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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가 말하는 우리의 욕망

950만 개의 눈이 본 것들

TV 셋톱박스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무엇을 보는지, 언제 채널을 돌리는지, 어떤 광고에서 멈추는지. 모든 것이 기록되고 분석된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말한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이지에이웍스 TV 애드 인덱스에 의하면 2025년 6월, 가장 많이 노출된 광고는 트립닷컴이었다. 11.7억 건. 여름휴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이 숫자가 되어 나타났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팬데믹 이후 더욱 강해진 이 갈망이 데이터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2위부터 10위까지를 보면 우리의 진짜 욕망이 드러난다.

건강에 대한 불안한 집착

메이킨 5.7억 건, 아로나민골드 3.7억 건, 이가탄 3.7억 건, 마그비스피드 3.5억 건, 센시아 3.2억 건, 인사돌 3억 건.

건강식품과 의료용품 광고가 상위권을 휩쓸었다. 우리는 건강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건강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매일 비타민을 챙겨먹고, 영양제를 구매하고, 건강검진 결과에 일희일비한다.

이것은 현대인의 역설이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더 불안해진다. 예전에는 몰랐던 질병의 이름들을 알게 되고, 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수치들을 걱정한다. 무지가 때로는 행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건강식품 광고가 이렇게 많이 노출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클릭하고, 구매하고, 또 찾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안이 누군가의 비즈니스가 되는 순간이다.

갤럭시와 맥주가 말하는 것

갤럭시 S25 엣지가 3위에 올랐다. 4.9억 건. “Z세대 아이돌을 활용한 광고 확대”라고 분석 보고서는 설명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원한다. 더 빠르고, 더 예쁘고, 더 똑똑한 것을. 1년도 안 된 스마트폰을 버리고 새 모델을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스 맥주가 4위다. 4.6억 건. “여름 성수기 맞아 시원함 강조”라고 한다. 우리는 시원함을 원한다. 물리적 시원함만이 아니라 정신적 시원함도. 하루 종일 쌓인 스트레스를 맥주 한 잔으로 날려버리고 싶어한다.

기술과 알코올. 현대인의 두 가지 도피처가 데이터에 그대로 나타났다.

장원영이라는 현상

광고 모델 노출 순위 1위는 장원영이다. 6.2억 건. 아이더, 빙그레, 다이슨, 베러레스트… 그가 광고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화면에 나타난다.

장원영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의 집합체다. 젊고, 예쁘고, 성공했고, 트렌디하다. 그가 쓰는 제품을 사면 우리도 그처럼 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환상을 산다.

2위 장도연이 흥미롭다. 전월 대비 113계단 급등. 배달앱 ‘땡겨요’ 모델로 발탁되면서다. 장원영과는 정반대의 매력이다. 친근하고, 유머러스하고, ‘우리 같은’ 사람. 우리는 완벽함을 동경하면서도 평범함에서 위안을 찾는다.

선거와 스포츠, 집단적 흥분

프로그램 노출 순위를 보면 더 재미있다. 1위부터 6위까지가 모두 ‘MBC 선택2025’ 대선 개표방송이다. 228.2만 건부터 125만 건까지.

우리는 역사의 순간을 함께 보고 싶어한다.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수천만 명과 함께. 댓글을 달고, SNS에 올리고, 옆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집단적 경험을 갈망한다.

4위에 ‘MBC 스포츠 축구(2026 FIFA 한국:쿠웨이트)’가 있다. 148.8만 건. 스포츠는 가장 원시적인 집단 흥분이다. 내가 뛰지 않아도 우리 팀이 이기면 기쁘고, 지면 슬프다. 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인간적이다.

데이터 뒤에 숨은 알고리즘

우리의 모든 행동이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가 다시 우리에게 광고로 돌아온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게 만든다. 욕망이 데이터를 만들고, 데이터가 욕망을 만드는 순환고리.

트립닷컴 광고를 본 사람은 여행 관련 광고를 더 많이 보게 된다. 건강식품 광고를 클릭한 사람은 다른 건강식품 광고를 더 많이 보게 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욕망을 증폭시킨다.

욕망의 민주주의

이 데이터가 보여주는 것은 욕망의 민주주의다. 950만 개의 셋톱박스가 투표한 결과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들이다.

우리는 떠나고 싶어하고(트립닷컴), 건강하고 싶어하고(각종 건강식품), 새로운 것을 갖고 싶어하고(갤럭시), 시원함을 원하고(맥주), 아름다움을 동경하고(장원영), 함께하고 싶어한다(선거 개표방송).

이것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건강을 걱정하면서 술을 마시고, 돈을 아끼려 하면서 새 스마트폰을 사고, 혼자 있고 싶어하면서 함께하고 싶어한다.

데이터의 한계와 가능성

하지만 데이터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왜 우리가 이런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이런 욕망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트립닷컴 광고를 가장 많이 본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여행을 많이 가는 것도 아니다. 건강식품 광고를 많이 본다고 해서 우리가 더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광고를 많이 볼수록 더 불안해지고, 더 갈증을 느낀다.

데이터는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야 할 문제다.

950만 개의 거울

결국 이 데이터는 거울이다. 950만 개의 화면이 비춰주는 우리 자신의 모습.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냥 인간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 거울을 어떻게 보느냐다. 데이터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데이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것인가.

우리의 욕망은 데이터가 되었다. 이제 그 데이터를 통해 더 나은 욕망을 꿈꿀 수 있을까? 더 건강하고, 더 의미 있고, 더 지속가능한 욕망을.

트립닷컴 대신 진짜 여행을, 건강식품 대신 진짜 건강을, 광고 속 아름다움 대신 진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을까.

950만 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우리의 선택을.

기자 /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달하며, 다양한 세계와 소통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 I want to get to know and connect with the diverse world of start-ups, as well as discover their stories and tell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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