이고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 유지될 걸로 예상한다.
미국에서는 스타트업 M&A가 활발한데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스타트업 인수 사례가 많지 않다.
‘대기업 입장에서 인수할만한 좋은 스타트업이 없다’, ‘재벌에 대한 규제가 너무 심해서 재벌들이 스타트업을 인수하지 않는다’, ‘창업자가 회사 경영권에 지나치게 집착을 한다’, ‘M&A되면 인수한 회사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못 한다’ 등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더라.
M&A가 많아지려면 우선 큰 회사들이 비싼 돈을 들여 인수할 만한 스타트업이 많아져야 된다. 그런데 어느 정도 파워풀한 기술을 개발하려면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간다. 스타트업에 투입되는 자금의 규모가 작을 때는 확률적으로 큰 돈을 주고 인수할 만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좀 처럼 나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다른 사람이 만들기 힘든 기술을 자금력 없이 개발하기 쉽지 않잖나. 스타트업 기술이 복잡하고 만들기 힘들어야 대기업이 ‘처음부터 우리가 만드느니 회사를 사야 되겠다’라고 동기 부여가 될거다. 한국 시장이 지금은 상당히 많이 커졌지만 옛날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기업 입장에서 보면 큰 돈을 들여 스타트업을 사는 것 보다 돈 조금만 들이더라도 스스로 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거다. 결국은 우리와 같은 VC들이 투입하는 자금이 많아야 한다.
실리콘밸리는 우수한 인재의 스타트업 생태계 유입이 많다.
구글이나 애플같은 회사들이 스타트업을 인수할 때 제품이나 서비스를 보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에 그걸 만든 팀이 너무 우수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우수한 인재들을 한꺼번에 채용한다는 관점에서 M&A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많아지려면 인재의 몸값이 굉장히 비싸지고 대기업이 그런 사람들을 뽑기가 어려워야 된다. 한국에서 스타트업 M&A가 잘 안 나온 건 인재들의 몸값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인재 채용 경쟁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대기업만큼 월급을 줘가며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스타트업도 거의 없었다. 큰 경쟁없이 원하는 인재를 뽑을 수 있는데 굳이 스타트업 창업팀을 M&A라는 형태로 들여올 필요가 없었던거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스타트업 M&A는 안 된다’라고 생각이 고착화 되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도 많은 것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근래 몇년 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국민네비 김기사’를 만든 ‘록앤올’이 700억 가까운 금액에 카카오에 팔렸고 명함앱 리멤버 개발사 드라마앤컴퍼니는 네이버에 인수되었다. 미국에 기반을 둔 웹툰 플랫폼 타파스와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각각 6천억 원과 5천억 원에 M&A되었다. 이들 외에도 몇백억 원 규모 M&A 건들이 국내에서 다수 나오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상상을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이는 상징적인 현상이다. 현재 많은 VC들의 대규모 펀드를 만들어 국내외서 잘하고 있는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고 있고 그들이 빠르게 성장해 시장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즉 매력적인 매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카카오나 네이버 같은 대기업들이 스스로 하는 것 보다 인수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하고있다.
국내 대기업만 한국 스타트업을 M&A 하는 게 아니다. 얼마전 미국 기업인 코그넥스가 국내 비전소프트웨어 기업 ‘수아랩’을 2천억 원 규모로 인수했고 매치그룹이 ‘하이퍼커넥트’를 거의 2조 원을 주고 인수한 사례도 나왔다. 내가 ktb에서 일하던 2007년 즈음 우리가 투자했던 반도체 회사를 미국 반도체 기업이 인수한 적이 있다. 그때 인수 규모가 7천200만 달러(약 800억) 정도였다. 그때는 정말 대박 M&A였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7,200만 달러 규모의 M&A는 의미있는 사례긴 하지만 예전처럼 느낄 일은 아니게 됐다. VC 입장에서 체감하는 스타트업 인수 금액이 많이 달라진 셈이다.
실리콘밸리 인재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에 있으면 급여를 굉장히 많이 준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 IT 대기업의 중간 연봉이 한 3억 원 정도 된다. 그정도 연봉을 받으면 평생 안 나갈 것 같지만 의외로 평균 근속 기간이 짧다. 자기 커리어 관리를 위해서 한 직장에서 3년 정도 지나면 옮길 때가 된 거라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대기업들의 직원 근무 연수를 보면 평균 3년~5년 정도가 가장 많다.
내가 아는 미국인 친구가 있는데 인텔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다. 인텔은 한때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우며 글로벌 기업이 됐지만 지금은 실리콘밸리 혁신 회사들이랑 비교하면 전통 대기업에 가까워졌다고 평가된다. 내가 아는 친구는 한 10년 정도 인텔에 있었는데 회사에서 인정받아 높은 직급까지 올라간 똑똑한 친구다. 그러던 차에 스타트업에 가서 일을 해 봐야 겠다고 마음먹고 몇 군데 인터뷰를 한 뒤 자기가 마음에 든 회사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회사에 펀딩을 한 VC이자 이사회 멤버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서 합류가 무산됐다고 한다. 그 이유라는 것이 ‘대기업에서 10년 간 있었던 사람이 매일매일 빠르게 변하는 스타트업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라는 이유였다. 그 친구는 자신이 나름 인텔리이고 굉장히 잘 나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부심이 컸었는데 그런 피드백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연봉이 높음에도 근속 기간이 길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거다. 실리콘밸리는 지난 한 4~50년 동안 테크 인더스트리를 주도해온 지역이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만의 사고 방식이 있다. ‘변화를 다룰 줄 알고 변화에 잘 적응하는 인재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야 된다’라는 공통된 생각, 일종의 강박 관념 같은게 실리콘밸리에 있다. 한 곳에 오래 있으면 변화를 거부하는, 변화를 잘 리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 그러다 보니 5년을 넘기 전에 다른 직장으로 옮겨야 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실리콘밸리 테크 업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을 할 수 있느냐다.
한 곳에서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인 국내과 비교하면 다이나믹한 환경이다.
예를들어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A라는 인재가 있다치자. 대학을 졸업하고 구글에 입사를 해서 한 3~4년 다니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창업을 한다. 창업하고 나서 2~3년 뒤에 운 좋게 페이스북이 회사를 인수한다. 그래서 페이스북 직원으로 3~4년 정도 근무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스타트업에서 조인 오퍼가 들어와서 이직한다. 하지만 그 스타트업은 별다른 성과를 못 내고 문을 닫는다. 그뒤에 딱히 눈에 띄는 스타트업이 없어서 다시 구글에 조인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간다. 우리나라로 치환해서 설명하자면 네이버에 입사했다가 나와서 창업한 스타트업을 카카오가 인수하고, 카카오에서 일하다가 다른 스타트업에 조인했는데 그 회사가 망해서 다시 네이버로 간 거다. 뭔가 드라마틱해보이지만 이런 게 실리콘밸리에서 흔히 보이는 사례다. 실리콘밸리의 인재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창업가정신이 더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이 생태계의 흐름 전체가 창업을 하다거나 스타트업에 조인하는 것의 리스크가 굉장히 낮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창업을 했다가 실패한 뒤 30대 중후반에 다시 대기업을 간다는 건 아예 불가능에 가까웠다. 창업을 할 때도 거의 목숨 걸고, 인생 걸고 한다라고 생각했다. 이런 환경에선 창업을 결정하기도 어렵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보니 잘 안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창업이 취업 외 정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생태계 시스템이 필요하다. 근래 우리나라도 이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창업을 여러번 반복해서 진행하는 창업자들도 등장하고 있다.
‘페이팔 마피아(페이팔 출신의 벤처기업가, 투자가들을 일컫는 말)’라는 표현 들어봤을거다. 페이팔 출신 중에 정말 어마어마한 창업가들이 많다. NBA나 NFL 등 프로스포츠 리그를 보더라도 큰 성공을 한 감독 밑에 있던 코치들이 나중에 우승팀을 이끄는 리더가 되는 경우도 많다. 하나의 큰 성공 사례를 옆에서 지켜보며 학습한 똑똑한 사람들이 나중에 독립해서 똑같은 성공을 경험한다는 거다.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나고 있다. 네이버, 카카오 출신들이 독립해서 창업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인재들이 스타트업 업계 들어왔다가 다시 대기업에 가는 사례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실리콘밸리 VC 투자 규모는 예나 지금이나 무척 크다. 우리나라도 투자 규모가 늘어나는 중이다.
미국 VC들의 투자규모를 보면 2005년에도 20조 원 정도는 됐다. 지금은 50조 원이 넘는 펀드를 결성한다. 내가 처음에 미국에서 투자할 때는 소프트웨어 회사보다는 반도체나 통신 등 장비, 부품 만드는 회사들을 눈여겨 봤다. 이런 회사들은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하려면 뭔가를 만들어야 하기에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 18년 전에 투자했던 그 산업군 회사들의 평균 펀딩 금액이 최소 3천만 달러, 크게는 1~2천억 달러씩 투자 받았다. 결국 VC는 펀드를 결성하면 투자를 해야 되고 상당 부분이 스타트업에 투자가 된다. 뒷받침을 해주는 자금력이 있어 화성에다가 인간을 보내겠다는 프로젝트를 하는 스타트업도 나올 수가 있는 거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이 많아졌다. 한국 유니콘들의 펀딩 히스토리를 보면 과거 어느 정도 큰 펀딩을 받을 때 외국 자본이 리드를 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한국 투자자들만 하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 VC 펀드 규모도 많이 커져서 대략 6.5조 정도 되는 펀드가 조성되어 있다. 미국 VC 펀드 규모가 50조 정도 되니까 1/8 정도 규모인 것이다. 요즘 투자 기사를 보면 100억 원 규모 펀딩은 정말 많이 나온다. 100억, 200억 원짜리 투자도 해외 자본이 리드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 국내 자본들이 집행하고 있다.
옛날에 실리콘밸리에서만 보이던 것들이 지금 한국에서 현실이 되었다.
스타트업 생태계에 어떤 긍정적인 현상이 나타나려면 생태계 전체 시스템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성숙해져야 된다. 예전에 실리콘밸리 어디선가 봤던 건데 지금 한국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데자뷔를 느낄 때가 많다. 그걸 느낄 때마다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
여담인데,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국인 지인들끼리 농담삼아 하는 말이 ‘한국 매체들이 진짜 쿠팡 걱정 많이 한다’는 거다. ‘쿠팡은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는 기사 많이 있었잖나. ‘적자가 얼마기에 가능성이 성장 가능성이 낮고 결국은 기존 유통 공룡들이 이길 것이다’ 같은 분석 기사도 봤다. 또 미국에서 웹툰하는 회사가 6천억 가치, 데이팅 앱 개발사의 가치가 2조 원에 달하는 것도 버블이라 말하는 사람도 많더라.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각자의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있을거다. 다만 버블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아마존도 초기에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 미국에서 아마존은 망할 거라는 내용의 책을 쓴 사람들도 있었다. 구글이 2004년 IPO를 했는데 당시 구글이 결국 망할 것이라는 분석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구글의 알고리즘 자체가 전 세계에 존재하는 웹을 다 카피해서 자기네 서버에 올려놓는 모델인데 서버 비용을 감당 할 수 없을 것’이란 이유였다. 페이스북이 2012년 IPO를 할 때 미국 전통 대기업에 다니던 지인이 ‘저커버그라는 어린애가 지금 멋도 모르고 한다. 곧 혹독한 자본시장의 쓴 맛을 볼 것’이라고 박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구글도 페이스북도 아마존도 안 망했다. 아니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되었다. 기업은 어느 시점에서 보면 ‘버블’이라고 볼 수 있는 때가 있다. 구글 페이스북도 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 거다. 결국 나중에 결과가 시작을 정의하게 된다.
실리콘밸리에는 특유의 낙관론이 있는데, 나는 이 낙관론을 믿는 사람 중 하나이다. 실리콘밸리의 낙관론이란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가 실제로 우리 인간의 삶을 낫게 만들고 그걸 하는 비즈니스에 똑똑한 인재들이 계속 들어온다면 일시적인 부침은 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고 더 큰 회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 겨울이라는 걸 경험 못 해본 사람은 여름은 굉장히 더웠고 가을은 시원하고 날씨가 좋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다 갑자기 영하의 겨울이 오면 세상이 끝난다고 걱정할 수 있다. 윌리엄 쇼클리가 트랜지스터를 만든 때부터 60년 간 실리콘밸리는 긴 실험을 해왔다. 그 기간 실리콘밸리가 얻은 교훈은 ‘겨울이 오더라도 결국 다시 따뜻한 봄이 온다’는 거였다.
우리나라는 벤처, 스타트업 생태계 역사가 실리콘밸리에 비해 짧기에 겨울이 왔을 때 패닉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여기 와 있다. 쿠팡이 미국에서 상장을 했고 그 뒤를 잇는 기업들이 많이 나올 거다. 지금 시점에 숫자를 돌려보고 고평가, 저평가를 구분하는 단순한 방식보다는 어떤 기업, 서비스가 우리 세상과 삶을 바꾸고 있는지,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지를 계절의 흐름처럼 보면 좋겠다. 어떤 이슈가 등장할 때 크게 일희 일비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60년 역사를 가진 실리콘밸리의 낙관론을 참고하면 좋겠다. 길게 보는 관점이 필요하고 한 계절이 아니라 사계절을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설사 버블이 꺼져서 낭패스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비옥한 토양이 되어 그 다음에 더 좋은 상황을 만드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낙관론을 갖고 있기에 VC 투자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의 50개 피투자사 중 ‘컬리(마켓컬리 운영사)’가 있다.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는 2016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이 760억 원 규모가 된다. 그중에 밸류에이션 측면에서 가장 큰 회사는 컬리겠다. 컬리는 우리가 첫 VC 라운드를 할 때 투자했고 박희덕 대표(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이사회 멤버로도 참여하고 있다.
내가 창업자였던 시절 2017년 3월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김슬아 컬리 대표를 처음 만났다. 박희덕 대표가 한 번 보고 조언을 해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와서였다. 공항 국제선 청사에 카페에 앉아서 한 2시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주제넘은 일이었다. 당시 컬리보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실패했지만 김슬아 대표는 성공에 다다른 창업자가 되지 않았나.
당시에는 컬리가 지금처럼 큰 회사가 될 줄 예상하지 못 했다. 수십년 간 투자를 하고 창업도 한 입장임에도 말이다. 이건 진짜 아무도 모르는거다. 창업자나 투자자나 어느 정도 방향은 알 수 있지만 어떤 기업이 1조(유니콘), 10조(데카콘)이 될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걸 일찌감치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라고 볼거다. 와이 콤비네이터의 폴 그레이엄을 찾아가서 물어봐도 마찬가지일거다. 투자를 해서 성공한 사람들 조차 성공할 기업을 예측하는 것을 어려워 하고 일정 부분은 운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는 팔로온 투자(후속 투자)가 특징이다. 장기적으로 투자를 집행하는 관점이다.
우리의 미션은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세계화와 생태계 선순환 구조 구축에 일조하는 거다. 소위 실리콘밸리식으로 리드하는 투자를 많이 한다. 우리의 투자 철학 중 하나는 팔로온 투자도 지속적으로 한다는 거다. 투자한 회사가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최초로 투자한 기업이라면 계속 팔로온 투자를 하는 편이다. 미국은 상법 시스템이 팔로온 투자를 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그런 측면이 있지만 한국은 팔로온 투자를 안 해도 손해를 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후속 투자를 하는 이유는 매 라운드마다 최초 투자자가 계속 같이 가는 게 여러 가지 부분에서 회사에 긍정적인 작용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는 미국에서 극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서 초기 투자를 한 건 4년 정도 됐고 19개 회사에 투자를 했다. 미국은 한국이랑 포트폴리오 분포가 다르다. 미국 같은 경우는 B2B, 사스(Saas) 쪽 비중이 높다. 19개 중에 10개 정도가 그쪽 분야이다. 이건 미국의 전반적인 시장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현재 우리 펀드 사이즈로 가장 가치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분야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극초기 단계에서 투자를 주로 하는데 1년이 채 안 된 회사에 투자한 게 60% 정도 될 거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네임밸류와 자금력이 풍부한 다른 미국 VC와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하는 것을 피하고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얼리 스테이지에 투자를 하는 것이 전략인 셈이다. 19개 회사 중 15개 회사가 우리가 첫 VC 투자이다. 미국에서 투자할 때 40만 달러 정도가 평균 투자 금액인데 미국에서 한 1천만 달러 정도 투자를 했다.
창업 전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 창업을 했을 때 투자를 하는 사례도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내가 하는 일이 창업 유무를 떠나 똑똑한 엔지니어가 있다고 하면 만나는 거다. 그렇게 만나서 9개월 정도 교류를 했는데 그 사람이 창업을 한다고 해서 창업 아이디어만 듣고 투자를 했다.
또 유펜 학부생 세 명이 하는 회사에 투자를 하려고 했는데 필요 없다고 해서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투자를 받아달라고 설득을 한적이 있다. 거기는 우리가 투자하고 1년 뒤에 와이 콤비네이터에 합격했고 록펠러 가문에서 하는 VC에서 투자 유치를 했다. 그때 우리도 투자에 동참했고 그 회사는 지금 잘 하고 있다.
투자는 얼리 단계일 수록 리스크가 더 커진다.
미국에서는 한국보다 좀 더 리스크를 많이 지고 극초기 기업들에 투자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VC 경쟁이 심하고 브랜드 파워가 유명 VC에 비해 약한 것도 이유지만, 랜드마크가 되는 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실리콘밸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주 작은 시작이라고 본다. 지금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인재와 자본이 몰려오고 있는데, 두 가지가 풍성하다면 결국은 뭔가가 발생한다. 명문 학교는 잘 가르쳐서라기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가니까 명문이다. 지금의 현상은 아주 작은 시작이고 더 큰 것이 미래에 이루어질 거다. 내가 10년만 어렸으면 한 번 더 창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큰 흐름이 오고 있고 이것은 당분간 계속될 거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더 많은 성공, 더 많은 혁신이 나올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지금 이 업계에 있는 게 감사하고 행운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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