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상하이가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미래

장장(張江), 실험하고 집적하고 선언하는 공간

2024년 9월 3일 저녁, UN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통근열차인 상하이 마글레브를 타고 푸둥 공항 방면으로 향했다가, 방향을 틀어 장장 과학성(張江科學城)으로 들어섰다. 그날 오후 그가 둘러본 곳은 위위안(豫園)의 고풍스러운 정원도, 황푸강 야경도 아니었다. 최신 기술 혁신의 현장이었다.

정상급 인사가 상하이를 방문할 때 장장을 들르는 일은 이제 거의 프로토콜이 되었다. 2019년 리커창 전 총리가 AI 아일랜드에서 3D 원격의료 기술을 시찰했고, 2023년 시진핑 주석이 이곳을 찾아 인재 양성을 강조했다. 중국이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장장이라는 공간을 읽어야 한다.

농지 위에 쌓은 32년

1992년 7월, 상하이 푸둥의 농지 위에 ‘장장 고신기술원구’가 문을 열었다. 당시 17km². 그로부터 32년, 이 공간은 220km²의 과학성으로 팽창했다. 13배에 가까운 물리적 확장이지만, 본질은 다른 데 있다.

2024년 기준, 연간 매출 1.32조 위안. 푸둥 산업생산의 절반이 여기서 나온다. 24,800개 기업 중 고기술기업이 1,930개, 상장사가 105개다. 50만 명이 일하고, 그중 석사 이상이 10만 명이 넘는다. 집적회로 산업만 2,947억 위안으로 중국 전체의 1/5을 차지한다.

숫자는 결과일 뿐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 공간이 혁신을 ‘설계’하는 방식이다.

혁신을 설계하는 세 가지 방식

장장 과학성 안에는 성격이 다른 여러 클러스터가 공존한다. 언뜻 보면 그저 첨단산업단지의 나열 같지만, 들여다보면 각각 다른 논리로 설계된 공간들이다. 실험, 집적, 선언.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장장의 설계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실험의 공간: AI 아일랜드

장장 한복판에 ‘인공지능 섬’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면적 6.6만㎡, 서울 여의도 IFC몰보다 작다. 세 면이 물로 둘러싸인 반도 지형인데, ‘섬’이라는 이름은 지형보다 기능을 말한다. 섬은 격리된 공간이다. 바깥 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실험할 수 있는 곳.

이곳은 중국 최초의 “5G+AI 전체 시나리오 상용 시범 단지”다. 스마트 쓰레기통(분류 정확도 95%), 수중 무인선, 순찰 로봇, 환경 모니터링 가로등… 30개 이상의 스마트 시나리오가 이 작은 섬 안에서 먼저 테스트되고, 검증된 후 바깥으로 퍼진다.

이 작은 섬에 어떤 기업들이 ‘입도(入島)’했는지를 보면 그 위상이 드러난다. IBM은 중국 연구개발본부를 이곳에 뒀고, 마이크로소프트는 AI&IoT 실험실을, 인피니언은 대중화구 본사를 세웠다. 알리바바의 반도체 자회사 핑터우거, 안면인식 유니콘 클라우드워크도 이웃이다. 100여 개 기업, 7,000명이 이 섬에서 일한다.

2020년, 장장그룹은 “섬에서 구역으로(由島變區)”라는 콘셉트를 발표했다. 6.6만㎡의 섬을 150만㎡의 집적구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이다. 실험이 성공하면 스케일업한다. 섬은 그 실험의 첫 단추였다.

집적의 공간: 로보틱스 밸리

AI 아일랜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장 로보틱스 밸리가 있다. 2020년 개장, 면적 3.9km². 여기서 기억할 문장이 하나 있다.

“세계 로봇의 1/3이 중국에서 생산되고, 중국 로봇의 1/3이 상하이에서 나온다.”

로보틱스 밸리는 이 문장의 물리적 구현이다. 80개 이상의 로봇 기업, 2023년 기준 연간 생산액 221억 위안. 2025년 목표는 700억 위안이다.

이곳의 앵커 테넌트는 스위스의 ABB다. 2023년 10월, ABB는 아시아 최초로 ‘생명과학 및 헬스케어 로보틱스 오픈 이노베이션 랩’을 이곳에 열었다. 재활 로봇의 푸리에 인텔리전스는 휴머노이드 로봇 GR-1을 양산하며 주목받고, 가우스로봇은 상업용 청소 로봇 분야를 선점했다.

AI 아일랜드가 ‘실험’의 공간이라면, 로보틱스 밸리는 ‘집적’의 공간이다. 같은 산업의 기업들을 한 곳에 모아 공급망을 단축하고, 인재풀을 공유하고, 기술 이전의 마찰을 줄인다. 인접한 장장 의료기기 산업기지, 상하이 국제의학원과의 시너지로 ‘연구-생산-응용’이 한 권역에서 순환한다.

선언의 공간: 과학의 문

장장의 스카이라인을 바꿀 건물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과학의 문(科學之門)’이라 불리는 320m 쌍둥이 타워다. 상하이 최고 높이의 쌍둥이 빌딩으로, 서탑은 2025년 1월 준공 검수를 마쳤고 동탑도 같은 해 완공 예정이다.

두 타워 모두 59층, 완전한 대칭. 연면적 각 17~18만㎡. 이 타워를 중심으로 8개 지구, 136만㎡의 복합 CBD가 형성된다. 총투자액 200억 위안 이상.

‘과학의 문’은 실험도 집적도 아닌, 선언의 공간이다. 건축은 그 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상하이가 금융의 심장 루자쭈이에 이어 과학기술의 심장을 장장에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름 자체가 초대장이다. “여기가 입구다. 여기서 시작하라.”

개방과 자립의 역설

장장은 중국이 기술 주권을 주장하는 방식의 물리적 구현이다. 집적회로, 바이오의약, 인공지능 — 이른바 ‘목 조르기(卡脖子)’ 기술 분야에서 자급자족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전략의 핵심 거점이다.

그런데 이 공간은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기도 하다. 286개 외국 R&D센터, 70개 다국적 본사, 181개 외자 연구기관이 입주해 있다. IBM, 마이크로소프트, ABB, 인피니언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 파트너와 협업하고 중국 시장을 테스트한다. 2025년 12월에는 스위스와 공동으로 ‘중-스위스 국제 콘셉트 검증센터’가 문을 열어 바이오·의료기기·마이크로전자 분야의 성과 이전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자립과 개방. 이 두 방향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장장에서는 공존한다. 중국은 외부의 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되, 그것이 자국 생태계 안에서 순환하도록 설계했다. 마이크로소프트 AI&IoT 실험실은 지난 1년간 300개 이상 기업을 지원했고, 2025년까지 5,000개 중소기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그 수혜 기업 대부분은 중국 기업이다.

한중 스타트업 교류가 재개된다면, 첫 번째 목적지는 어디가 되어야 할까.

선전이 ‘하드웨어의 할리우드’라면, 항저우가 ‘전자상거래의 수도’라면, 상하이 장장은 ‘딥테크의 실험장’이다. 반도체, 바이오, AI, 로봇 — 하드코어 기술 분야에서 연구개발과 사업화의 접점을 찾는 곳이다.

한국의 바이오텍, 반도체 장비, 로봇 스타트업이라면 이 생태계와 접점을 만들 여지가 있다. ABB 로보틱스 랩은 의료·바이오 기업에게 로봇 기술 접목 기회를 제공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실험실은 AI 스타트업의 기술 고도화를 돕는다. 이런 플랫폼에 한국 스타트업이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문이 언제까지 열려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에필로그

장장(張江)의 ‘張’에는 ‘펼치다’라는 뜻이 있다. 17km²가 220km²가 되고, 6.6만㎡의 섬이 150만㎡의 구역이 되는 동안, 이 공간은 말 그대로 펼쳐졌다.

구테흐스는 그날 저녁 장장을 떠나 베이징행 열차에 올랐다. 그가 창밖으로 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32년 전 농지였던 곳 위로, 320m 쌍둥이 타워가 서서히 불을 밝히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현장 중심으로 취재하며, 최신 창업 트렌드와 기술 혁신의 흐름을 분석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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