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이머의 데모데이. 몇 번째 취재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낯설었다.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데모데이… 이 모든 용어가 생소했고, 이 행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행사에서 한국 스타트업 역사의 일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11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리는 25기 프라이머 데모데이 현장을 찾았다. 자유로운 복장의 투자자들,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긴장으로 손을 비비는 창업자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일반 관객들까지. 이 공간은 항상 그렇게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교차하는 장소였다.
지난 2010년 1월 국내 최초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로 시작한 프라이머는 16년째 변함없이 스타트업 생태계를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선배 창업가들의 DNA를 후배 창업자들에게 전달하고 복제해 성공을 돕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25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육성했다.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시기임에도 프라이머는 꾸준히 미래의 유니콘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프로그램 북을 펼쳤다. 9개 스타트업의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매번 그렇듯, 나는 이 이름들 중 몇 개가 살아남을지 가늠해보려 했다. 화려한 발표, 박수갈채가 언제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가장 조용했던 팀, 발표는 서툴렀지만 제품과 시장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팀이 몇 년 후 업계를 뒤흔들기도 했다.
행사장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에 나선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가 행사를 시작했다. “데모데이의 주인공은 스타트업 그 자체”라며 “조금 미숙하지만 뭔가를 시도하고 각자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마주하는 것이 스타트업 데모데이의 본질적 가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프라이머 배치 프로그램 25기를 소개하며, 26기와 27기 모집 소식, 그리고 ‘스텔스 창업 멘토링’ 프로그램에 대해 언급했다. 직장을 다니며 사이드 프로젝트로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반려동물 신선식품 새벽배송 플랫폼 ‘주토피아프레시’. 김하유 대표는 자신을 “8년째 반려견 로또를 키우는 반려인”이라고 소개하며 신선 펫푸드의 가치를 강조했다. 전문성 있는 브랜드만 단독 입점시키고, 원재료 영양성분을 투명하게 표기했다. 무엇보다 콜드체인을 통해 모든 제품을 한번에 새벽배송하는 차별점이 있었다.
“글로벌에서는 이미 신선 펫푸드가 반려동물을 위한 건강한 식문화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회사가치 7조원으로 나스닥에 상장한 기업도 나올 정도죠.” 그의 말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전년 대비 500% 성장, 월거래액 1억원, 재구매율 50%. 월 10만원 이상 구매하는 코어 고객이 500명을 넘어섰고, 잠재 고객은 100만명에 달한다고 했다.
슬랙 기반 조직문화 개선 솔루션 ‘아기고래’를 개발한 ‘허밍버즈’ 팀. 유시원 대표의 발표는 기술보다 문화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평생직장 개념이 없는 MZ 세대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성장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가차 없이 이탈하고 있다”며 조직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당 월 3,000원의 구독 모델로, 마이리얼트립, 강남언니, 센트비, 라포랩스, 바로고 등 30개 이상의 기업에서 도입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기고래 사용 후 평균 퇴사율이 20%P 감소했다는 데이터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한 고객사의 경우 HR 담당자의 업무 리소스가 15시간 감소했다는 사례도 인상적이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 기술 자체보다 그 기술이 해결하는 인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AI 영어 학습 콘텐츠 제작 서비스 ‘큐파일럿’의 ‘아드바크’ 팀은 에듀테크 분야의 새로운 접근법을 선보였다. 박상현 대표는 서울대에서 경영학과 인공지능연합전공을 공부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챗GPT로 영어문제를 생성하는 시도에서 LLM의 한계를 깨닫고, 자체 데이터셋을 바탕으로 모델을 훈련시켰다고 했다. “특히 글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작업에 활용되는 저희 자체 방법론의 경우 정확도가 97.8%를 기록하며 현재 시점 기준 전 세계 최고의 퍼포먼스를 달성했습니다.” 300페이지가 넘는 자료를 읽고 발췌하던 과정을 1분으로 단축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대성학원, 이투스, 이그잼포유 등 이미 주요 고객을 확보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석재 시장 커머스 ‘봄찬’은 아날로그 산업의 디지털 전환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박지흠 대표는 국내 석재 산업이 2조 1876억원 규모이며, 이중 수입 석재 시장이 72%에 달하는 1조 5750억원이라고, 숫자로 시장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무거운 석재의 특성상 배송 비용이 제품 가격을 넘어서며 유통의 한계가 있었던 문제를 해결했다고 했다. “석재의 다양성 문제, 인건비 문제 해결을 위해 동남아 제휴 공장에서 모든 작업을 완료하는 방법을 택했다”며 “문제를 해결하니 시장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1개월만에 손익분기점을 달성했고, 지난해 연 매출 11억원 영업이익율 28%을 달성했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불투명한 제품 가격, 비싼 배송비, 지역 파편화된 시장 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그들의 접근법은 신선했다.
업무 요청 자동화 AI 에이전트 ‘도슨티’의 이일구 대표는 카이스트와 일본 라인에서 AI,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팀을 꾸렸다고 했다. 각 기업들이 고객들을 응대하는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정해진 답변이 아닌 상황에 따라 고객의 의도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도슨티의 특장점을 소개했다. “외부 시스템에 실시간으로 연동하는 기술을 팁스 지원을 받아 개발했다”며 LG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등에 SaaS로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365일, 24시간 대신 영업을 해주는 AI가 있다면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구매한다는 것을 확인했죠”라는 말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비건 요거트 브랜드 ‘볼비’의 ‘라이브어트’, 일용직 인력관리 솔루션 ‘윙크’를 개발한 ‘하울링’, 인도 시장 타깃 운세·심리 상담 서비스 ‘시스터즈’의 ‘오렌지필드’, AI 콜센터 구축 솔루션 ‘복스에이아이’의 ‘플릭’까지… 각 팀의 발표를 들으며 나는 메모를 적었다.

행사의 막바지에 파트너 대담이 이어졌다.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의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계획 짜지 말고 그냥 하세요.” 그의 조언은 단순했지만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창업자들은 현재와 미래가 섞인 환상에 산다”며 “30년 후에 할 일을 지금 생각하고 지금 해야 할 것을 30년 뒤에 할 생각을 하는데 너무 생각이 많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에 집중해 오버테크놀로지를 피하고 본질을 찾을 것”을 당부했다. 스트롱벤처스 배기홍 대표, 프라이머사제 이기하 대표, 류태준 파트너 등도 미국진출 팁부터 팀빌딩, 투자유치, 스텔스창업까지 다양한 질문에 진솔하게 답했다.
행사가 끝나고 네트워킹 시간이 되었다. 한켠에서는 이전 기수의 창업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데모데이의 화려한 무대를 떠나 실전에서 1년을 보낸 후의 깊이가 느껴졌다. 어떤 이는 여전히 열정적이었고, 어떤 이는 조금 지쳐 보였다. 그것이 스타트업의 현실이었다.
돌아오는 길, 지난 데모데이들을 떠올렸다. 첫 취재 때의 어색함과 긴장감. 그때는 이 행사가 이렇게 오래 내 일상의 일부가 될 줄 몰랐다. 첫 취재 때 만났던 스타트업 창업자 중 한 명은 이제 벤처캐피털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또 다른 이는 첫 회사의 실패 후 두 번째 창업에 성공해 유니콘 기업의 CEO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메모했던 스타트업들 중 많은 수는 이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취재노트는 그렇게 살아남은 이름과 사라진 이름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스타트업 이름들이 적혀 있고, 그 중 일부는 짙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성공한 스타트업들. 내 예측이 맞았던 때도 있고, 완전히 빗나갔던 때도 있었다. 오늘 본 9개의 팀 중에서는 어떤 이름에 밑줄을 그을까. 주토피아프레시, 아기고래, 큐파일럿, 봄찬, 도슨티, 볼비, 윙크, 시스터즈, 복스에이아이.
권도균 대표의 말처럼, 이들도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있을까? 오버테크놀로지를 피하고 본질을 찾고 있을까?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이 중 몇 개가 다음 해에도 살아있을지, 몇 년 후 유니콘 기업이 될지는. 스타트업 세계의 불확실성은 그렇게 매력적이면서도 잔인했다. 다음 데모데이에서 다시 만날 때,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어딘가에서 또 다른 창업자들이 밤을 새우며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다음 데모데이의 무대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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