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간의 후각을 재현하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모방하는 영역에서 꾸준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시각과 청각 분야에서 이미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AI가 이제 후각 영역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컴퓨터 비전 기술의 발달로 AI는 이미지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능력에서 인간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했다. 음성 인식 기술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해 일상생활에서 AI 비서의 활용이 보편화되고 있다.
반면 후각은 AI에게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향수 산업 전문가들은 이 분야야말로 AI 기술이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이 큰 영역이라고 입을 모은다.
향수 제조 과정은 겉보기에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작업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복잡한 화학 성분의 조합과 정밀한 비율 조절이 요구되는 이 과정에 AI의 데이터 분석 능력과 패턴 인식 기술이 활용된다면, 새로운 향수 개발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전망된다.
향수 제조의 핵심은 방대한 양의 향기 데이터에 있다. 향수 제조에는 수천 가지의 천연 및 합성 향료가 사용되며, 각 원료는 고유한 냄새 특성과 휘발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데이터는 AI 알고리즘 훈련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AI 기술의 강점은 이러한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분석하여 규칙과 상관관계를 도출해내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조향사들은 더욱 조화롭고 균형 잡힌 독특한 향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향수 제조 과정에서 AI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향수 개발은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동반하는 과정이다. 하나의 향수 배합은 수십 또는 수백 가지 성분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이들은 탑, 미들, 베이스 등 향의 층으로 나뉘어 시간과 온도에 따라 변화한다.
이러한 복잡성으로 인해, 이상적인 향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원료의 조합과 비율을 지속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여기서 AI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AI는 수많은 과거 레시피와 평가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양한 원료 조합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향기 특성을 예측할 수 있다.
이를 구현하는 사례로 네덜란드의 향수 제조 스타트업 센트로닉스(ScenTronix)가 주목받고 있다. 2018년 설립된 센트로닉스는 네덜란드 예술가 프레데릭 뒤에린크와 20년 이상의 향수 업계 경력을 가진 아나히타 메카닉이 공동으로 창업했다. 이 회사의 주력 상품은 맞춤형 조향 서비스 ‘에브리휴먼(EveryHuman)’이다.
센트로닉스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고객 데이터와 AI 기술을 결합한다. 고객의 향기 선호도, 생활 방식, 성격 등의 정보를 알고리즘에 입력하면, 회사가 자체 개발한 ‘향수 제조기’가 맞춤형 향수를 제작한다. 이 기계는 기본 향의 배열과 비율을 조정하여 5천억 개 이상의 다양한 향수를 만들 수 있으며, 시간당 50명의 고객에게 개인화된 향수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AI 기술에도 한계는 있다. 기계는 아직 ‘후각’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코에 의존해 향에 대한 선호도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회사는 고객 피드백을 통해 지속적으로 알고리즘을 최적화하고 있다.
센트로닉스는 현재 네덜란드 브레다, 오스트리아 빈, 영국 런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등 여러 지역에서 향수 제조기 체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지금까지 75,000명 이상의 고객이 이 서비스를 이용해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었다.
센트로닉스는 독특한 시장 진입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향수 브랜드가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한정판 향수를 출시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센트로닉스는 서비스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방식이다.
프레데릭 뒤에린크 센트로닉스 공동 창업자는 “향수 제조기를 설계할 때 실용성뿐만 아니라 미적, 디자인적 요소를 갖추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라고 말했다. 이는 사람들이 기계에 매력을 느껴 상호작용을 원하게 만들고, 제품 자체에 스토리를 담기 위함이다.
이러한 독특한 제품 디자인 철학은 센트로닉스가 다른 향수 브랜드와의 협업, 대규모 디자인 페스티벌이나 예술제 참가 등 비전형적인 방식으로 시장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향수 산업 전문가들은 AI가 인간 조향사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좋은 향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인간의 창의성과 감각이 필요하다. 향기 인식은 매우 주관적이며, 개인의 생활 경험, 감정, 문화적 배경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결국 AI 조향사가 다음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는 감성과 이성의 완벽한 결합이 될 것으로 보인다. 향수 산업에서 AI의 역할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그리고 인간의 창의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귀추가 주목된다.
매트 첸(Matt Cheng) 체루빅 벤처스 매니징 파트너, 아워송 코파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