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트렌드

폐허 속 씨앗, 벤처 투자의 구조적 미로

우리는 가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 디지털 경제라는 거대한 혁명의 물결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 그 물결의 첨단에는 항상 벤처 투자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묘한 역설 앞에 서 있다. 세계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3월,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디지털경제연구원이 발간한 이슈페이퍼를 보면 벤처 투자의 민낯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국내 벤처 투자는 2024년 약 11조 9,457억 원으로 3년 만에 반등했다. 숫자만 보면 희망적이다. 그러나 이 성장의 이면에는 씁쓸한 진실이 숨어있다. 정부 정책 자금이 11.3% 증가한 반면, 민간 부문 출자는 25.1%나 감소했다. 이것은 자생적 회복이 아닌,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환자의 미약한 맥박 소리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손이 인공호흡기 전원을 끄는 순간, 그 맥박은 언제든 멈출 수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씨앗 뿌리기를 포기한 듯한 투자 패턴이다. 창업 3년 이하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고작 18.6%에 불과하다. 반면 7년 초과 후기 스타트업에는 전체의 53.3%가 집중됐다. 안전한 베팅만을 찾는 투자자들.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가가 아닌, 이미 검증된 길만 따라가는 관광객이 되어버렸다. 모험 없는 투자, 그것은 마치 파도를 두려워하는 서퍼와 같은 모순이다.

벤처기업의 총체적 규모 역시 감소세다. 2024년 1분기 4만 개까지 증가했던 국내 벤처기업 수는 ‘연구개발’과 ‘혁신성장’ 분야에서 각각 999개, 1,591개가 감소하며 2025년 1월 기준 약 3만 8천 개로 축소됐다. 혁신의 주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적막한 풍경. 이것은 국가 경쟁력의 서서히 식어가는 체온계와도 같다.

특히 연구개발 유형과 혁신성장 유형의 기업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연구개발 유형은 기업부설연구소를 보유하고, 연간 연구개발비가 5,000만 원 이상이며, 총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이 5% 이상인 중소기업들이다. 혁신성장 유형은 기술의 혁신성과 사업의 성장성이 우수하다고 평가받은 기업들이다. 즉,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들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숲에서 새싹이 사라지는 현상과도 같다. 당장은 숲의 모습에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숲은 결국 노화하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다르다. 크런치베이스의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AI 투자는 2024년 1,010억 달러(약 146조 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80% 이상 증가했으며, 전체 벤처 투자의 30.6%를 차지한다. 세계는 AI라는 미지의 대륙을 향해 용감하게 항해하는 동안, 우리는 익숙한 해안선을 맴돌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80%라는 급증의 의미다. 이것은 단순한 증가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세계의 자본은 AI가 가져올 혁명적 변화에 베팅하고 있다. 그들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과감히 자원을 투입한다. 반면 우리의 자본은 안정과 확실성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벌어질 것이며, 그 결과는 디지털 경제의 주도권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벤처 투자의 구조적 한계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경제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심각한 균열이다. 초기 창업 투자의 감소와 민간 자금의 위축은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길한 신호다. 마치 겨울을 앞두고 식량을 비축하지 않는 마을과 같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 그 대가는 참혹할 것이다.

구조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우리의 디지털 경제는 결국 글로벌 흐름에서 낙오된 채, 역사의 변방에서 서성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몇몇 기업의 실패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장기적 쇠퇴를 의미한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뒤처진다는 것은, 산업혁명 시대에 수공업에 머무르는 것과 다름없다.

폐허 속에서도 싹을 틔우는 씨앗들이 있다. 혁신을 꿈꾸는 창업자들, 미래를 준비하는 연구자들, 불확실성에도 도전하는 기업가들. 그러나 그 씨앗들은 적절한 투자라는 물과 햇빛 없이는 결코 자라날 수 없다. 투자의 겨울은 이미 오래 지속되었고, 그 겨울이 길어질수록 살아남는 씨앗은 줄어들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벤처 투자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다. 단순한 정책 자금의 확대가 아닌, 민간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초기 창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 혁신 기술에 대한 선제적 지원, 실패를 용인하고 재도전을 장려하는 문화적 토양. 이 모든 것이 갖춰질 때, 우리의 디지털 경제는 비로소 글로벌 흐름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 투자하지 않는 분야는 내일의 경쟁에서 패배할 것이며, 지금 키우지 않는 씨앗은 내일의 숲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벤처 투자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 그것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우리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적어도 미래의 디지털 경제에서 완전히 도태되는 비극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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