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人사이트] ‘로블록스의 한국인’이 말하는 커리어패스
김혜진 로블록스 PM(프로젝트 매니저)의 학창시절 꿈은 교사. 이를 위해 대학에서 정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미국에 오게 되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
불안한 마음에 다니게 된 정보학 대학원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텍사스에서 문과생에게 문호가 넓은 간호 대학원이었다. 전문 간호사 커리어를 생각하며 선수과목 이수를 했고 대학원 편입학만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실리콘밸리에 취업이 되면서 이 길도 얽히게 됐다. 텍사스와 달리 샌프란시스코는 비전공자가 갈 수 있는 간호대학이 적었고 학비도 4배나 비쌌다. 더군다나 취업 문도 좁았다. 현실적인 이유로 2년 간 했던 관련 공부를 접기로 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이었지만 남은 결과물은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 잘할 것 같은 일을 벗어나 시장의 수요를 살펴봤다. 개발자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그래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도전하기로 했다. 컴맹 수준이었지에 주변에서 성공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IT 영역에서 새로운 길, 커리어패스를 시작하게 된다.
김혜진 로블록스 프로젝트 매니저가 지난 9월 27일 열린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연사로 나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하 강연 전문 정리.
“영어 교사, 전문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중고등학교 영어 교사가 되고 싶어서 교육학을 전공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계획대로 라면 지금 15년차 정도의 교사가 되어야 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혼 후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남편과 함께 텍사스 오스틴으로 가게 됐다.
고민하다 GRE와 토플을 준비해 정보학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공부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이왕 커리어가 얽힌 거라면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헬스케어 분야였다.
주변의 간호사 친구들이 의대에 들어가기에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니, 짧은 시간에 공부를 마칠 수 있고 원하던 일을 할 수 있는 전문간호사를 추천해 주었다. 살펴보니 문과생들도 선수과목이 우수하면 바로 간호 석사 과정에 진학할 수 있는 대학원 프로그램이 있었다. 또한 그 당시 새 병원들이 지어지고 있어서 대학원을 졸업할 때쯤 취업도 어느정도 보장이 되었다. 1년동안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선수과목들로 꽉 채워서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으로 수료했고, 정보대학원에서 간호대학원으로 편입학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정보학과 영문학 전공인 남편에게 갑자기 실리콘밸리에 있는 테크회사에서 면접을 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많은 실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많은 실리콘밸리에 있는 회사에 설마 되겠어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던 남편은 덜컥 회사에 합격을 했다. 남편은 인생에서 잡기 어려운 기회라는 생각에 수업을 다 듣고 논문만 남은 상황이었지만 중퇴를 결심했다. 나는 선수과목을 들은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캘리포니아에서 또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남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동을 하게 됐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샌프란시스코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와 같은 비전공자가 대학원으로 갈 수 있는 학교의 선택폭은 굉장히 좁았고, 학비도 텍사스 보다 4배가 비쌌다. 게다가 텍사스와는 다르게 취업시장은 경력자들까지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또 다시 1년 동안 커뮤니티 칼리지에 들어가 텍사스 에서와는 다른 캘리포니아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선수과목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병원에 들어오는 이력서들이 리뷰도 되지 않고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같이 일했던 전문 간호사들은 이곳(샌프란시스코)에서의 취업은 정말 어려우니 텍사스 오스틴으로 가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절망감이 오는 순간이었다.
남편과 여러가지 상황들을 고려해 상의를 해보았지만, 학비조달, 장학금 제도, 기타 취업 문제들을 감안했을 때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2년 간 이어가던 공부를 포기하게 됐다. 미국으로 온 지난 3년 반 동안 미국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도전을 했지만, 손에 남아 있는 것이나 보여줄 결과물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컴맹의 소프트웨어 개발 도전, 그리고 취업”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것이 샌프란시스코의 개발자 수요였다. 간호학 공부도 했는데 또 다른 분야 공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온라인 수업부터 시작했다. 컴맹 수준이었기에 기초과목부터 시작했고 여러 수업들을 들으면서 이것 저것을 취미로 만들어 보니 재미있었다. 본격적인 공부는 혼자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해 실리콘밸리에서 있는 코딩 부트캠프에 입학하기로 했다.
프로그래머 도전을 한다고 했을 때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지인은 없었다. 그래서 오기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데브 부트캠프(Dev Bootcamp, SW 교육기관)에 들어가게 됐다. 기초가 많이 부족했고,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6개월 과정 동안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15-16시간씩 공부했고, 중도탈락 없이 수료했다.
부트캠프를 마치고 나서 내 적성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다른 프로그머와 일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버그를 고쳤을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곤 했다. 그래서 앞으로 일을 할 때 에러를 고치는 일을 업으로 삼기 보다 코딩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하는 직업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지원을 하고 면접을 봤는데 다 떨어졌다. 이유를 찾다보니 면접과정에서 공통적인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 기업들은 회사와 나의 관계에 대해 계속 물어봤다. 예를 들어, 회사의 미션이 내 인생 미션 및 커리어 방향과 어떤 관계인지, 회사에 비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회사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발전하고 싶은 지 등을 계속 질문했다. 그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대답은 막히고 답답했다.
그 당시 나에게 회사의 미션이나 비전, 잡디스크립션(직무설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근면성실, 충성심을 어필한 똑같은 이력서를 다수에 회사에 이름만 바꿔서 냈다. 회사의 필요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내가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일꾼이고, 회사가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해도 해낼 수 있다는 식으로 귀결했다. 그런데 면접관들은 그런 부분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즉, 회사와 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핏(FIT) 맞추기’를 못 했기에 계속 떨어진 거였다.
다음에는 나와 핏이 맞는, 적합한 회사만 찾아서 이력서를 냈다.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필요가 다양하기에 요구되는 사람을 찾는 타이밍도 달랐다. 나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한 뒤 회사의 필요를 이해하면서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커리어가 쌓이기 시작했다.
“나와 회사 간 ‘핏‘ 맞추기”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일하는 것이기에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 돌아가는 것을 잘 파악할 수 있고, 리더십에 관심이 있었기에 임원들이 당면하는 문제와 의사결정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배우고 싶었다. 경력도 학위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경영진 비서 역할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2년 동안 대학원 입학을 위해 공부했던 헬스케어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산업, 바이오테크 영역이 적합하다고 봤다.
그때 눈에 띈 회사가 ‘카운실(Counsyl)’이다. 카운실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질병을 예측하고 미리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었고, CSO(Chief Science Officer), CTO(Chief Technology Officer), COO(Chief Operating Officer)와 같이 일할 비서를 뽑고 있었다. 직원 수는 500명 정도 되었고 시리즈 F 라운드까지 투자유치를 한 회사였다.
나와 회사의 핏을 보았을 때 회사가 빨리 성장하고 있었고, 내가 일할 수 있는 기회와 회사에 기여할 부분이 많아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500명 규모의 조직이지만 스타트업 정신을 가지고 있어 굉장히 자유롭고 친밀한 분위기여서 좋았다.
또한 회사의 미션과 서비스가 내 상황과 맞닿아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유산을 여러 번 경험해서 검사를 받고 있었는데, 카운실의 유전자 검사 서비스가 부모들에게 호평을 얻고 있었다. 이런 의미 있는 곳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의 인생과 회사의 미션이 잘 맞아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잡디스크립션을 보면서 나의 경험과 사교적인 성격, 헬스케어 지식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고 추후 내가 지향하는 커리어 목표를 만들 수 있는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면접에서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회사와 내가 서로 너무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됐다. 만약에 내가 가진 배경 지식을 다른 회사에 적용했다면 아마 잘 맞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와 카운실은 너무 잘 맞았고 만난 타이밍도 좋았다. 회사 입사 후에는 업무 범위가 계속 확장되었고,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경험까지 쌓게 됐다.
“로블록스로 이직하게 된 이유”
프로젝트 메니지먼트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만약데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면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로 전환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다. 또 이전에 배운 프로그램 지식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운실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다 보니 다른 곳에서 인터뷰 제안이 들어와도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로블록스는 달랐다. 당시 로블록스는 굉장히 빠르게 성장해 가고 있었다. 스타트업 정신도 충만해 보였고 비전도 굉장히 컸다. 그곳에서 원하는 포지션은 VP(Vice President)의 비서이자 구글시트 전문가, 데이터 처리 관리자였다. 일반 비서에게 요구되지 않는 다른 자격 요건들이 들어가 있다 보니 임원 면접까지 간 사람이 거의 없었고 몇 달 동안 공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업무였기에 로블록스는 일해주기를 바랐고, 나도 회사가 마음에 들었다. 당시 4-5시간 동안 로블록스 팀원들과 인터뷰를 할 때 너무 잘 맞는다고 느꼈고, 카운실처럼 재미있게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어린이들의 교육 안전을 신경쓰며 생태계를 지원하는 로블록스의 미션이 좋았다. 그래서 프로젝트 매니저로도 계속 성장하고 싶으니, 비서와 프로젝트 매니저 듀얼 타이틀을 제안했고, 회사도 흔쾌히 수락했다. 로블록스에 입사하자마자 회사의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 매니저 자격증을 땄고, 2021년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매니저로 전환해서 내부 툴을 만드는 팀에서 일하고 있다.
“흩어진 경험들로 쌓은 나만의 커리어”
자신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 요즘은 시장 변화가 많다 보니 일관된 백그라운를 갖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나도 처음에는 일관되지 않은 백그라운드가 흠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다양한 내 경험을 점으로 찍고 나니 오히려 패턴을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고, 빨리 변화하는 시장에서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회사를 만족시키는, 혹은 모든 시장을 만족시키는 스펙을 쌓는데 연연해 하지 말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정을 어떻게 하면 뿜을 수 있을지 도전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