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업 3년 이내 기업만을 위한 세제 지원, 까다로운 금융지원 요건, 부족한 R&D 자금.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16.3%를 차지하는 7~10년차 기업들이 겪는 현실이다. 벤처기업협회의 최신 조사(벤처기업확인제도 인식조사 결과 및 시사점)는 정작 스케일업이 필요한 시기에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중견 벤처기업들의 고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조사에는 제조업 600개사, 서비스업 400개사, 총 1,000개의 기업이 참여했다. 업종도 다양했다. 첨단제조(27.9%)부터 일반제조(32.1%), 첨단서비스(22.4%), 일반서비스(17.6%)까지. 매출 규모도 제각각이었다. 20억 미만부터 80억 이상까지, 10억 미만부터 50억 이상까지. 말하자면 한국 벤처생태계의 축소판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숫자 98.6%였다. 거의 모든 기업이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응답 패턴이다. 세제 지원(96.8%)과 금융 지원(91.6%)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R&D 지원(88.9%)이 그 뒤를 이었다. 한마디로 “돈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필요성과 활용성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세제 지원의 경우 96.8%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실제 활용률은 65%에 그쳤다. 금융 지원은 더 심각했다. 91.6%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활용률은 51.1%였다. 40%p가 넘는 차이다. 이게 바로 그 벤처기업 대표가 말한 ‘미끄러지는 유리구슬’인 셈이다.
벤처기업확인제도의 효과를 보면 더 아이러니하다. ‘기업 이미지 제고'(58.6%)와 ‘자금조달'(48.0%)에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기업의 실질적인 성장과 직결되는 ‘수출'(14.3%), ‘우수인력 확보'(21.7%), ‘시장개척'(25.4%)에서는 효과가 미미했다. 마치 번듯한 간판은 달았는데 가게 안은 텅 비어있는 것 같은 형국이다.
특히 법인세 감면 제도의 현실은 더욱 씁쓸하다. 현행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르면, 창업 3년 이내 벤처기업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업이 전체의 15%도 안 된다. 게다가 2023년 말 기준으로 보면 벤처기업의 16.3%가 업력 7~10년 구간에 몰려 있다. 바로 이 구간이 스케일업이 절실한 시기인데, 정작 지원은 받지 못하는 셈이다.
벤처기업들이 바라는 개선사항을 보면 현실이 더 잘 보인다. 가장 많이 요구한 것이 ‘세제지원 확대'(35.1%)였다. 구체적으로는 감면기간 연장, 감면비율 확대, 법인세/소득세 감면 등이다. 그 다음으로는 ‘보증한도 증가'(15.4%), ‘R&D 지원'(10.1%) 순이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현재 가장 트렌디한 분야의 지원 요구다.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 벤처기업들은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R&D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이 문제는 단순한 기업 지원의 문제가 아니다. 2024년 벤처확인기업 수가 38,216개로 전년 대비 소폭 감소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3년 말 40,081개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가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우리나라 벤처생태계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이정민 벤처기업협회 사무총장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지난 30여 년의 벤처정책으로 벤처생태계의 기반이 조성됐고, 우리 벤처기업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국가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성장했다”면서도 “현재의 불확실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벤처기업이 혁신과 도전을 멈추지 않도록 현 제도를 기업 수요를 반영하여 실효성 있는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조사에 참여한 기업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그림의 떡’같은 지원제도 말고, 실제로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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