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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거래의 역습

김 차관은 보고서를 읽다가 한숨을 쉬었다.

“중고거래 플랫폼 이용자가 3년간 400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우려스러운 경제적 파급효과가 관측되고 있습니다.”

경제기획원에서 올라온 보고서였다. 중고거래가 경제 이슈가 된 시대였다.

보고서의 첫 페이지가 요약이었다.

“중고거래 플랫폼 이용자들은 신제품 구매를 기피합니다. 가전 신규 구매 29퍼센트 감소, 가구 22퍼센트 감소, 의류는 34퍼센트 감소.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해당 품목 매출이 급감하고 있습니다.”

더 읽어 내려갔다.

“유통 마진이 사라졌습니다. 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도소매 유통업체의 매출이 하락하고 있습니다. 택배 업계도 타격을 받았습니다. 중고거래의 40퍼센트가 직거래로 이뤄지며, 배송 수요가 줄어들었습니다.”

45페이지에 더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포장재 산업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중고 물품은 에어캡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반품 가능성도 없으니 견고한 포장이 필요 없습니다. 박스 제조업체의 매출이…”

김 차관은 페이지를 넘겼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문장에서 김 차관은 멈췄다.

“버리지 않으면 다시 사지 않습니다. 재구매 주기가 현저히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제조업 전반에 장기적 타격을 줄 것으로…”

“차관님, 산업통상부 최 국장입니다.”

최 국장이 들어왔다. 손에는 별도로 작성한 자료가 있었다.

“보고서 보셨죠?”

“봤네. 자네 생각은?”

“복잡합니다.”

최 국장이 그래프를 펼쳤다.

“중고거래 활성 지역을 조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 주민들의 저축률이 18퍼센트 올랐습니다. 특히 2030세대의 증권계좌 입금액이 급증했습니다.”

“주식을?”

“네. 중고로 사고, 안 쓰는 걸 팔고, 그러다 보니 돈이 남는 겁니다. 그 돈으로 주식을 합니다. 한 달에 10만원씩, 20만원씩.”

최 국장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들이 사는 주식이 대부분 제조업 대기업입니다. S전자, L전자, H자차…”

김 차관은 웃음이 나왔다.

“중고로 아껴서 그 회사 주식을 사는군. 그 회사 제품은 새로 안 사면서.”

“네. 그래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쁘지.”

김 차관이 잘랐다.

“자네, GDP가 뭔지 아나? 돈이 얼마나 빨리 도는가야. 중고거래는 돈의 속도를 늦춰. 유통도 안 거치고, 배송도 최소화하고, 포장도 안 하고. 경제라는 톱니바퀴에서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뛰는 거야.”

“하지만 환경에는…”

“환경은 환경부 소관이네.”

김 차관은 보고서를 덮었다.

“더 큰 문제가 있어. 이 사람들, 소비 습관이 바뀌고 있다는 거야.”

“습관이요?”

“중고로 사는 게 익숙해지면 새 제품을 보는 눈이 달라져. ‘이게 정말 필요한가?’ ‘나중에 중고로 팔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거든. 충동구매가 사라지는 거지.”

최 국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제조업이 뭘로 먹고사나? 신제품으로 먹고살지. 작년 모델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올해 모델을 누가 사?”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김 차관은 잠시 생각했다.

“보고서 제목 바꾸게. ‘중고거래 활성화에 따른 유통구조 변화 및 대응방안’으로. 그리고…”

“예.”

“중고거래 플랫폼 규제 방안 검토하게. 직거래를 줄이고 택배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최소한 물류는 살려야지.”

“직거래를 어떻게 줄입니까?”

“안전 문제를 부각시키면 돼. 직거래의 위험성, 사기 가능성. 국민 안전을 위해 택배 거래를 권장한다, 이렇게.”

최 국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관님, 그게 진짜 이유입니까?”

김 차관은 창밖을 봤다.

“아니지. 진짜 이유는 택배 기사들이 돈을 벌어야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고, 그 도시락을 만드는 공장이 돌아가고, 그 공장 직원이 월급을 받아서 또 소비를 하는 거야. 이게 경제거든.”

“…”

“순환경제가 뭔지 아나? 물건을 돌려 쓰는 거지. 근데 우리가 원하는 순환은 그게 아니야. 돈이 빨리빨리 돌아야 하는 거지, 물건이 천천히 돌면 안 돼.”

최 국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김 차관은 관용차에서 휴대폰을 보다가 멈췄다. 오이마켓 알림이 떠 있었다. 아내가 깔아놓은 앱이었다.

“우리 동네에 ○○○님이 올린 ‘빈티지 스탠드 3만원’을 확인해보세요!”

김 차관은 앱을 열었다. 아내가 올린 물건들이 줄줄이 있었다. 안 쓰는 가방, 그릇, 책. 다 팔렸다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대화창을 열어봤다.

“따뜻한 거래 감사해요 ^^” “잘 쓸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김 차관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거래는 따뜻했다. 물건은 새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경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차는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유통업계 실적 부진, 온라인 중고거래 영향 지적…”

김 차관은 라디오를 껐다.

집에 도착했다. 서재로 들어가니 책장에 20년 된 경제학 교과서가 꽂혀 있었다. “경제성장론”, “소비이론”, “유통경제학”.

문득 생각했다. 이것도 중고나라에 올릴 수 있을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팔리지 않을 것이다.

책이 낡아서가 아니라, 내용이 낡아서.

새 경제학은 이렇게 쓸 것이다. “성장이 아니라 순환. 소비가 아니라 사용. 소유가 아니라 공유.”

김 차관은 책을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P.S. 그날 밤 김 차관은 아내에게 물었다. “중고로 팔아서 번 돈은 어디 갔소?” 아내가 휴대폰을 보여줬다. 증권 앱이었다. “S전자 2주, L전자 3주 샀어. 당신도 주주야.” 김 차관은 웃었다. 중고의 경제가 주식시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품은 사지 않으면서.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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