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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5. 영화투자의 시작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벤처캐피탈은 장기투자이다. 뿌려놓고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투자에서 회수(Exit)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렇게 긴 투자여정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1999년 중순 KTB 민영화 이후 복권부는 해체되고 난 신규업무팀에 배속되었다. 회사에서 기존에 투자하지 않았던 분야를 발굴해서 투자를 하는 팀이다. 드디어 꿈은 이루어졌다. 1순위 신규 투자영역이 영화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영화판에 뛰어 들었다. 먼저 영화인들과 비슷하게 보이려고 머리를 노란 색으로 물들였다. 회사 규정상 넥타이를 매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맘대로 노타이로 출근했다. 가끔은 가죽바지도 입고. 퇴근 하면서는 자연스럽게 오른쪽에 귀고리를 달았다. 안경도 오렌지색 뿔테 안경으로. 영혼이 자유로워 지는 것 같았다.

충무로를 누볐다. 의례 본격적인 업무는 충무로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시나리오가 물밀 듯 들어왔다. 그래도 첫 투자는 비교적 안정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영화배급을 공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던 CJ 엔터테인먼트와 영화 5편 패키지 투자 Deal을 협의했다. 총 투자금액은 35억원. 그래서 투자한 영화가 킬리만자로(박신양, 안성기 주연), 공동경비구역 JSA(이병헌, 송강호 주연), 봄날은간다(이영애, 유지태 주연), 무사(정우성, 장즈이 주연), 베사메무쵸(전광렬, 이미숙 주연) 이다. 

2000년 5월 나의 첫 투자영화 ‘킬리만자로’가 개봉했다. 박신양이 1인 2역을 하는 범죄 액션 느와르 분위기의 영화였는데 힘도 써보지 못하고 망했다. 3억원 투자에 1.8억원만 건졌을 뿐이다. 역시나 VC에서 나쁜 소식은 먼저 오는 법이다. 우리 팀을 바라보는 경영진의 시선이 따갑다. 영화도 거무튀튀 하고 무거운데 돈 까지 잃었으니 KTB의 첫 투자영화 치고는 뽀대가 안난 것이다.

사실 첫 투자영화로 추진했던 영화는 전도연, 최민식 주연의 ‘해피엔드’ 였다. 그런데, 에로물을 회사의 첫 투자영화로 해서는 안된다는 자발적(?) 검열에 굴복 결국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에 올리지도 못했다. 그 당시 작성했던 한 페이지짜리 메모를 꺼내 보니 새롭기만 하다. 

해피엔트 투자검토 의견서

그래도, ‘번지점프를 하다'(이병헌, 이은주 주연)를 투심위에 올렸을 때 동성애 영화에 어떻게 투자하냐는 거센 반발도 있었지만, 그건 동성애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며, 퀴어(Queer) 영화가 향후 영화 트렌드의 하나로 자리 잡을 거라고 열띤 논쟁(?)을 한것에 비하면 ‘해피엔드’의 자발적 검열은 향후 더 큰 것을 위한 일보 양보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여튼, 망한 ‘킬리만자로’를 뒤로 두고 개봉한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당시 1999년까지만 해도 박찬욱 감독은 ‘3인조’, ‘심판’ 이란 두 영화를 말아먹은(?) 감독이었다. 또한, 주연 이병헌도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런어웨이’, ‘그들만의 세상’, ‘지상만가’ 등 연속 네편에서 흥행 참패를 맛 본 비흥행배우의 대표주자 였다. 이 영화에 투자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이영애가 나오긴 하지만 이영애 역시 그 당시엔 비흥행배우였고, 러브라인과 섹스코드도 없는 무명 감독의 영화! 

그래도 킬리만자로 투자금액 3억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8억원 금액을 배정했다. 왜 JSA에 8억원씩이나 투자금액을 올렸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접속’을 제작한 ‘명필름’의 제작능력을 믿었고, 무엇보다도 시나리오의 힘을 믿었다.

첫 실패 뒤에 성공은 비교적 빠르고 크게 왔다. JSA는 최종 21억원(수익률 260%) 이상 벌었다. 내 인생에서 투자로는 첫 성공사례이다. 비교적 이른 흥행작으로 난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좀 더 영화판을 휘졌고 다니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는 JSA 개봉 전에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지만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멋모르고 교만했던(?) 투자는 강제규필름에 한 57.5억원이 아니었나 싶다. 지분 20% 취득에 57.5억원, Post Money(투자후 시가총액) 기준 287.5억원. 아무리 1999년도에 개봉한 ‘쉬리’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더라도 99년 매출이 69억원에 불과했고 일시적인 흥행이익에 너무나 높은 PER(주가수익비율)를 적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자가 이루어진 2000년도에는 닷컴버블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라 경쟁사로 뽑은 Disney, Time Warner, Fox 등은 거의 PER가 50을 넘고 있었다(국내 상장된 경쟁사가 없어 해외 영화 배급사를 경쟁사로 PER를 추산함).

인터넷의 신기루가 콘텐츠 영상산업에도 뭔가 혁명을 일으킬 것 같았다고나 해야할까? 그래도, ‘강제규’ 라는 1인 셀레브리티 회사에 거액을 그것도 본계정(펀드가 아닌 회사 자본계정)으로 투자하는 투심위 의사결정은 ‘킬리만자로’ 영화에 3억원 투자하는 투심위 보다 훨씬 수월하게 끝이 났다.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판에 이름을 박고 싶어 했던 오너 권성문 대표의 영향때문이었다고 할까? 그 후 권대표는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 칸(Cannes)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하여튼, 강제규필름에 거액을 투자한 투자사의 담당자로 난 더 어깨에 힘이 들어 갔다. 영화인들과의 술자리도 제법 많아 졌다. 매일 술 독에 빠져 지냈다. 속은 썩어 들어갔고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그러는 사이 강제규필름은 투자금액으로 인터넷영화 포탈을 하겠다고 투자했다 거금을 날렸고, 이후 제작한 영화 ‘단적비연수’, ‘베사메무쵸’도 연속으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금고가 바닥나고 사세가 기우는 것은 한순간 이었다. 기쌘 강제규 감독을 만나 그 아우라(Aura) 눌려 제대로 관리 못한 내 잘못이 컸다. 강제규 라는 단물에 꼬인 파리떼도 단속을 잘 못했으니. 20대 후반,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훗날 강제규필름은 타 영화사와 합병하여 코스닥에 뒷문 상장하였고, KTB는 투자금을 회수한 바 있다).

그리고, 2001년 초 난 인터넷투자팀으로 휙 던져졌다. 

1997년 KTB 네트워크에서 벤처캐피탈에 입문한 후 현재 코그니티브인베스트먼트를 설립 및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스타트업을 위한 고품격 투자상담 토크쇼 “쫄투! 쫄지말고 투자하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교육에 관심 많아 예비 창업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창업교육 프로그램인 “쫄지마! 창업스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그 동안 플래텀에 연재한 글과 새로운 창업이야기를 담은 ‘쫄지 말고 창업(이콘출판)’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벤처캐피탈, 창업, 스타트업, 기업가정신 등에 관심이 많아 개인적으론 그쪽 분야를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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