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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은 실패 아닌 신뢰 해체 과정”···마무리도 창업의 일부다

2일 강남구 마루180에서 열린 ‘스타트업 마무리 가이드북 발간 기자간담회’ 현장 ⓒ플래텀

창업 지원은 넘쳐나지만 스타트업이 대거 폐업하는 혹한기 상황에서 ‘제대로 마무리하는 법’은 찾기 어려웠다. 이런 정보 공백을 메운 실무 가이드가 등장했다. 스타트업이 폐업할 때 창업자 혼자 모든 부담을 지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무 매뉴얼이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와 아산나눔재단이 공동 발간한 ‘스타트업 마무리 가이드북‘은 ‘창업 실패와 마무리’를 정면으로 다뤘다.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는 이번 가이드북 발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창업 초기엔 지원과 정보가 넘치지만, 정리 단계에선 막막하다”며 “마무리를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고, 투명하게 절차를 밟아야 신뢰가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폐업이 제품을 믿고 사용한 고객, 회사를 성장시킨 직원, 미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투자자 등 함께 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고 그 과정을 책임감 있게 다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마무리가 가능하다”며 “무엇보다도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절차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창업 생태계는 실패와 재도전까지 포괄해야 지속가능하다”며 “이번 가이드는 단순한 법률 절차서가 아니라, 무너짐 이후에도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는 생존 매뉴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 ⓒ플래텀

“폐업은 실패가 아니라, 신뢰를 해체하는 과정입니다.”

가이드북 집필에 참여한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대표변호사는 스타트업 마무리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주식회사는 사업과 자본이 결합된 고도의 신뢰 시스템”이라며 “투자자와 채권자, 임직원과 고객과의 신뢰를 안전하게 해체하는 것이 마무리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실적 어려움도 지적했다. “투자계약상 개별 동의권 구조가 다운라운드와 청산형 M&A를 어렵게 만든다”며 “평소의 투명한 소통과 거버넌스 정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 변호사는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고위험 창업이다. 당연히 실패할 확률이 높다”며 “신뢰가 해체되는 과정을 최대한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신뢰의 기반을 해치지 않으면서 진행하는 것이 우리 생태계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법적 절차의 현실적 한계도 드러났다. 김 변호사는 “스타트업 회생은 현금 창출 능력이 전제돼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며 “법인 파산도 예납금 500만원조차 없어 신청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실상을 털어놓았다.

김영웅 슈퍼래빗게임즈 대표는 폐업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가장 어려웠던 건 스스로 멈춤을 인정하는 일이었다”며 “내가 가고자 하는 보물섬에 배를 타지 못하고 헤엄을 쳐서라도 가고 싶었는데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게임 개발자 출신인 김 대표는 2013년 비컨스튜디오를 창업해 7년 뒤 폐업했으며, 현재는 2023년 슈퍼래빗게임즈를 재창업한 상태다. 그가 다시 창업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첫 창업의 마무리를 제대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사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파트너사로부터 계약금 15개월치를 받지 못해 급격한 재정 악화를 겪었다”며 “폐업이 사고처럼 다가왔지만, 투자자나 직원들에게 모든 과정과 절차를 투명하게 밝히고 공유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사업을 진행했던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자주 위기감과 기대감을 공유했느냐가 제일 중요했다”며 “폐업 직전 일부 남은 직원들과 3~4가지 프로젝트를 실험적으로 진행했는데 그게 다음 창업의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하영 전 도그메이트 대표의 증언은 생태계의 냉혹함을 보여줬다. “투자자에게 ‘망할 거면 빨리 망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태계가 실패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며 “폐업 후엔 연대보증이 사라졌다고 해도 기관 대출 접근이 막히는 등 2차 피해가 크다”고 호소했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모더레이터), 박희덕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대표, 김영웅 슈퍼래빗게임즈 대표, 이하영 도그메이트 前 대표,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대표변호사 ⓒ플래텀

박희덕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대표는 투자자 관점에서 마무리를 잘 지어야 다음 창업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했다. 컬리의 초기 투자자로도 알려진 박 대표는 “(벤처캐피털로서)한 번에 성공한 창업자도 좋지만 실패를 거듭한 가운데 성공한 창업자를 더 인정한다”며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고 그 다음에 어떤 창업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구조적 한계도 지적했다. “한국은 채권자와 투자자, 임직원의 이해가 얽혀 창업자 혼자 조정하기 어렵다”며 “평소 그라운드 룰을 정해 두지 않으면 위기 시 갈등이 더 커진다”고 조언했다.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많이 발전했지만, 폐업할 때는 창업자들이 오롯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 많다는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성훈 변호사는 “법 체계 속에서 가장 먼저 임직원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그 다음으로 고객과 주주를 생각해야 한다”면서도 “현실은 투자자나 주주들의 의사 결정이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투자자들의 요구로 인해 무리하게 회사를 유지하다가 정리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피해가 커진다”고 우려했다.

특히 “결국 창업자가 신용불량자가 되고 5년 정도는 경제 생태계에서 퇴출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기대 센터장도 “2015년만 해도 교육부나 중소벤처기업부 등에서 창업을 장려했는데 경기가 안좋아지고 결과가 나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창업자였다”며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한계를 지적했다.

김성훈 변호사는 정책적 개선방안도 제시했다. “정책금융과 모태펀드 등 공적 LP가 감사 리스크를 피하려 과도한 제재를 가하는 경우가 많다”며 “실패를 단죄하기보다 재도전을 가능케 하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배임과 횡령 등 일탈에는 엄정한 책임을 묻되 결과적 실패는 용인해야 한다”며 “창업자들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제도적 회복 탄력성을 만들어야 혁신의 토양이 지속된다”고 강조했다.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대표변호사 ⓒ플래텀

이번에 공개된 ‘스타트업 마무리 가이드북’은 마무리 전 점검 리스트와 절차별 상세 안내, 투자자·임직원·고객 등 이해관계자 대응 가이드, 청산·파산·회생의 차이와 청산형 M&A 전략 등을 종합적으로 담았다.

가이드북은 특히 창업자의 의지에 따른 자율적 해산 절차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마무리를 결정한 창업자가 밟아야 할 단계를 창업자 개인 차원의 준비, 가족과의 합의, 지인 및 멘토와의 상의, 회사 차원의 절차 등 4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회사 차원에서는 각종 공적 자금 상환부터 시작해 임직원 퇴직금과 임금 처리, 고객 대응, 투자자와의 협의 순으로 진행하도록 권고했다. 특히 “서비스 중단 안내와 데이터 이관”, “미처리 업무의 인수인계”, “사무용품과 자산의 정리” 등 실무진이 놓치기 쉬운 세부 사항까지 체크리스트화했다.

법과 세무 절차뿐 아니라 임금·퇴직금 지급과 고객 환불·데이터 이전, 채권자 협의 등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조언을 정리한 점도 눈에 띈다.

최유나 아산나눔재단 경영본부장은 “폐업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도전의 기반이 될 수 있다”며 “이번 가이드북이 창업자들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도 “폐업은 말 그대로 그냥 업을 그만둔다는 의미인데 우리는 이를 흔히 실패나 몰락과 연결지어 받아들이곤 한다”며 “기업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시장의 변화 속에서 문을 닫는 것은 자연스런 순환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는 도전 뿐 아니라 마무리 또한 존중받고 박수받는 사회가 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플래텀

이날 간담회는 스타트업 생태계가 그간 터부시해온 ‘실패’와 ‘마무리’를 정면으로 다루며, 건전한 재도전 문화 조성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창업자들의 솔직한 경험담과 전문가들의 정책 제언이 한자리에서 논의되면서, 실패에 대한 낙인을 지우고 재기 기회를 확대하려는 생태계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 /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달하며, 다양한 세계와 소통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 I want to get to know and connect with the diverse world of start-ups, as well as discover their stories and tell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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