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up’s Story #103]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함, 최게바라 기획사 최윤현 대표
최게바라 기획사의 페이스북 페이지 소개글을 보면 ‘최게바라 기획사를 한 줄로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로 되어있다. 직접 만났으니 여러 줄도 괜찮다. 도대체 최게바라 기획사는 뭐하는 곳인가?
최게바라 기획사 소개 요청을 많이 받는다. 할 때마다 막막하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한 줄로 설명하기 어렵다’라고 쓴 이유는, 우리도 계속 우리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어디에 규정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매번 이런 질문을 받을때마다 확실히 정해 놔야겠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아직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개를 한다면 ‘하고 싶은 것을 기획으로 풀어내는 회사’라고 설명하고 싶다. 조금 더 괜찮은 한 줄이 있다면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웃음).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 다시 해보기로 하자. 그나저나 창업은 왜 한 건가?
나는 디벨롭(develop)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아, 이렇게 말하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될 것 같다. 디벨롭(develop)이라는 단어는 ‘성장하다’ ‘발전하다’는 뜻도 있지만, ‘성장시키다’ ‘발전시키다’라는 의미도 있다. 자동사와 타동사 둘 다 되는 거다. 그런데 원래는 자동사에서 시작이 됐다더라. 나도 책에서 본 내용이다(웃음). 다시말해 내가 성장하는 거고, 네가 성장하는 거다. 내가 너를 성장시키거나, 내가 너에 의해서 성장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랬을 때 과연 성장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됐다. 디벨롭(develop)의 반대말은 인벨롭(envelop)인데, 인벨롭(envelop)은 감싸다는 뜻이다.
오, 좀 있어 보인다.
말해놓고 보니 그런 거 같다(웃음). 인벨롭(envelop)이 감싸다는 거라면, 디벨롭(develop)은 드러내다는 의미가 되겠다. 나에게 있어 필요한 성장, 그리고 2014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청춘들에게 필요한 성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잘 드러내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스펙, 학점을 높이고 토익점수를 높이는 건 취업이나 진학에 어느정도 도움이 될 순 있겠지만, 성장의 본질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도 내 안에 있는 자기다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잘하는 지를 끌어내기 위한 여러단계의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기획사 창업은 그 과정 속에 자연스레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친구들 안에 있는 고유의 DNA, 자기다움이라고 하는 것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을 하기 위해 기획사를 시작 했다.
자기다움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창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긴데, 대학 시절 자기다움을 찾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준다면?
내 본 전공은 영어와 경영이다. 그런데 전공과목들 정말 잘 모른다. 그래서 당시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두 가지로 대답을 했다. 하나는 ‘사회와 사람’을 전공했고, 또 하나는 ‘엠티 기획’ 전공이라고 말이다.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신문과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고,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다. 본 전공을 등한시해서 인지 학점이 좋진 않다. 그렇다고 또 엄청 낮은 것도 아니다. 차라리 학점이 특급투수 방어율 수준으로 낮았어야 앞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말이다(웃음).
하긴, 낮다는 생각이 잘 들지는 않더라. 내가 아는 지인 중에는 평점 0.48도 있다. 최게바라가 졌다.
그거 봐라. 이제 학점 낮다는 말은 못하겠다. 내가 밀린다. 아무튼 토익 점수나 학점에 대한 것보다 사람과 사회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한 대학 생활을 보내는 게 내 목표였다.
엠티기획 전공은 뭔가? 학생회 활동을 한건가?
그렇지는 않다. 자발적으로 동아리 엠티나 연합 엠티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걸 많이 했기 때문이다. 시키는 것 보단 시키지 않는 일을 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이처럼 대학 때는 행사도 기획하고 사회도 보고 연애도 하고 여행도 많이했다. 졸업할 때가 되니 내가 이런 걸 좋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조금씩 보이더라. 그런데 그 좋아하는 일이 워낙 광범위 했다. 사람 만나 이야기 하는 것, 행사 기획 하는 것, 여행을 가는 것,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 등이 너무 광범위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어떻게 정체성(?)을 찾았나?
졸업 후에 스페이스노아 전략기획팀장으로 6개월 정도 일을 하게 됐다. 우연히 행사에서 사회를 보게 됐는데, 사회를 꽤 잘 본다고 하더라. 사람들도 좋아해준 것 같고. 물론 내 생각이다(웃음). 그래서 내가 쓴 책으로 여기서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행사 기획을 시작 한거다.
출판 기념회라니? 책 저자였나?
내가 여행을 다녀와서 책을 총 세 권을 썼는데, 출판사를 통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비로 출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럴 돈이 없었다. 집에 있는 프린터로 양면 프린트를 하고, 학교 앞에서 제본한 ‘책’이다. 그리고 무작정 ‘작가 최게바랍니다’ 하고 팔았다. 신기해서 인지 재미있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사긴 하더라. 고무적인 것은 읽어 본 사람이 용기를 내더라는 것이다. ‘아, 이런 애도 책을 쓰는데 왜 나는 못 쓰고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 자극받은 작가 친구들도 몇 있다(웃음). 퀄리티가 중요했다기 보다 냈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한 번 하고 나니까 그리 어렵지 않더라. 물론 기존 출판과는 다른 형태지만 말이다. 그래서 출판 기념회를 열어보면 어떨까 해서 기획을 했는데, 여기에 백 명이 왔다. 심지어 출판사 대표님들도 오시더라. 그 분 말이, 자기가 백 명이 넘는 작가들의 책을 출판 했는데 단 한명도 출판 기념회를 못했단다. 그런데 제본한 책으로 출판 기념회를 한다는 소리에 충격을 받아 한 번 와봤다는 거다. 근데 본인이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쉽고 재밌게 진행된것 같다고 하더라. 잘했구나 싶었다. 그때의 내 목표는 이거였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이렇게도 할 수 있어요.’
그때 찍은(?) 책은 남아있나?
(웃음)절판됐다.
수익은 났나?
손해 안봤을 정도다. 수익이 나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다 술값으로 말이다. 한꺼번에 인세가 백만 원 이렇게 들어오는 게 아니라, 만 원, 이만 원 이렇게 오다보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거더라(웃음). 그 정도만 수익이 났다. 출판기획은 자생력을 테스트 해 본 케이스다. 아무튼 그렇게 했는데 재밌더라. ‘아, 내가 행사 기획을 참 좋아하는 구나!’ 하고 확신을 가졌다.
대학생 때 하는 것과 사회에서 하는 건 참 차이가 크다. 학생 때 반응이 좋았던 것이 사회에선 안 먹힐 확률이 높다. 당연하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니까. 그런데 행사기획은 할 수 있겠더라. 그래서 바로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토크쇼’를 열었다.
기획사 창업을 하기 전 일인가?
맞다. 여기서 일하고 있을 때다.
토크쇼의 주제는 뭐였나?
‘최게바라 불꽃쇼’라는 거다. 지금도 하고 있는 거다.
제목이 불꽃쇼인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교 4학년 때 고민이 깊었다. 대기업 취업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서 부터 뭘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그즈음 나와 생각이 같았던 주변의 친구들이 조금씩 떠났다. 취업을 위해서 말이다. 그때 마음이 너무 외롭더라. 돈이 없고 미래가 불투명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할 누군가가 없다는 게 많이 힘들었다. 그러던 중 스페이스노아에서 활동하게 됐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됬다. 토크쇼를 통해 우리 후배들에게 이런 길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 취업한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 잃어버린 열정, 어느 순간 설렘이 사라진 내 심장을 불태우고 싶다는 뜻에서 ‘불꽃쇼’라고 이름 지었다.
불꽃쇼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다. 꿈이 있고 치열하게 노력하고 도전한다는 걸 서로 나누면서 내 안에 있는 청춘과 열정을 한 번쯤 되살릴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마음속엔 어떤 열정이 있는지 자유롭게 나눈다. 청중으로 온 분들은 ‘아, 옛날엔 나도 저런 꿈 꿨는데’ 혹은 ‘저 사람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데 저러고 도전하네, 나도 한 번 해 볼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를 우리는 ‘불꽃을 지핀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불꽃쇼는 매번 다른 게스트가 오고 있다. 이번 주에는 안영일씨가 온다. (편집자 주 / 최게바라 불꽃쇼 2월 마지막 행사는 28일 스페이스 노아에서 열린다)
기획사 창업으로는 어떻게 연결된 건가?
행사 기획과 토크쇼가 너무 재밌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사람들과 소통하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게 너무 신이 나더라. 한 달에 하나씩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 달엔 뭐가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분이 ‘그러다 기획사 차리겠네요’ 한게 딱 꽂힌 거다. ‘최게바라 기획사 사장입니다’ 라고 하면 되게 웃길것 같았다(웃음).
시작부터 창업을 진지하게 생각한건 아니다. 그저 재미로 기획사 페이지를 페이스북에 만들었고, 여차저차 하게 됐다고 하니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여러 단체에서 같이 행사 하고 싶다는 제의도 들어왔고 말이다. 그런 행사들을 다 풀어내다 보니 내 삶을 던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더라. 그 시기에 스페이스노아에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기획사를 시작했다.
회사 이름이 최게바라인 이유는 무엇인가?
2년 전부터 별명이 최게바라였다. 체게바라를 좋아하다보니 누가 그렇게 지어줬다. 출판 기념회 때 자연스레 ‘최게바라 출판 기념회’, ‘최게바라 불꽃쇼’ 하다보니까 기획사 이름도 그렇게 됐다. 돌이켜보면 그게 브랜딩이 된 것 같다. 명칭이 특이하다 보니 많은 부분에서 용인이 되는 게 있었다. 뭘 하든 웃기고 말이다. 우리가 선보인 것 중에 최게바라 텀블러가 있는데 그게 만약 최윤현 텀블러였으면 사람들이 나르시즘 있다 생각했을 거다(웃음). 그런데 최게바라 텀블러는 뭔가 이상하지만 어울리면서 재밌는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체게바라의 투쟁정신은 정말 멋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을 때 그걸 버리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갔다는 게 말이다. 나도 가능하면 하고 싶은 일이 혁명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 혁명이라는 게 물리적인 혁명은 아니다. 우리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시도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쿠바에 여행을 갔을 때 현지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그의 말로는 카스트로가 물러나야 할 사람이란다. 카스트로는 혁명을 통해 그 위치에 간 사람인데 어느 순간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 것이다. 아이러니했다. 카스트로가 원했던 건 더 나은 세상이었을까? 아니면 자기가 그 위치에 올라가고 싶었을까? 어떤 탐욕이 그를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처음엔 아니었지만 후에 변한 걸 수도 있겠고. 그런데 체게바라의 경우는 권력의 정점에 다다른 순간 스스로 걷어차고 나갔다. 그런 게 멋있는 거다. 더불어 체게바라가 이성에게도 그렇게 인기가 많았단다. 아, 정말 내 롤모델이다(웃음).
사업자등록도 최게바라 기획사로 했나? 구청직원이 안 웃던가?
‘최게바라 기획사’로 등록했다. 웃지는 않더라. 내가 만난 직원은 체게바라를 모르더라. 순 우리말로 아는 분도 있다. 어르신들 앞에서 ‘최게바라입니다’ 하면 많이들 웃으신다. ‘여봐라’ ‘거봐라’ 가 떠오르신단다.
시작단계에서 BM(비즈니스 모델)을 잡고 시작한 사업이 아니다. 지금은 그런가?
몇 가지 있다(웃음). 지금은 내 가능성을 더 끌어내고, 우리만의 철학이나 가치관들, 우리만의 결을 확실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게 탄탄해진 뒤에 더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 세워질듯 싶다. 사업을 하는 친구가 조언을 해준 게, ‘네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면 그 위에 비즈니스 모델이 따라올 것’이라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목표는 버티면서 계속 하는 거였다. 정말 감사하게 나왔고 나름 잘 되고 있다.
회사 이야기로 잘 이어졌다. 현재 회사에서 하는 일들은 무엇인가?
‘최게바라 쇼쇼쇼’라고 해서 행사들을 주구장창 하고 있다. 한 달에 세 개 정도 작고 큰 행사를 연다. 일 년 이면 서른 개다. 물론 여기서는 수익이 거의 없다. 진행하면서 우리 가능성을 계속 발견하는 과정이다.
요즘은 청년들과 소통하는 게 많이 없어지는 것 같다. 청년은 청년대로 또 그 안에서 너무 파편화 되는 느낌이고. 여러 행사를 통해 청년들이 모인 공동체라던가 커뮤니티를 자발적으로 만들게 유도하고 있다. 그런 커뮤니티가 나중에는 아주 강력한 힘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단체들에게서 연락이 오더라. 그 과정에서 재밌는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있고.
유지하는 방법은?
체력이 필요하다. 버틸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투자를 받거나 내 돈을 쓰거나다. 투자를 받기엔 내 지분을 넘겨주기가 너무 싫더라. 여러 단체를 조직도 해보고 대표도 해봤는데 말 나오는 게 너무 많았다. 책임지고 행하는 사람과 어떤 권한이 있는 사람 사이에서 무언가 불일치 됐을 때 나타나는 불화들이 컸다. 사업 자체가 돈이 최종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관을 지키고 싶었다. 외부에서 간섭이 들어오면 가치관을 지키기 힘들 것 같아서 애초부터 투자는 안 받았다. 초반에 제안은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거절했다. 투자를 받지 않은 또다른 이유로는 내가 간절해지고 싶은 것도 있었다. 간절한 상태에서 돈의 소중함을 알고 싶었던 거다. 투자를 안 받고 버티려면 내 돈을 투자하는 방법이 있는데 늘 이야기 하듯이 나는 돈이 없다(웃음). 단 한 번도 내 통장에 7자리 숫자의 금액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올해는 다행히 중소기업 온라인 마케팅 대행 제의가 들어왔다. 최게바라 기획사를 참신하게 봐준 것 같다. 그래서 ‘명란젓’이라는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거기서 수익금이 나온다. 그 수익으로 직원들 월급은 줄 수 있게 됬다.
기획하고 있는 다른 수익모델은 없는가?
하반기쯤에 무르익을 비장의 무기가 있다. 참웨딩이다.
작년 소셜 벤처 경영대회의 일반 아이디어 부문 대상받은 아이템으로 알고 있다.
맞다. 대회를 나간 이유는 정말 솔직하게 상금 때문이었다. 거기서도 솔직하게 말했다(웃음). 우리가 관심있어 하는 청년 문제를 고민 해보니 취업, 주거, 결혼식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갔던 결혼식을 생각해 보라. 재미없고, 돈 많이 들고, 하객들은 지루해 하고, 신랑신부는 축하도 많이 못 받고 그렇다. 그걸 반대로 재밌고, 축하도 많이 받고, 저렴한 파티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했다. 행사 기획을 많이 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컨셉으로 대회에 나갔고 대상을 받게 됐다.
수상할 당시만 해도 진짜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점점 이 문제가 피부로 느껴지고 주변에서 이야기가 들렸다. 정말 잘해서 대한민국에 좋은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거고 하려는 것과도 일치하고 말이다. 그래서 준비했고 첫 고객의 의뢰도 들어왔다. 올해 5월에 첫 론칭을 한다.
의뢰한 분은 어떤 분인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케이스긴 했다.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문화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 기획한 것인데 첫 고객은 그렇진 않았다. 직접적인 언급을 하는 건 조금 조심스럽고, 일반 식장을 이용하긴 어렵다고 생각해 그의 동생 분이 도와 달라고 요청이 왔다. 그 때 ‘아, 이게 사회적으로도 공익적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소외계층이라고 표현되는 그런 분들이 결혼하기에 일반 식장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격 등 여러 측면에서 말이다. 그런 분들에게도 결혼을 재밌게 해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최게바라 기획사의 모토 ‘어제 상상하고, 오늘 기획하고, 내일 행한다’는 어떤 의미로 정한건가?
처음에 시작할 때 내 마음가짐이다. 많은 행사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결국 ‘그리 어렵지 않아요’다. 예전에 이런 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윤현씨는 많은 사람들이 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이미 추억으로 만들어 버렸네요’ 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꿈으로만 남겨 두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인 것 같다. 조금만 노력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토는 ‘상상만 하는 것들을 기획을 통해 현실 속에서 만들어내자’는 의미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이 사회가 바라거나 희망하는 것들을 기획으로 풀어내는 회사가 되자는 거고. 신문기사를 보면 너무 안타까운 게 많다. 그런 것들만 잘 풀어내도 할 수 있는 게 무척 많을 것 같다.
최게바라 기획사에 위기는 없었나? 재정문제든 사람문제든.
재정적으로는 위기라고 볼 수 없는 게 늘 이래서…(웃음). 리스크는 딱히 없었다. 어떤 자본이 투입이 돼 재고가 쌓인다거나, 그걸 팔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건 없었으니까. 남들이 보기엔 항상 위기였을 지도 모른다(웃음). 하지만 버티는 것만은 자신 있다.
스트레스가 적진 않았을 텐데?
아, 그런 건 늘 있었다. 특히 작년엔 너무 행복하긴 한데 체력적으로 좀 힘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까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그런데 방향에 대한 뚜렷함이 있었기 때문에 못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다.
올해 초, 새 식구를 들였다. 몇 명인가?
나와 정직원 둘, 파트타임 셋 해서 총 여섯이다.
어떤 사람을 원했나? 리쿠르팅 과정은?
어떤 능력이 필요해서 그 능력을 리쿠르팅 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뜻을 함께 하고 걸어갈 동지를 찾고 싶었다. 내가 너무 힘들거나 누구 때문에 속상할 때 같이 앉아 욕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했다. 공개적으로 리쿠르팅을 진행한게 아니라 지켜보다가 낚아챈다고 할까? 그렇게 리쿠르팅 했다. 팀원 중 한 친구는 동네 동생이다. 몇 년 전부터 이것저것 하면서 이 친구와는 믿고 뭔가 할 수 있겠다 해서 함께 하게 됐고, 한 친구는 최게바라 웅변대회 행사에 관객으로 왔던 인연이다.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친해지다보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 또 한 분은 지금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컨설턴트 분이다. 30대 중반에 돈도 많이 벌고 있는데, 내가 빨리 나오시라고 독촉하는 중이다(웃음). 이런 식으로 함께 할 동지를 찾는다. 사실 쇼를 하면서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이유 중 하나도 향후에 함께 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여기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최게바라 눈에 먼저 띄어야하겠다(웃음). 최게바라 기획사의 문화가 있다면?
오늘은 미술관에 사진전을 같이 보고 왔다. 뭔가 같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한다. 내가 꿈 꿔온 것도 그런 거고 말이다. 평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네 권의 잡지를 읽는다. 잡지를 많이 봤던 내 경험에서 나온 거다. 잡지를 많이 보니까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게 좋아서 직원과 같이 하고 싶었고. 얼마 전엔 태국 빠이로 여행을 다녀왔다 배낭 여행자들에게 천국이라 불리는 곳이다. 너무 좋더라. 그 곳에서 팀원들이랑 같이 기획하고 토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계약서에도 그렇게 썼다. 매년 1월 1일부터 7일 간은 태국 빠이로 해외 워크샵을 간다고. 한국 한창 추울 때 우린 따뜻한 곳으로 가는 거다. 또 하나는 10시 출근 6시 퇴근이다. 최게바라 기획사에는 늦잠과 저녁이 있다.
팀원 내 갈등이 있으면 어떻게 해결하는가?
일단 이야기를 많이 한다. 팀원들의 관계는 고용주 피고용주가 아니라 오빠 동생, 혹은 아빠와 아들딸 이다. 외부 미팅 갈 때 마다 ‘아빠 갔다 올게’ 하고 갔다가 과자 사들고 들어 온다(웃음). 가끔은 진짜 아들 딸 같은 느낌이 들때도 있다.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것 같은?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고, 야근해서 힘들다고 하면 다음날 아침은 쉬게 한다. 이런 걸 어떤 시스템으로 정해 놓는다기보다 이야기하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바로 조정하는 식이다. 어떤 이야기든 들을 준비는 있지만, 부드럽게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조금 소심해서 말이다(웃음).
‘최게바라 쇼쇼쇼’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행사인가?
‘최게바라 불꽃쇼’, ‘남북청년 토크콘서트’, ‘또라이 포럼’ 이렇게 세 개가 있다.
‘최게바라 불꽃쇼’는 초반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청춘들의 마음에 열정을 지피는 행사다. 끝나고는 한 시간 정도 이 곳에서 뒷풀이도 한다. 사람들이 친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많은 행사를 가면서 강하게 느낀게, 사람들이 서로서로 친해지고 싶은 욕구가 많다는 것이었다. 행사를 여는 단체들도 그런 네트워크 파티를 많이 만들고 싶어 하고.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않다. 모아놓고, 게임하고, 친해지세요라고 독려해도 잘 안된다. 근데 행사 후 술자리 등 신나게 놀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니 서로 친해지는 속도가 빠르고 그러면서 또 스스로들 뭔가를 만들어 가더라.
두 번째는 ‘남북청년 토크콘서트’가 있다. 이건 불꽃쇼를 본 새터민 친구가 제안한 거다. 그 친구 말이 ‘우리도 재밌는 이야기 많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북한에서 탈출할 때의 어려움이나 북에 대한 비판들 같이 슬프거나 불행한 이야기로만 우리를 풀어내는 것 같다’ 하더라. 그럼 한 번 해보자고 했고 토크콘서트를 진행 했다.
초대한 새터민 친구 중에 열 여섯에 중국에서 타이어를 수입해 북한에서 판매한 친구가 있다. 대단하더라.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 봤는데 너무 재밌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두 번 진행했고, 다음 달(3월)에 세 번째로 한다. 원래 토크쇼가 이야기만 듣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남북 친구들이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의견이 있어서 ‘남북청년 한 잔’을 별도로 기획했다. 그냥 모여서 술 한 잔 하자는 거였다. 술 못 먹는 친구들은 사이다 마시면 되고. 그러면서 모인 친구들이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모습을 본다. 이런 게 새로운 통일방식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물론 진짜 통일이 되려면 정책적인 부분들을 고민해야겠지만,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통일에 관한 기획과 행사인 것이다.
세 번째는 ‘또라이 포럼‘이 있는데. 이것도 좀 강하다(웃음). 원래는 마케팅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영입하려 기획한 모임이었다. 소위 말하는 똘끼 있는 사람을 잡으려고 말이다. 그런데 이미 채용은 완료된 상황이고, 기획 한 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그냥 한 번 올렸다. 또라이 모이라고. ‘또라이, 혁신보다는 혁명, 엉뚱함 등 그런 것에 끌리는 사람 연락 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회신이 왔다. 하루 사이에 스무 명이 오더라. 솔직히 좀 무서웠다(웃음). 어디서 숨어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느낌? 원래 오프라인 모임을 생각한게 아니었는데, 많이 연락이 와서 급하게 1월 2일에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다 된다고 하더라. 그렇게 열 다섯명의 또라이들이 신촌에서 모였다(웃음).
처음에는 많이 어색해 하더라. 그런데 술자리에서 한 잔 들어가기 시작하니 갑자기 대화가 빵 터지더라. 다들 파티 기획하거나, 행사 좋아하고, 여행 좋아하고, 음악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야기를 해보니 또라이라고 모인 사람들은 ‘열정 있는 청춘’들이었다. 외로웠던 것 같다. 함께 이야기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많지 않았던 거다. 이 친구들은 지금도 밤마다 카톡으로 난리도 아니다. 서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면서 말이다. 두번째 또라이 포럼도 열었다. 그땐 25명이 왔다.
1,2회 때 만난 음악 하는 친구들은 따로 ‘또라이 밴드’를 만들었다. 라이브 바를 빌려서 이 친구들이 공연을 하는 또라이 포럼 3회를 한다. 또라이 밴드 데뷔 무대다. 그 친구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또 하나 나온 게 3.1절 콘서트다. 3월 1일 토요일 저녁 여덟시에 스페이스노아에서 열린다. ‘소녀에게 바치는 노래’ 라는 컨셉으로, 2014년도 3월 1일에 살고 있는 우리 청춘들이 1919년 3월 1일을 살았던 어린소녀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거다. 창작곡도 있고 조용필의 모나리자도 있다. 중간 중간에 영상도 보고 퀴즈 같은 이벤트도 한다. 3.1절 혹은 위안부 할머니를 생각하거나 위로하는 우리만의 방식인거다. 매달 이렇게 해 나갈 거다. 이게 지속되다 보면 열정 있는 친구들이 더 많이 모여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북청년 토크콘서트는 영국 BBC 방송에서도 취재해갔다. 어떻게 연락이 왔나?
남북청년에 대한 행사를 제안했던 새터민이 탈북자 쪽에서는 연예인이다(웃음). 영어도 잘하고, 미디어도 잘 안다. 이 분은 김일성이 태어난 날(태양절)만 되면 외국 매체에서 인터뷰 해 가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 매체들은 남북한 관계에 무척 관심이 많다. 이 분이 BBC 쪽을 섭외하니 그 다음에는 중앙일보에서도 오겠다고 연락이 오더라.
행사가 널리 알려져서 뿌듯했겠다.
왜 안그렇겠는가. 사실 자랑하기 굉장히 좋은 소스이기도 하다. 어딜 가나 이 이야기는 물어 보더라(웃음). BBC가 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 때가 남북한 군사적 대치가 있었을 때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니야 했을 때였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는 남북한 친구들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있는 거다. 그게 너무 이질적으로 보이면서 묘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런 부분 때문에 언론이 주목 했겠다는 생각 했다. 더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구나 싶기도 했고.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쌓이면 더 큰 통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게바라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우리 팀원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친구는 최게바라 기획사를 아예 모르던 상황에서 행사 구경 왔다가 취지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더라. 나는 행사는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웃기고 재밌으면서도 그 안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싶고. 그 친구도 행사가 끝나고 나니 계속 생각이 났고 검색을 하게 됐단다. 그렇게 최게바라 기획사에 대해 알게 됐고, 이후에 나에게 다섯 장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자신의 살아왔던 이야기를 담은 편지였다. 고민이 많았던 거다. 그런 게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 최게바라로 인해 개개인이 조금 더 생각하고, 꿈꾸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케이스는 ‘기획사’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가수가 되고 싶다고 연락이 온 사례가 종종 있었다. 때로는 음원 파일도 보내온다(웃음). 뭘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니 딴 건 필요없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만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짠했다. 그래서 불렀다. 최게바라 웅변대회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또 노래를 너무 잘하더라. 그 후에도 행사에 몇 번 더 불렀고 이 친구도 힘이 났는지 밴드를 만들었다. ‘다섯줄’이라는 밴드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또 장서영이라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도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울산 사는 친군데 아예 서울로 왔고 우리를 통해 첫 무대를 섰다. 그 뒤로도 몇 군데 소개도 시켜주고, 또라이 포럼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넓히고 있다. 최게바라 기획사가 청년들에게 좋은선배 역할을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올해 주력하는 사업 계획이라면?
일단 참웨딩이라는 사업을 하게 됐고, 앞서 말했듯이 상반기에 첫 케이스가 나온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행사 기획의 능력으로 어떤 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게 된거다. 거기에 비즈니스 모델이 되기도 하니 더 좋다. 이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 청년들이 많다. 우리 행사에는 무조건 인디밴드가 나온다. 행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중간 중간에 노래를 부른다. 우리도 수익이 나는 일이지만 그 친구들에게도 수익이 돌아가니 좋다. 또 참웨딩 안에는 연극하는 친구들도 함께한다. 그 친구들에게도 일자리가 생기는 거다.
올해 이 사업을 다듬어서 지속가능성을 확보 하고 더 많은 청년들과 함께 했으며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도 투자 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없나?
아주 현명하지 않은 자본가라면 환영한다(웃음). 텀블러를 만들었을 때 그랬다. 계산적이지 않은 자본가의 투자를 원한다고. 너무 만들고 싶은데 돈이 없었다. 어떤 선생님이 너무 기특하다고 투자해주셨다. 달랑 글 하나 올렸을 뿐인데 실제 된거다. 농담이겠지만, 펀딩계의 이단아라는 말도 들었다(웃음). 또 다른 예로 최게바라에 알바로 온 친구가 노트북이 없길래 그것도 페북에 올렸었다. 혹시 집에서 안 쓰고 있는 노트북을 그냥 두거나 버리게 될 경우, 환경에 너무 안 좋으니까 우리한테 달라고 말이다. 우리는 구걸하는 게 아니라 환경을 지키자는 거라고 했다. 전혀 안면이 없는 분이 택배로 보내주셨다.
최게바라 기획사의 뜻에 공감하고 유지해달라는 분들이라면 투자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못 받을 것 같다.
최게바라 기획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라면?
문어발 같은 회사가 되고 싶다. 이건 진짜다(웃음). 참웨딩 같은 모델을 많이 만들고 싶다. 내가 대표가 아니어도 좋다. 참웨딩 대표도 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든 걸 소유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 유익하고, 재밌고, 좋은 것들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익한 프로젝트를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맡을 수 있게 할 생각이다. 매년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서 30년 후에는 30개, 그렇게 문어발처럼 확장시키고 싶다.
긴 인터뷰의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최근에 조금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가 과대평가 되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있다. 마케팅을 너무 과하게 한 건가 하면서 말이다(웃음). 최게바라 기획사는 아직 비즈니스를 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우리가 가진 철학, 그 방향성과 비즈니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균형을 맞추고 있는 단계이다. 올해는 그 시발점이 될 거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면서 청춘들도 아우를 수 있는 최게바라 기획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