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과 몇 년 사이에 인공지능은 공상과학 소설의 영역에서 국가 생존의 문제로 급격히 변모했다. 중국의 딥시크 등장으로 AI 경쟁은 이제 미국의 독점 게임이 아니게 되었고,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은 전략적 포지셔닝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12일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는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주최로 ‘AI 패권 경쟁 속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 정책토론회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여야 정치인, 학계 전문가, 현장의 기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의 AI 미래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다.
“한국이 AI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말이 많지만, 희망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강훈식 의원의 말은 통념과 희망 사이의 긴장을 담고 있었다. ‘뒤처졌다’라는 현실 인식,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는 낙관. 그가 말한 “플랫폼·제조업·에너지정책을 AI를 활용해 고도화”하는 방향은 한국의 기존 강점을 레버리지로 삼자는 전략이었다.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도 비슷한 우려를 표했다. “AI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주식시장이 요동친다.” 그녀의 표현처럼, AI는 이미 우리 일상의 모세혈관까지 파고들었다. 당장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가격까지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이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의 말은 AI를 둘러싼 한국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줬다. “22년에 LLM이 처음 등장했을 때 빅테크들만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 점이 있었던 반면, 딥시크 이후로는 어떻게 하면 그런 스타트업을 만들 수 있을지 질문이 많았다.” 중국의 등장이 한국에게는 일종의 희망이 된 역설적 상황. ‘미국만이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의 역설이었다.
김상배 서울대 교수의 발제는 국제정치학적 시각에서 AI를 재해석했다. “AI 패권 경쟁은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플랫폼, 규제, 외교·군비 경쟁이 복합적으로 얽힌 국제정치적 이슈.” 그의 비유는 절묘했다. “국영수를 포기하고 암기과목만으로 대학을 들어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AI 기술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플랫폼이라는 생태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한양대 강형구 교수의 발제도 같은 맥락이었다. “AI 기술 발전이 플랫폼 산업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단편적 기술 개발이 아닌 ‘생태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모든 발제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종합토론에서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이 드러났다. 최난설헌 연세대 교수는 한국의 ‘규제 선호’ 경향을 지적했다. “우리 사회는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 호의적으로 보는 시간은 잠시이고, 바로 우려와 걱정이 대두되며 규제로 이어지는 면이 있다.” 한국인의 ‘과도한 안전 지향’이 오히려 미래를 위험하게 만드는 아이러니였다.
김재원 엘리스 그룹 대표의 발언은 현실적이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그가 제안한 ‘모듈형 데이터센터’는 자원 제약 속에서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한국적 대안이었다. 이어 “싱가포르·일본·인도네시아 등 해외 시장에서도 모듈형 데이터 센터와 AI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언급은 한국형 AI 수출 가능성을 내비쳤다.
김지예 잡플래닛 COO의 말은 무엇보다 현실적이었다. “현재 AI 시장에 많은 플레이어들이 존재하지만 아직 생태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작게라도 우리나라의 AI 생태계를 제대로 만드는 접근”은 한국의 AI 전략이 취해야 할 실용적 접근법을 시사했다.
정책적 모순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정주연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전문위원은 “현재 국가적 지원이 파운데이션 모델 및 반도체 개발에 집중되어 있으면서, 정작 AI 응용 모델을 발전시킬 수 있는 플랫폼 기업들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고 있어 정책적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오른손과 왼손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영기 한국인터넷기업협회 국장의 발언은 더 날카로웠다. “지나친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이를 제한해 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가 우려한 것처럼, 사전 규제는 AI 기업의 기술 개발과 시장 진입을 지연시킬 위험이 컸다. 규제가 국내 기업만 옭아매는 동안, 해외 기업들은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역설적 상황.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공진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장은 희망을 표했다. “우리는 AI 특허·독자 모델 개발에서 글로벌 3위권을 유지하며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그가 제시한 “내년 상반기까지 1만 8천 장의 GPU 확보” 등의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무엇보다 “규제보다는 진흥에 초점을 맞춰, 불필요한 규제를 최소화”하겠다는 약속이 인상적이었다.
황태희 성신여대 교수의 마무리 발언은 AI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AI는 특정한 산업 이슈에 한정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과 국가적 이익과 경제로 확대되었다.” AI는 더 이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
미중 AI 전쟁 속에서 한국은 어떤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 중국처럼 국가 주도로 갈 것인가, 미국처럼 민간 중심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한국만의 제3의 길은 있는가? 이날의 토론회는 질문을 던졌지만, 답은 여전히 미완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전쟁에서 중립은 없다는 것. 한국은 선택해야 한다. 그것도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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