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물은 바다로 흐르는 것이 순리요, 규제는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 이치다. 그러나 OECD가 최근 공개한 「2025 규제정책전망」은 우리 규제의 민낯을 가차 없이 드러냈다. 제도의 그릇은 화려하되 내용물은 미흡하다는 신랄한 평가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코딧(CODIT)이 공동 발간한 이슈페이퍼 「2025 OECD 규제정책전망 분석과 한국의 대응방안」에 담긴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 규제 현실을 짚어본다.
형식은 갖췄으나 알맹이는 부족한 한국 규제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규제영향분석(RIA)과 사후평가 제도화에서 OECD 회원국 최상위권에 올랐다. 행정부 발의 모든 규제에 영향분석을 실시하고, 규제의 중요도에 따라 분석 깊이를 조절하는 체계적 접근을 갖췄다는 평가다. 국무조정실과 규제개혁위원회 중심의 감독 기구 존재는 규제 품질 확보의 강점으로 꼽혔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관 뒤에는 치명적 결함이 숨어있었다. 국회에서 발의한 법률에는 이런 규제영향분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회 발의 법안이 전체 입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규제 품질 관리의 사각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는 현실이다.
이해관계자 참여 측면에서도 우리의 한계는 뚜렷했다. e-입법센터, 규제정보포털 등 전자 플랫폼을 통한 의견수렴 채널은 갖추었으나, 대부분 규제 도입 후기 단계에서만 작동한다. 초기 단계부터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듣는 체계는 부실하고, 수렴된 의견이 어떻게 정책에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피드백은 더욱 빈약하다.
녹색 전환과 디지털 혁신, 그리고 규제의 역할
OECD 보고서는 녹색 전환(Green Transition)을 규제정책의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특히 환경 목표와 규제 시스템 간의 일관성 확보가 중요하며,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부처 간 분절적 운영이 녹색 인프라 투자 확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인허가 절차가 지나치게 장기화되고 있으며, 풍력, 태양광, 수소에너지 등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승인 병목현상이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특히 전략적 예측 기능(strategic foresight)과 부처 간 정책 조정(cross-ministerial coordination)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권고했다. 디지털 전환, 기후위기, 지정학적 리스크 등 복합 위기에 대응하려면 부처 간 장벽을 넘어서는 유기적 협업 체계가 필수적이라는 메시지다.
일관된 피드백, 그러나 개선되지 않는 현실
가장 주목할 점은 OECD의 2021년과 2025년 보고서를 비교해 보면, 한국 규제 거버넌스에 대한 평가와 권고가 4년간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두 보고서 모두 한국의 규제 운영이 형식적 제도화에는 성공했지만, 실질적 운용 성과와 제도의 포괄성 측면에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동일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특히 반복적으로 지적된 사항은 RIA가 행정부 발의 법안에만 적용되고, 국회 발의 법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4년이 지났음에도 이 핵심적인 구조적 결함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는 제도 운용의 실효성을 제고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이고 실행력 있는 개선 노력이 부족했음을 방증한다.
규제의 전략적 재정의
OECD는 이번 보고서에서 규제를 단순한 경제활동 제한이 아닌, 지속가능한 성장과 사회적 신뢰를 뒷받침하는 ‘핵심 공공 자산’으로 재정의했다. 규제는 이제 통제의 도구가 아닌, 국가 경쟁력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적 자원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보고서는 규제 체계가 단순히 행정적 절차를 넘어 국가 차원의 리스크 관리와 미래 대응 역량으로 기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규제를 통해 디지털 전환과 녹색 성장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다섯 가지 처방전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코딧의 분석 보고서는 한국 규제 거버넌스의 실효성과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다섯 가지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규제거버넌스 법제화다. 규제영향분석, 이해관계자 협의, 전략적 예측, 사후평가 등 전 주기적 관리 요소를 법적 의무로 통합하고, 국회 발의 법률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둘째, 연례 규제 성과 보고서 제도화다. 규제 정책의 성과를 신뢰도, 의견 반영률, 비용 절감 등 정량지표로 관리하고 피드백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셋째, 부처 간 규제 운영 수준 평가다. iREG 기준의 부처별 성과 비교를 통해 내부 경쟁과 인센티브 구조를 유도해야 한다.
넷째, 규제기관 역량 강화다. 디지털, ESG, AI 등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담 조직을 확대하고, 실증 기반 규제 혁신과 기술 기반 집행도구 도입을 추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속 가능한 규제 개선 피드백 체계 구축이다. 현장 문제와 제도 개선을 잇는 피드백 루프를 마련하고, 산업별 대표기관을 통해 규제 애로사항을 체계적으로 수렴하고 개선하는 경로를 제도화해야 한다.
규제는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이 낡아 새 술을 담지 못한다면, 그릇을 바꿔야 할 때다. OECD의 진단은 우리 규제 체계에 대한 경고이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이정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조기 대선을 앞둔 지금, 이러한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개선이 차기 정부의 핵심 과제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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