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6월, 로스앤젤레스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방탄복을 입은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민세관단속국(ICE)이라는 세 글자 뒤에 숨은 이들은 연방 수색영장을 들고 패션 디스트릭트의 의류 공장들을 샅샅이 뒤졌다.
칼날은 예고 없이 왔다. 헬멧을 쓴 요원들이 군홧발로 차고 들어간 공장에서 재봉틀 소리가 멎었다. 44명이 체포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고, 어떤 언론은 100명이라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118명이라고 썼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노동조합 지도자 데이비드 웨르타도 쇠고랑을 찼다. SEIU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던 그의 손목에 차가운 금속이 채워졌을 때, 이것이 단순한 불법체류자 단속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이가 알았다. 연방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 차량의 창문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소식이 퍼지자 거리가 끓어올랐다. 수백 명이 길로 나왔다. “ICE는 LA에서 나가라”는 외침이 빌딩 사이로 메아리쳤다. “노동자 해방”이라는 구호가 경적 소리와 뒤섞였다.
분노는 구체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ICE 차량 앞을 막아섰고, 어떤 이들은 돌을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으로 응답했다. 섬광탄이 터졌고 고무탄이 날아갔다. 아스팔트 위에 누군가의 피가 떨어졌다. 차량 몇 대에 불이 붙었다.
연방 청사 주변은 전장이 되었다. 구치소 담벼락 너머로 체포된 이들의 가족들이 목청을 높였다. 그들의 절규는 콘크리트 벽을 뚫지 못했다.
대통령은 주저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미국 연방법전 제10편 제12406조를 방패로 삼아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2,000명을 로스앤젤레스에 투입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실제로는 300명이 먼저 배치되었다. 소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로.
이것은 196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린든 존슨 대통령은 앨라배마 주지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방위군을 보내 흑인들의 셀마 행진을 보호했다. 60년이 지난 지금, 같은 권한이 정반대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개빈 뉴섬 주지사는 이를 “권력 남용”이라고 불렀다. LA 시장 캐런 배스는 “공동체에 공포를 심어주는 행위”라고 규탄했다. 미국 시민자유연맹은 “군사적이고 억압적인 작전”이라고 성명을 냈다.
트럼프는 한 발 더 나아갔다. “필요하다면 해병대도 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히스패닉계가 밀집한 패러마운트 지역에 주방위군이 집중 배치되었다. 이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수십 년 전 국경을 넘어온 이들의 후손이거나 그들 자신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온 이들이 이제 아메리칸 군인들의 총구를 마주하고 있었다.
1965년, 주방위군은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2025년, 그들은 히스패닉계를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같은 제복, 다른 사명.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을 맞춘다고 했던가.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2,000명 이상이 체포되고 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숫자는 차갑고 정확했다. 그 뒤에 숨은 2,000개의 삶, 2,000개의 가족, 2,000개의 꿈은 보이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의 6월은 뜨거웠다. 아스팔트가 녹을 듯한 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맞서고 있었다. 연방정부는 법 집행이라고 했고, 주정부는 인권 보호라고 했다. 시위대는 자유를 외쳤고, 방위군은 질서를 지켰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체포되고, 누군가는 추방되고, 누군가는 상처를 입었다. 도시는 두 개의 권력 사이에서 찢어지고 있었다. 연방과 주, 중앙과 지방, 법과 정의 사이의 경계선이 피로 그어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황금빛 햇살 아래, 미국이라는 거대한 실험이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올랐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여름이 끝나더라도 그 상처는 오래 남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거리에서 쇠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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