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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혁명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지난 7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본 광경은 참 기이했다. 형형색색의 응원봉 물결 사이로 수많은 깃발들이 나부꼈다. 한때 이곳에서는 대학 이름이 크게 쓰인 깃발이나, 노동조합의 깃발들이 휘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나부끼는 깃발들은 달랐다.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이라 쓰인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그 옆으로 ‘푸바오의 행복을 바라는 모임’이란 깃발이 올라갔다. ‘전국 혈당 스파이크 방지 협회’의 깃발이 지나가고, ‘TK 장녀 연합’의 깃발이 뒤를 이었다. 심지어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라는 깃발도 보였다. 웃음이 났다. 하지만 묘한 감동이 있었다.

특히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이 재기발랄한 깃발들과 응원봉을 든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지만, 그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때로는 깃발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비상계엄이라는 충격적인 단어 앞에서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젊은이들은 선진국에서 태어난 세대다. 스마트폰과 고속인터넷을 당연하게 여기고, 넷플릭스로 전 세계의 문화를 소비하며, K-pop의 세계적 성공을 목격하며 자란 세대. 그들에게 비상계엄이란 단어는 어떻게 들렸을까? 아마도 불가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심각한 상황을 차라리 유머로 승화시키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시위는 엄숙했다. 구호는 격양되어 있었고, 깃발은 무거웠다. 하지만 이날 젊은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TK 장녀 연합’이라는 깃발로 지역감정의 구태의연함을 조롱했고,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이라는 깃발로 현실을 풍자했다. 심지어 ‘푸바오의 행복’까지 걱정하는 여유도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형 저항 아닐까?

특히 흥미로운 건 이런 현상이 세대 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기성세대들도 이내 젊은이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민중가요만 알던 이들이 K-pop을 흥얼거리고, 진지한 구호만 외치던 이들이 재치 있는 깃발 앞에서 미소 짓는 모습은 마치 작은 기적 같았다.

선진국에서 태어난 세대가 느끼는 정치적 부조리함. 그것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종류의 분노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경험한 것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분노,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과거가 되돌아온다는 분노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분노를 무겁게 표현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유머와 위트로 무장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시위에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런 구시대적인 발상따위, 우리는 웃으면서도 이겨낼 수 있어!’ 하고 말이다. 응원봉과 재치 있는 깃발들로 어둠을 밝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희망이 느껴진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시위는 더 이상 고통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회 앞 광장은 이제 축제의 장이 되었다. 정의를 위한 싸움이 반드시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다는 걸, 이 젊은 세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서도 민주주의는 자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가 아닐까? 분노를 유머로 승화시키고, 저항을 축제로 만들어내는 능력.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성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돌에서 촛불로, 다시 응원봉과 재기발랄한 깃발들로 이어지는 이 변화의 끝에서, 나는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본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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