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선서에서 말했다. “눈 깜빡할 새 페이지가 넘어가는 인공지능 무한경쟁 시대가 열렸습니다.” 참 적확한 표현이다. 우리는 정말로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맨손의 응원봉으로 최고 권력자의 군사쿠데타를 진압하는 민주주의 세계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그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국민은 정말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써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페이지에 무엇을 써넣을 것인가.
40조 원. 이재명 정부가 벤처투자 시장에 투입하겠다고 약속한 돈이다. 2023년 벤처투자가 4조 원 정도였으니 10배 늘리겠다는 것이다. “국가 재정을 마중물로 삼아 경제의 선순환을 되살리겠다”는 그의 철학이 담긴 숫자다.
“대․중․소․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산업생태계”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 정부들도 비슷한 약속을 했었다. 박근혜의 ‘창조경제’, 문재인의 ‘혁신성장’. 모두 좋은 의도였다. 다만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했을 뿐이다. 이번에는 어떨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실용적 시장주의라는 접근
“이재명 정부는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가 될 것입니다.” 취임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였다.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필요하고 유용하면 구별 없이 쓰겠다”고도 했다.
이념을 넘어선 실용주의. 들어보니 나쁘지 않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구분이 스타트업에게 무슨 소용인가. 중요한 건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여부다.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부가 아니라 지원하고 격려하는 정부”가 되겠다는 약속도 반가웠다. 68개 법정기금에 벤처투자를 의무화한다는 계획을 들으며 나는 이상하게 기대가 됐다. 물론 정부 주도 투자의 한계를 모르는 건 아니다. 관료주의적 심사, 정치적 고려, 전문성 부족.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시장 실패가 있는 곳에서는 정부 개입이 필요할 때도 있다. 특히 초기 단계 스타트업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민간 투자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영역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하느냐다. 정부가 직접 투자하는 게 아니라 민간 전문가들이 운용하게 하고, 성과 중심으로 평가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규제혁신 청사진
“규제는 네거티브 중심으로 변경하겠다”는 약속도 들어봤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말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기업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구체적인 의지가 보인다.
그가 강조한 것은 원칙이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위협하고, 부당하게 약자를 억압하며, 주가조작 같은 불공정거래로 시장 질서를 위협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것들만 아니라면 자유롭게 하라는 뜻이다.
벤처기업 핵심 인력에 대한 근로시간 특례 도입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노동계의 반발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선택권을 주는 방식이라면 충분히 설득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실행력이다. 각 부처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기득권의 저항을 돌파하고, 일관된 정책을 유지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의지만 있다면.
AI와 에너지, 우리의 기회
“AI,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산업에 대한 대대적 투자”와 “재생에너지 중심사회로의 조속한 전환”이라는 방향은 정확하다. 우리에게 기회가 있는 분야들이다.
AI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력은 이미 세계적 수준이다. 삼성, SK, 네이버, 카카오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에 스타트업들이 결합한다면 시너지가 클 것이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상생하는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촘촘한 에너지고속도로 건설로 전국 어디서나 재생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게 해 소멸위기 지방을 살리겠다”는 구상이 특히 흥미로웠다. 단순히 에너지 정책이 아니라 지역 균형 발전과 연결한 것이다.
서울 중심의 스타트업 생태계도 변할 수 있다. 부산의 해상풍력, 제주의 태양광, 강원도의 수소.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린 에너지 스타트업들이 나타날 수 있다. “수도권 집중을 벗어나 국토균형발전”이라는 그의 비전과도 맞아떨어진다.
성공을 위한 조건들
이재명 정부가 성공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강력한 추진체계다. 여러 부처에 흩어진 정책을 통합 조정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 과거 정부들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거버넌스의 부재였다.
둘째, 민간의 전문성과 역동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정부는 환경을 만들고 지원하되, 직접 나서지는 않는 것. 성공한 기업가들이 다시 투자자나 멘토가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
셋째, 장기적 관점과 정치적 지속성이다. 5년마다 정책이 바뀌는 현실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야를 아우르는 합의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가능하다.
기대와 가능성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의 저항도 있을 것이고, 예상치 못한 변수들도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기대가 된다.
“우리 대한민국이 하면 세계의 표준이 될 것”이라는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해왔다. “맨손의 응원봉으로 군사쿠데타를 진압”한 것처럼, 세계가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왔다.
K-컬처가 그랬고, 반도체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다. 이제 AI와 에너지 분야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본다.
AI 혁명은 이제 시작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에너지 전환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우리 스타트업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여지는 충분하다.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직은 늦지 않았다. “변화를 주도하며 앞서갈”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있다.
이재명 정부의 스타트업 정책이 과거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이제 현실에서 확인해볼 시간이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