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변하고 있다. 2012년 러시아에 왔을 때 이미 강하게 느꼈지만, 올해 겨울에 뻬쩨르(상트 페테르부르그) 있으면서는 더욱 피부에 와닿고 있다. 그 정점이 아마 어젯밤 개막된 소치 동계올림픽이리라.
어젯밤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있었다. 올림픽이든 월드컵이든 개막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본 것은 처음인듯 싶다. 88올림픽 개막식도 어쩐 일인지 못 보았으니.
개막식이 끝난이후 우리언론을 비롯해 서방언론 대부분은 비난 내지는 곱지않은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독재자’ 푸틴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번 개막식 퍼포먼스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고.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며, 러시아를 들여다봄에 있어 이젠 서구의 논리만 따를 때는 지나지 않았냐고 말이다. 사실 그런 비난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고.
올림픽, 월드컵 등은 기존의 선진국 외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들이 국가내적인 총체적 결집을 확고하게 이끌어내고 대외적으로도 그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활용’ 되어왔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남아공 월드컵, 2012년 소치 올림픽, 2014년 브라질 월드컵, 2016년 또 다시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로 올림픽 등 2000년 이후 거의 모든 굵직한 행사는 떠오르는 신흥국가들에서 여러 내외적인 이유를 고려해 개최되었다. 살펴보니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이후 2022년 동계올림픽은 베이징과 카자흐스탄의 알마티가 유력한 주자로 나서고 있는 가운데, 서부 우크라이나의 르비프와 폴란드의 크라쿠프 역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고 한다. 말 나온 김에, 지난 2010년 유로 축구 대회를 우크라이나와 폴란드가 공동개최하도록 한 것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떼내어 놓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즉, 러시아만이 독재자 자신이 인기유지를 위해 러시아에서 특별히 개최하는 올림픽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슷한 논리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84년 LA 올림픽 모두 일그러진 모습들이어서 88년엔 동서냉전의 화합의 이데올로기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치뤄졌으며, 우리 또한 점진적인 경제성장과 발전, 국민통합의 요청에 의해 유치를 적극 희망하지 않았던가? 스포츠 자체는 비정치적이지만, ‘이벤트’로서의 스포츠는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지 않은가? 닉슨의 중공방문을 가능케 한 핑퐁외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인가?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금은 놀라운 사실로, 1980년 반쪽이 되어버린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로 러시아는 하계/동계 올림픽을 한번도 개최한 적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나라라는 러시아가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적은 이번이 사상 처음이기도 하다. 충분히 할만한 때가 되어서 하는 행사란 말이다.
어제 개막식은 충분히 멋지고 훌륭했었다. 처음에 밝힌 것처럼 역대 그 어떤 올림픽 개막식도 제대로 보지 않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훌륭했다는 소견이다. 서구와 ‘다른’ 러시아의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겨지는 키릴 문자를 알파벳 순서대로 머리글자가 들어간 유명한 인물이나 단어를 소개하며 친숙하게 시작된 개막식은 러시아의 역사, 문화, 지리, 사회가 응축되어 펼쳐진 한편의 파노라마와도 같았다.
세 필의 말이 이끄는 삼두마차 ‘트로이카’가 등장하는 가운데, 러시아 국민악파의 한 명인 이고리 보로딘이 12세기 중세 러시아문학의 백미인 ‘이고리 원정기’를 오페라로 만든 <이고리 공>의 한 테마가 흐르며 시작된 개막식 공연은 중세 모스크바의 상징인 붉은광장의 성바실리 사원을 동화 속 아름다운 궁전으로 보여주었고, 18세기 페테르부르그의 건설과 열병하듯 행진하는 모습, 19세기 사교계의 무도회, 20세기 볼쉐비키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 그리고 소비에트 해체 이후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어린 소녀 류보비(사랑)를 통한 <미래에 대한 지향>으로 맺어졌다. 테마도 뚜렷했고, 자신들의 역사를 부정도 미화도 하지 않으며 담담히, 그러나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훌륭했다.
개막이 내일인데 아직 공사중이고, 호텔에선 누런색 물이 나오고, 변기가 밑이 없이 뚜껑만 있고, 오륜기 하나가 안 펴져 사륜기가 되었다는 등의 트집잡기에 오히려 더 신나하는 듯한 서방 언론과 기자들이나, 그들의 그런 글을 그대로 번역하듯 옮겨쓰는 국내의 기사와 보도는 참으로 개탄스럽다. 광활한 영지와 멋진 저택을 보여주는데 정원의 화단 한쪽 모서리가 지저분하다고 그 영지를 싸잡아 비난한다는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SNS에서 유난히 반푸틴 성향이 강한 러시아 사람들도 정치적 호오를 떠나 이번 개막식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히 평가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나발느이와 크세니야 소브챡 등 반푸틴 성향이 강한 유명인들도 크게 비아냥대진 않았다. 최소한의 예의는 그들도 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가지 에피소드가 러시아 SNS를 달구기는 했다. 총리인 메드베데프가 졸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고, 공식중계채널인 PTP의 캐스터가 우즈베키스탄을 타지키스탄이라 잘못 소개하고, 오륜기 등장에 극우적 성향의 니키다 미할코프 영화감독이 왜 깃발을 들고 등장하는지에 대해 말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역시 극히 지엽적인 부분들이다.
러시아, 변하고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소비에트 해체 이후 뒤쳐지고 침체된 러시아를 현대 기준에 부합하는 국가로 발돋움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젠 현실화 되고 있다. 페테르부르그만 하더라도 넵스끼 대로에서 마르슈르트까(소형 버스)를 못 다니게 하니 버스와 트롤리버스의 운행속도가 엄청 빨라졌다. 처음에는 불평하던 사람들도 이젠 편안히 잘 타고들 다닌다. 많이는 아니지만, 퇴직자들 연금은 꾸준히 오르고 있다. 이번 2월 1일자로 또 평균 6.5%가 올라 평균연금이 월 11,400루블이란다. 우리 돈 30만원이 안되는 액수이지만, 연금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거의 없고 또 연금이 꾸준히 오르고 있기 때문에 체감만족도는 결코 낮지 않다. 학교나 은행, 행정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이젠 아주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며, 심지어 기차 차장이 승객과 대화할때는 허리를 굽혀 승객 가까이에서 말을 듣는, ‘서비스 마인드’마저 갖추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일반시민들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 등의 마음이 보인다. 러시아인이 여유를 뚜렷하게 찾아가는 모습이다. 엄청난 벌금 때문이긴 하겠지만,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보행자를 우선시 하는 모습은, 그 이전의 러시아 운전자를 겪어본 사람들에겐 가히 충격적이리라. ‘도로 위의 혁명(дорожная ревлюция)’이라고 했더니, 러시아 지인 알료샤가 껄껄껄 웃는다. 맞는 말 같다면서. 그리고, 2014년 2월 현재 내가 페테르부르그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사람들은, ‘이제 우리 러시아도 예전 힘들었던 때를 벗어나 뭔가 좀 다른 내일을 개척할 때가 되었고, 나도 몫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뚜렷이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러시아인들은 오늘의 자신들을 있게한 과거와 역사,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기억은 여전하다. 여전히 2차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잊지 못하지만, 독일군을 증오하고 소련 시대 맹목적인 애국심과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이젠 그 당시 자신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가 하면(올해 레닌그라드 고립 분쇄 70주년을 기념한 다큐멘터리 Голоса라는 프로그램), 여전히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종교라는 항수를 지켜내며,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했듯이 어린이를 통한 미래세대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자뭇 의도적이지만, 이번 개막식 공연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이들’이라는 글귀를 바닥에 크게 적어 놓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로 러시아가 진입하고 도약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오늘날 변화하는 또는 변화하려고 애쓰는 러시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전혀 못 느끼거나 또는 그 변화를 왜곡하려는 서방 및 국내의 극렬반대파들의 불만이 있다. 물론, 그들의 지적이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개막식만으로 판단해보건대 러시아는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변화를 러시아 국민 스스로에게 알리며 더욱 추동력을 확보하려는 뜻이고, 또 ‘바깥’에도 우리가 이렇게 변해 보려고 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신호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는 예외가 없다 싶을 정도로 언제나 러시아를 (잠재적/현실적) 적으로 혼자 돌려세운 뒤 이루어진 관계였다. 러시아를 자신들과 ‘틀린’ 아주 이상한 족속으로 경계하고 대립하기 시작한 서구로부터 러시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때론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기도 했었다. 이러한 선택들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스마르크의 “러시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지도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하지도 않다”는 말은 어쩌면 이런 서구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아닐까?
이제 우리도 러시아를 우리의 눈으로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서구가 러시아를 바라보는 방식은 철저히 자신들의 관점와 이익으로 필터링된 시각이다. 그 시각을 우리는 이른바, ‘객관적이다’라는 말로 포장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차이다. 영어로 쓰여진 자료를 본다는게 문제될 일이 아니라, 러시아를 얼마나 편견없는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젠 정말 러시아를 안에서 들여다 볼때인듯 싶다. 30년, 40년 전처럼 소련을 책으로만 배우던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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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정현 대구대학교 학술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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