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는 공기의 파동으로 존재하며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파동이 닿지 않는 고요한 세계가 있다. 그 침묵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 있다. ‘소리를 보는 통로'(소보로)의 윤지현 대표를 만나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근원적 소통 욕구를 충족시키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침묵 속에서 태어난 연결의 씨앗
“IT 전공 과목 중에 설계 수업을 수강하면서 각자가 하나의 서비스 프로토타입을 구현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소보로의 원형을 처음 구상했습니다.”
2016년, 포항공대 학생이었던 윤 대표가 소보로의 씨앗을 심었을 때는 알파고가 세상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던 시기였다. 인공지능의 잠재적 가능성이 활짝 열리던 그 시간 속에서, 그는 기술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깊이 사유했다.
“인공지능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이 기술을 더 깊이 탐구하고 싶었고, 동시에 이 기술이 실질적인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보조공학’이라는 영역으로 향했다. 첨단 IT 기술을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접근성 서비스에 접목하는 분야였다. 그의 주변에 청각장애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학창 시절의 프로젝트로 구현한 프로토타입은 이후 수많은 청각장애인의 삶의 지평을 넓히는 시작점이 되었다.
불확실성의 바다를 건너다
창업이 그의 원초적 꿈은 아니었다. 그저 서비스를 출시하고 사람들이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프로토타입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목격한 그는 학업을 잠시 미루는 결단을 내렸다.
“휴학 기간 동안 법인 설립에 대한 결심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수십 명의 청각장애인 테스터들을 만나 소통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초기에는 청각장애인 학생들의 학습 환경을 지원하며 서비스의 실효성을 검증했다.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수업 지원을 요청하면, 해당 강의실에 동행하여 시스템을 세팅하고 뒤편에서 서비스가 원활히 작동하는지 지켜보곤 했습니다.”
이러한 현장에서의 직접적 경험은 그에게 확고한 방향성과 사명감을 부여했다. “현장에서의 관찰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얻은 통찰들이 제대로 된 서비스 출시에 대한 단단한 의지를 형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소보로, 세상에 나오다
“‘소보로’는 ‘소리를 보는 통로’의 축약형입니다. 이 이름은 서비스의 본질을 담으면서도 기억하기 쉽고 부르기 편하도록 고안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의미심장한 이름은 가족들과의 소통을 통해 탄생했다. “당시 서비스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해서 가족 단체 채팅방에 아이디어를 요청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안해 주신 이름이 가장 서비스의 본질을 적확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소보로의 초기 서비스는 모바일 기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대화를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기술이었다. 이 서비스는 청각장애인들이 일상 대화부터 교육 현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통 환경에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다.
기술과 인간의 접점에서
소보로가 추구하는 핵심 기술적 가치는 정확한 음성 인식이다. “제품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정확도입니다.” 현재 소보로의 음성 인식 정확도는 97.78%에 달한다고 윤 대표는 말한다.
그러나 기술적 정확도를 넘어서,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었다. “청각장애인 분들은 소통의 접근성과 정보 접근성을 모두 필요로 합니다. 말소리가 자막으로 시각화될 때, 청각적 제약이 있는 환경에서도 상황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청각장애인들이 가진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해하는 것이 서비스 개발의 핵심이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개개인이 지닌 다양성과 넓은 스펙트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청각 손실의 정도, 언어 구사 능력, 소통 방식 등이 모두 개인마다 상이합니다. 어떤 분들은 구화를 선호하고, 어떤 분들은 수화를 주로 사용하며, 그 분포가 특정 지점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넓게 분산되어 있습니다.”
기업가의 내면 여정
창업의 여정은 결코 매끄러운 길이 아니었다. 특히 초기에는 재정적 불안정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항상 그의 동반자였다.
“초창기에는 매월의 수입으로 그 달의 지출을 간신히 충당하는 취약한 상황이었습니다. 투자 유치가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금 고갈의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약 6~7년 전에는 그런 상황이 일상이었습니다.”
윤 대표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신적 균형을 유지했다. 2017년부터 그는 매일 자신의 상태를 구글 설문지에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정신 건강, 신체적 컨디션, 일상의 만족도 등을 그래프로 시각화하며 자신의 변화 패턴을 분석했다.
“이 자기 관찰 시스템은 저를 정신적으로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었는데… 첫째,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나면 그 고통의 구체적 내용은 기억에서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극도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몇 개월만 지나면 그 구체적 고통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한 그는 “첫 번째 역경이 가장 큰 타격을 준다”는 인생의 지혜를 발견했다. “처음 경험하는 위기, 예를 들어 핵심 인재의 이탈, 자금 부족, 투자 유치 실패 등은 처음 겪을 때 가장 큰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두 번째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그 충격의 강도가 현저히 감소함을 경험했습니다.”

소리를 보는 미래
현재 소보로는 800개 이상의 기관과 단체에 도입되어 청각장애인들의 정보 접근성과 사회적 참여를 증진시키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환경의 확산은 소보로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비대면 소통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소보로의 자막 서비스는 더욱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입술 읽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자막은 중요한 소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소보로의 미래 비전은 기술적 완성도의 향상과 서비스 적용 범위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지표인 정확도를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더욱 정밀하고 신속한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또한 활용성을 높여 다양한 상황—영상 시청, 녹음 파일 분석 등—에서 폭넓게 활용될 수 있도록 서비스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글로벌 시장 진출에 대해서도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국가 선정에 있어 청각장애인 또는 고령 난청인의 인구 규모, 시장 수요, 접근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 그리고 청각장애 인구가 상당한 베트남 등이 주요 후보 시장으로 검토되고 있습니다.”
침묵의 세계에 닿는 다리
소보로가 지향하는 가치는 단순한 기술적 혁신을 넘어선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접근성’과 ‘독립성’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접근성이란 정보와 기회, 경험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속적인 외부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원하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 견고한 연결의 다리를 놓는 일. 윤지현 대표와 소보로는 이 다리를 더욱 튼튼하고 넓게 만들어가고 있다.
“청각장애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관계의 단절입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원활한 소통의 부재로 인한 심리적 고립감은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우리의 서비스가 이러한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더 풍요로운 관계 형성에 기여했으면 합니다.”
기술은 단순히 소리를 텍스트로 변환하는 도구를 넘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된 연결을 회복시키는 매개체로 진화하고 있다. 소리의 부재가 더 이상 세상과의 소통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 시대, 소보로는 그 시대의 문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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