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국인2018] “계획할 시간에 실행했다” 신동현 덱스트리 대표
“사업은 최단기간을 찾는 루트이기도 하지만, 여행의 과정과도 같다. 그렇게 7년 간 창업자로 살았다. 덕분에 시장변화로 봤고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신동현 덱스트리 대표는 2005년 NHN주재원으로 중국과 인연을 맺고, 2011년 사직서를 내고 현지서 모바일 IT업체 덱스트리(Dextree)를 설립하며 창업자의 길을 선택했다. 신 대표는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고 있는 애플 아이폰 기반의 애플리케이션 개발 시장에서 기회를 발견했다. 하지만 큰 그림만 그렸을 뿐 세부적인 채색은 창업을 하며 해결해 나갔다.
23일 스타트업 얼라이언스와 플래텀 공동주최로 네이버 그린팩토리에서 열린 제 3회 중국의한국인 행사에서 신 대표는 자신의 경험담을 공유했다.
큰 그림만 그렸다. 나머지는 하면서 생각했다.
목표점으로 가는 것을 생각해 봤다. 월급이 끊어져도 나를 스스로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그것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아이템을 골랐다. 첫 아이템 선정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사실 무모한 일이었다. 남은 잔고를 다 쓰고 바닥까지 간 다음에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그러면서 창업을 준비했다.
첫 사업은 교육 소프트웨어를 제작한 것이었다. 큰 방향만 정해놓고 세부적인 것은 하면서 결정했다. 관건은 사람을 뽑는 일이었다. NHN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직원을 뽑는게 쉬운 일인줄 알았다. 채용공고만 내면 인재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명의 스타트업이 인재를 뽑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더라. 아무도 안 왔다. 하지만 눈은 높았다. 북경대 졸업생을 소개받아 면접을 봤다. 그 친구는 뭘 믿고 자신을 뽑으려고 하는지 의아해 하더라. 창업 초기 멤버는 사업을 하면서 찾게 되었다.
2010년에는 앱 개발자 자체가 적었다. 시장기회라고 봤다.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려 시장에 뛰어들기 전에 컴퓨터 학원을 열기로 했다. 사실 나는 개발자 출신이 아니다. 회사 다닐때는 프로덕트와 사업기획을 했었다. 다만 모바일 붐이 일어서 프로그래밍을 독학으로 공부했을 뿐이다. 그런 실력으로 북경에 코딩학원을 열었다. 아이폰 앱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려 학생을 모집다. 강의도 직접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학생들도 힘들었을거다.
나 스스로에게는 재미있는 과정이었지만 6개월을 넘기진 못 했다. 앱 개발이란 시장기회는 나만 본게 아니었다. 큰 플레이어들이 들어오더라. 기숙사형 대형 학원도 생겼고 시간대비 가격도 저렴했다. 나는 그들처럼 해서는 채산성을 맞출 수 없었다. 사업성이 없어진거다. 하지만 목표 하나를 달성했다. 초기 멤버를 수강생 중에서 찾은 것이다. 그 인재들을 통해 다른 직원도 들어왔다. 그 인재들과 함께 조직을 꾸렸다. 중국에서 사업 시작이다.
당시 중국에 개발력 있는 회사가 많지 않았기에 외주를 수주하는 게 용이했다. 사업을 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투자유치를 생각했지만, 남의 돈을 받는 것은 족쇄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왠만하면 안 받으려 했다. 외주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시간도 절반 정도는 프로덕트에 쓰고 나머지는 사업유지를 위해 배분했다.
실패 실패 실패…믿을 수 있는 현지 협력자의 필요성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려 처음 시작한 프로젝트는 제작툴을 만드는 거였다. 앞서말했듯이 앱에 대한 수요가 높은데 반해 제작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워포인트와 플레시를 합친 형태의 툴이었다. 언어에 관심이 있어서 외국인이 어려워하는 성조 등을 쉽게 배우는 중국어 교육 앱서비스도 만들었다. 제작툴은 몇몇 광고회사와 앱개발사와 제휴해 소득도 냈다.
하지만 실패했다. 혼자서 잘났다고 해서 되는 시장이 아니더다. 특히 중국에서 B2B를 하려면 좋은 협력사와 현지 합작이 필요했다. 툴을 잘 만들면 기업이 앞다투어 돈을 주고 쓸줄 알았다. 하지만 당시 중국기업은 소프트웨어에 돈을 내는 습관이 없었다. 한편으로 쓸 때는 화끈하게 썼다. 하지만 그전에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또 한번 회사에서 쓰기 시작한 프로그램은 잘 안 바꿨다.좋은 현지 파트너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그리고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투자자에 대한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이후 핀테크 프로그램을 만들며 칭화대로부터 투자유치를 했다. 앞선 상황과는 다르게 왕징에 있는 좋은 건물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돌발사항이 발생했다. 서비스 론칭을 하는 날 시진핑 주석이 반부폐개혁을 말하더라. 우리 핀테크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칭화대 부학장이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방침에 걸렸다. 중국에서 관과의 관계가 좋아야 함을 깨달았다.
관과의 합작을 고민했다. 우연에 가까운 인연이 되어 현지 파트너와 함께 중국 여행지를 360도 VR영상으로 만드는 민·관 합동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손을 잡은 사람은 사업을 크게 키울 줄 알더라. 중국어로 ‘꽃을 빌어 부처에게 봉헌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돈을 안쓰고도 여기저기 자원을 끌어모아 일을 도모한다는 의미이다. 파트너는 유명 사업가들한테는 관공서와 일한다 말하고, 관공서에는 유명 사업가들과 잘 안다고 강조하며 중간에서 저울추를 맞추며 그림을 크게 그렸다. 그 프로젝트 덕분에 방송에도 나오고 레드카펫도 밟아봤지만 프로젝트 자체가 오래가지 못 했다.
북경과 상해 등 대도시는 바이두나 텐센트 등 큰 기업이 꽉 잡고 있었다. 그래서 3~4선 도시로 가기로 했다. 4선도시에서 어느날 갑자기 부자가 된 메이라오반(탄광주)을 소개받았다. 이 사람의 갈증은 1선도시에 비해 지역의 정보화가 너무 안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은행도 종이로 업무를 본다고 했다. 그는 디지털화에 대한 니즈가 강했다. 그와 손을 잡고 현지합작으로 기업자동화, 디지털화를 같이 진행했다. 대부분의 가훈은 그 집에서 가장 모자른 부분이라고 하잖나. 메이라오반은 지나칠정도로 프로세스를 강조하고 집착하더라. 국영기업, 상장회사 기준으로 일을 했다.
블록체인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다.
최근에 협력모드를 바꿔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IT업계에서 BAT를 피해 파고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기반 언어교육 프로젝트(HAIVE)다. 탈중화된 토큰 보상 언어교육 프로젝트이자 인공지능과 커뮤니티를 결합한 형태다. 몇몇 투자사와 진지한 논의를 진행중이다.
중국생활 13년 차 현지창업 7년차
정리하자면, 나는 준비가 된 상황에서 창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일단 빠르게 실행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랬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코딩 학원을 차리겠다 마음먹은 뒤 커리큘럼과 컴퓨터 세팅 등 제반사항을 2주만에 했다. 다른 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패의 순간, 변화의 순간에 그만두고 싶다는 유혹을 이기고 버티다보니 새로운 기회가 보였다. 살아남아 있으면 기회는 오더라.
한국에서 나름 좋은 대학을 나왔다. 아마 한국에 있었다면 안정된 직장생활을 했을 수도 있을거다. 하지만 계획되어 있는 삶은 매력이 없다고 여겼다. 중국에 와서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여행을 하는 마음으로 중국생활을 하고 있다.
사업은 최단기간을 찾는 루트이기도 하지만, 여행의 과정과도 같다. 잠자리나 음식이 불편할 수도 있다. 끊임없이 공부했고 현지인들 속에서 함께하며 7년 간 창업자로 살았다. 덕분에 시장변화도 봤고 새로운 기회를 잡아 다음으로 길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