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결혼할 여자한테는 투자 안 해”, 스타트업계 미투
‘미투(Me Too)’가 ‘나도 당했다’는 고발의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작년 10월부터다. 미국의 영화제작자 하비 와이스타인(Harvey Weinstein)의 성추문 파문이 도화선이 됐다.
그리고 지난 1월 26일,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부 통신망 이프로스(e-Pros)를 통해 8년 전의 성폭행 사건을 폭로했다. 이 파장은 각계각층으로 번져나갔다. 2016년 국내 SNS를 통해 진행됐던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연장 선상이었다. 문학계, 정계, 교육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폭로가 이어졌다.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분야가 이처럼 각기 다른데도, 가해자와 피해자 간 관계는 대부분 유사했다.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구도. 이는 미투 운동에 동참한 임은정 서울북부지검 부부장검사의 말과 같이 “성폭력이 성별이 아닌 갑을, 상하,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계의 상황은 어떨까? 용기있는 업계 내 여성 종사자들로부터, 그들이 겪었던 성차별 경험을 들어봤다.
■ 남성 투자자 – 여성 창업자 : “난 결혼할 여자한테는 투자 안해”
여성 창업자 A씨는 어느 네트워킹 자리에서 통성명도 안 한 남성 투자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결혼할 거야? 난 결혼할 여자한테는 투자 안 해.”
애초에 투자자와 창업자 간 관계는 동등하기 어렵다. 선택하고, 선택받는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투자 제의를 여럿 받아 역으로 선택권을 손에 쥐고 있는 창업자는 많지 않다. 특히 초기 투자를 받으러 다니는 창업자에게 투자자는 어려운 상대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창업자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점은 불평등의 막이 또 한 겹 덧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벤처 투자계는 약 90% 이상이 남성으로 구성된 남초 집단이기 때문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여성 투자 심사역은 57명으로, 전체 747명 중 7.1%를 차지했다.
‘결혼할 여자한테는 투자 안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A 대표는 그 순간 투자자가 자신을 한 사람의 사업가로 여기지 않음을 깨달았다. A 대표는 ‘결혼 여부가 왜 한 창업자의 걸림돌로 여겨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임신한 상태로 투자자에게 IR(투자가를 위한 홍보)을 하던 B 대표는 ‘그럼 애는 누가 보냐?’는 질문을 받았다. 자녀의 출산을 앞둔 남성 창업가도 투자자에게 같은 질문을 받을까?
대놓고 스폰 제의를 한 투자자도 있었다. 강남 오피스텔 전세, 월 생활비 얼마, 투자금은 곧 스폰 비용. 조건은 아주 상세했다. 피해자가 스스로 공범자이길 선택하게 만드는 교묘한 수법이다.
창업에 도움을 주겠다고 다가온 멘토마저도 성희롱의 가해자로 얼굴을 바꿨다. 멘토라 자칭한 한 심사역은 “다른 여성 대표는 자신에게 강간 판타지가 있다면서 나를 꾀더라”, “너 때문에 오늘 밤엔 잠 못 자겠다” 면서 노골적으로 들이댔다. A 대표가 “현명하게 판단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대표님”이라고 말을 끊자, “아 이렇게 밀어내는군요”라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러한 언어 성희롱은 가해자가 ‘한 번 꼬셔보고, 아니면 말고’ 식이기 때문에, 피해자조차 이를 성희롱으로 구분하는 데 혼란을 겪는다고 A 대표는 말했다.
■ 남성 창업자 – 신입 여사원 : “미팅 갈 때는 꼭 화장하고, 예쁘게 입어줘”
C 씨는 20대 초반 한 스타트업의 마케터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역할은 타 기업 매니저, 대리, 과장급 인사를 만나 영업을 하는 것이었다. 대표는 외부 미팅에 동행할 때마다 “미팅 갈 때는 꼭 화장하고 예쁘게 입어달라”고 말했다. 초년생이었던 C 씨는 자연스럽게 “나의 외향이 곧 회사의 이미지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영업 미팅을 빙자해 대표는 수많은 술자리에 C 씨를 불러냈다. ‘이렇게 예쁘장한 신입은 어디서 뽑을 수 있냐’, ‘이런 신입이 있으면 나도 일할 맛 나겠다’는 말이 C 씨의 앞에서 오갔다. C 씨의 사례는 낯설지 않다. SNS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패턴이기 때문이다.
1년 뒤 C 씨는 운 좋게 타 기업의 매니저로 영입됐다. 남자 이사는 C 씨에게 유독 친절했다. 친절은 도를 넘어 퇴근 후 매일 밤 전화를 걸어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어디냐’, ‘누구랑 있냐’, ‘남자는 나 빼고 다 늑대다’라는 말이 수화기를 넘어왔다. 처음 정규직으로 근무한 회사이기 때문에 C 씨는 늘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도가 점점 심해지자, 윗선에게도 문제를 털어놓았지만 ‘네가 어리고 귀여워서 그런 것’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결국 C 씨는 스스로 퇴사를 선택했다.
C 씨 역시 두 번째 회사에 다니며 스폰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남성 창업자들은 C씨가 홍보 직이라는 점을 이용해 미팅 약속을 잡고는, ‘나 얘랑 밥 먹기로 했다’는 식의 유치한 자랑을 서로 늘어놓기도 했다. 미팅 때 C 씨가 아닌 남자 직원이 나가면 개인 번호로 연락해 ‘남자 매니저가 미팅에 나와서 일할 마음이 없어졌다’고 투정을 부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C씨의 사례에 대해 ‘외모에 대한 순수한 칭찬이 성차별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외모에 대한 칭찬도 성차별이 될 수 있다. 2013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녀는 뛰어나고 헌신적이며, 강한 사람이다. 게다가 가장 출중한 외모(best looking)를 지닌 법무장관이기도 하다.”
이 발언이 SNS에 퍼지면서, 오바마 전 대통령은 ‘성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즉각 실수를 인정했고, 해리스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칭찬에는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일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외모에 대한 특정한 평가가 오고 갈 필요가 있을까.
‘좋아하는 이성에게 호감을 표시한 것인데, 그것이 왜 성차별이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동의 여부다. 위의 사례 속 남성들은 모두 자신의 호감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C 씨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았다. 위계 관계 속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상대방의 명확한 동의 의사가 없다면, 단순한 호감 표현마저도 성폭력으로 간주한다. 프랑스의 일간지 <I’express>는 이런 논평을 내기도 했다.
대다수 남성으로 구성된 일터의 위계질서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높은 확률로 쉽게 거부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약자에 입장에 놓여 있다.
여성의 답변이 없었다면 그건 거부 의사의 표시로 봐야 한다.
만약 여성이 원했다면 그들은 ‘예스!’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존재들이다.
‘예스’라고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 남초 업계 – 기혼 유자녀 여성 : “왜 모든 네트워킹 모임은 이른 아침이나 밤에 열리나요?”
남성과 미혼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업계의 시간으로부터 기혼 유자녀 여성이 소외당하는 경우도 생긴다. 여성 창업자 D 씨는 ‘한국 스타트업 업계에서 육아 책임자로서 가장 힘든 것은 모든 네트워킹 모임이 밤이나 이른 아침에 열린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D 대표는 ‘그나마 밤 모임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는데, 조찬 모임은 정말 대안을 만들기 쉽지 않다. 참석하려면 전날 아이를 시댁에 맡겨야 하는 등 가족 전체가 희생해야 한다’고 털어놨다.
실제 창업계에 있는 유자녀 기혼 여성은 주로 출근 전과 퇴근 후에 편성되어 있는 업계 내 모임에 참석하기 어렵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가정의 경우 이 시간대에는 양육자 중 한 명이 반드시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여성이 그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통계청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의 육아 포함 가사노동 시간은 여성이 3시간 13분, 남성이 41분으로 여성이 5배 가량 높았다.
그러나 D 대표는 이것을 여성만의 문제로 국한시켜 볼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남녀 모두의 문제다. 육아를 전담하는 남성, 싱글 대디 등도 충분히 같은 문제를 겪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참석할 수 있는 시간대에 다수의 모임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업계 문화 자체가 과도하게 기혼 남성과 미혼자 편의 위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창업계 내에도 점차 양육과 일을 병행하는 구성원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들을 위한 구조적 개선의 의지 없이, 출산과 양육을 개인의 마이너스 요인으로 평가하는 현재의 셈법은 불평등하다.
■ ‘가해자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업계의 자정 능력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
작년 말, 온라인 모임 플랫폼 O사의 성추문 논란은 창업계를 들썩이게 했다. 이를 계기로 업계 내 여성들의 용기있는 목소리가 SNS를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좁은 세계에서 자신이 겪은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가해자가 아직도 업계 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D 대표는 “과거 성희롱과 성추행을 저질렀던 가해자들이 아직도 창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그게 죄인지, 심지어 자신이 가해자인지조차 모를 것”이라고 털어놨다.
과거 업계 종사자였던 E 씨는 “업계 자정을 기대하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 실무자들끼리 상습적인 가해자 리스트를 공유해 사석에서 피하기라도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피해자를 꽃뱀이나 무고죄 처벌 대상자로 몰아가는 문화 역시 업계 내 자정을 더디게 하는 한 요소다. A 대표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은 피해자를 마치 스타트업 생태계 파괴의 주범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면서,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으려는 구태를 버리고, 실질적인 생태계 악화의 원인이 위력과 위계를 악용하려는 남성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인지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