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혁신을 만들었다.

2015년 어느 날 밤, 박현호는 통장을 들여다봤다.
내일 프리랜서들에게 2천만 원을 입금해야 했다. 돈이 없었다. 7억 원을 투자받은 지 1년도 안 됐는데 바닥이 났다. 직원들은 나갔다. 사무실은 텅 비어가고 있었다.
“맨날 돈 빌리러 다녔어요.”
2025년 12월 12일, 서울 코엑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가 만든 크몽은 연 거래액 1조 원에 육박, 회원 300만 명, IPO 준비 중이다. 10년 전 그날 밤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11번의 실패
1997년부터 2010년까지, 박현호는 11번의 사업을 시도했다.
PC방 관리 프로그램. 700개 설치, 광고 수익 제로. IT기기 쇼핑몰. 닷컴버블과 함께 무너짐. 격투기 스트리밍. 저작권 몰라서 신고당함.
그 외에 P2P 게임 아이템, 중고물품, 수공예 마켓. 2009년엔 맛집 리뷰 사이트를 만들었다. 블로그 리뷰를 크롤링했다. 저작권 문제로 몇 개월 만에 접었다.
2010년, 다시 시도했다. 지역 커뮤니티 플랫폼. 중고거래 사이트의 글을 긁어왔다. “6개월 안에 대박이 나야 한다.” 조급했다. 30대가 됐고, 실패는 계속됐다.
처음엔 잘 됐다. 수십만 건의 글이 올라왔고, 검색에 걸렸다. 광고 수익이 생겼다. “아, 먹고는 살 수 있겠다.”
신고가 들어왔다. 사이버수사대에서 연락이 왔다.
서울 오피스텔의 관리비를 몇 달째 못 냈다. 전기가 끊겼다. 화장실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신용등급 10등급. 빚 수억 원.
박현호는 짐을 쌌다.

인터넷이 30분 되다 끊기는 곳
지리산 산청. 어머니 집.
비가 오면 다리가 잠겼다. 눈이 오면 차를 길에 버리고 걸어 들어갔다. 어차피 지나다니는 차가 없으니 상관없었다.
인터넷이 없었다.
휴대폰도 안 터졌다. 알아보다가 이 동네에서 처음으로 케이블을 연결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인터넷이 30분 되다가 한두 시간 끊겼다.
“인터넷 될 때는 집중해서 일을 하고, 안 되면 사색하고 책을 봤어요. 오히려 이게 저한테 엄청난 집중력을 만들어줬습니다.”
2010년 가을부터 2011년 봄까지. 작은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30대 초반, 11번 실패한 창업가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오기가 생겨서
2011년 봄, 그는 이스라엘의 파이버(Fiverr)를 발견했다.
5달러에 재능을 거래하는 플랫폼.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됐다. 7천 원 받고 일을 한다고? 그래서 지켜만 봤다.
어느 날 국내에도 비슷한 사이트 2개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중 하나는 막 시작한 베타 서비스였다. 유학파 3-4명이 하고 있었다. 개발자가 없다고 했다. 박현호는 네이트온으로 연락했다.
“같이 해보는 게 어떻겠냐?”
거절당했다.
“저는 이 일에 집중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사이드 프로젝트로 가볍게 해보려고 했죠. 근데 혹시나 이게 나중에 잘 되면 배 아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만들었다. 12번째 도전. 목표는 월 150만원. 생활비만 나오면 됐다.

2주
2주가 걸렸다.
“대단히 허접하고 허술한, 테스트도 제대로 안 된 상태로 그냥 바로 론칭했습니다.”
주변에서 다 말렸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알리면 누가 따라 만들면 어떻게 하냐.” 그는 반대로 생각했다.
“어차피 시골에서 혼자 만들어서 얼마나 잘 만들겠어요. 먼저 시작했다는 걸 알리는 게 중요했어요.”
페이스북에서 유명한 사람들에게 DM을 보냈다. 이메일을 보냈다. 거의 수십만 통.
“저 이런 새로운 사이트 만들었는데, 와서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통했다.
시작하자마자 언론에 나왔다. TV에도 나왔다. 지리산 집에서 촬영했다. “개발자가 혼자서 지리산에 틀어박혀서 재밌는 걸 만든다는 거 자체가 스토리텔링이 됐어요.”
세 번째로 시작했지만, 첫 번째가 됐다.
서서히
초기 크몽의 서비스는 특이했다. “5천원에 노래 불러드려요.” “상사 욕 대신 들어드려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결제는 거의 없었다. 캐리커쳐 그리기에서 처음 수요가 생겼다. 월 100만원이 목표였다. 수수료 20%니까 월 거래액 500만원.
1인 기업이었다. CS 전화가 오면 솔직하게 말했다. “저 혼자 하고 있습니다.” 고객들은 이해했다.
2012년,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했다. 인턴들과 일했다. 개발자는 여전히 박현호 혼자. 2013년, 실력 있는 개발자 6명이 합류했다.
2014년 5월,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경쟁사가 60개를 넘었다. 오피스텔을 구해서 숙식하며 일했다. 2년 전 전기가 끊겼던 그곳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크몽은 “분야 1위”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월 목표는 여전히 150만원이었다. 압도적이지 않았다. 경쟁사 60개와 비슷비슷하게 가고 있었다.

그날 밤
2015년, 첫 VC 투자를 받았다.
홍대에서 열린 피칭 행사였다. VC가 저녁 먹자고 했다. 박현호는 거절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까 다음에 보자고 했어요.”
VC는 의외였다고 한다. “이렇게 피하는 경우는 처음 봤대요.”
오히려 그게 호기심을 불렀다. “저 팀은 뭐길래 거절할까?” VC가 그를 설득했다. 동문파트너즈, 7억.
사무실을 옮겼다. 직원들을 채용했다. 기업문화는 무너졌다. “좋은 분들이 들어오면 알아서 다 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돈은 1년도 안 돼서 바닥났다.
어느 날 밤. 통장을 들여다봤다. 내일 프리랜서들에게 2천만 원을 입금해야 했다. 돈이 없었다.
“맨날 돈 빌리러 다녔어요.”
대출도 안 됐다. 신용등급이 회복된 게 아니었다. 많은 직원들이 나갔다. 핵심 팀만 남았다.
그날 밤, 박현호는 생각했다.
“사용자들이 미리 충전하게 하면 어떨까?”
크몽캐시
2주 만에 만들었다.
100만원 충전하면 10만원 보너스. 200만원 충전하면 20만원 보너스.
사람들이 충전하기 시작했다. 돈이 들어왔다.
그리고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사용자들이 경쟁사로 가지 않았다. 이미 크몽에 100만원, 200만원이 쌓여있으니까. 써야 했다. 락인 효과였다.
“그때 이런 캐시를 운영하는 플랫폼은 저희밖에 없었어요.”
절박함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결정적 무기가 됐다.
“그 이후에도 저희 통장에는 항상 돈이 많이 있었어요. 투자를 받아도 되지만 안 받아도 상관없는 포지션이 됐죠.”
경쟁사 60개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 달에 1500만원
2016년, 박현호는 홍대의 어두운 5층 사무실을 방문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아이디어스 김동환 대표가 3-4명과 일하는 곳이었다. 성과는 크몽보다 훨씬 좋았다.
김동환이 말했다. “요즘 SNS 광고에 한 달에 1500만 원씩 써요.”
충격이었다. 크몽은 광고를 안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광고를 시작했어요.”
2016년, 크몽은 가장 빠른 성장을 했다.
갑자기
2017년 7월, 알토스벤처스가 왔다. 30억. 같은 해 11월, 일 거래액 1억 원 돌파. 2018년, 110억 추가 투자. 누적 300억.
“그때 IR을 따로 안 했어요. VC들을 만나러 다니지 않았죠. 알토스에 매달 리포트만 보냈어요. 빠르게 성장하는 걸 보고 쉽게 투자받았습니다.”
“저희는 항상 투자를 받아도 되지만 안 받아도 상관없는 포지션이었어요.”
경쟁사 60개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2021년, 312억 원. 4년간 거래액 10배 성장. 2025년, 연 거래액 1조 원에 육박. 회원 300만 명. IPO 준비.
대기업들도 포기했다. 그 사이 크몽은 압도적 1위가 됐다.

극복한 적이 없습니다
2025년 12월 12일, 서울 코엑스.
박현호가 무대에 섰다. 청중들이 물었다. 어떻게 그 많은 실패를 극복했냐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극복한 적이 없습니다.”
청중들이 술렁였다.
“저는 그냥 이것 자체가 즐거웠어요. 새로운 걸 만들고 도전하는 것 자체를 즐겼어요. 사실 힘들었던 적은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힘듭니다.”
청중들이 웃었다.
“그때는 새로운 것들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너무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제가 하기 싫은 일들도 해야 되잖아요. 피플 매니징도 해야 되고, 심지어는 국정감사에도 가고.”
“그래서 오히려 지금이 더 힘들지, 그때 어려웠던 그 과정은 저는 되게 즐거웠습니다.”
결핍이 혁신을 만든다
“항상 투자받고 나서 위기가 왔어요.”
박현호는 말을 이었다.
“돈이 많고 사람이 많으면 핵심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 해선 안 되는 일들을 하게 됐죠. 그럴 때마다 위기가 왔습니다.”
“반대로 힘들 때 핵심 본질에 집중했을 때 큰 성장을 했어요. 항상 그런 반복이었습니다.”
2021년 코로나 때, 다들 돈을 빠르게 쓸 때 크몽은 조용히 갔다. “왜 돈을 안 쓰냐”는 질문을 받았다. “저희는 원래 하던 대로 하겠다는 신념으로 일했어요.”
2025년 지금, 다들 조심할 때 크몽은 확장하고 있다.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직원 130명. 다른 법인으로 새로운 사업들도 하고 있다.

2010년 가을, 전기가 끊기고 화장실 물이 안 내려가던 오피스텔. 그가 짐을 쌌던 이유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이 30분 되다 끊기는 지리산. 그곳에서 일한 이유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였다.
2주 만에 급조한 사이트. 목표는 월 150만원이었다.
다음날 입금할 돈이 없던 밤. 그날 생각한 크몽캐시가 모든 걸 바꿨다.
경력자 대신 주니어를 뽑은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다. 그들이 지금 크몽의 핵심이 됐다.
리소스가 없어서. 선택지가 없어서. 급했기 때문에.
결핍이 혁신을 만들었다.
14년 전 지리산 작은 방에서 만든 사이트는 이제 한국 최대 재능마켓이 됐다. 전기가 끊겼던 남자의 통장에는 이제 항상 돈이 있다. 신용등급 10등급에서 1등급이 됐다. 빚 수억 원은 사라졌다.
하지만 박현호는 말한다.
“극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즐거웠어요.”
12번째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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