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T칼럼] 기술탈취는 왜 빈번할까?
대한민국의 경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반도체, IT, 자동차, 선박 등의 산업을 통해 급성장해 왔다. 이 과정에서 기술탈취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중소기업이 피해를 입는 사례가 자주 보고되고 있다. 2021년 6월 23일부터 시행된 개정 부정경쟁방지법에서는 고의적인 아이디어 탈취행위에 대해 손해액의 3배까지 배상액을 증액할 수 있는 3배 배상 제도를 도입했고, 2024년부터는 기술탈취 행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가 3배에서 5배로 강화되었지만, 여전히 기술탈취를 당해서 사업을 접었다는 중소기업들의 눈물어린 호소는 줄지 않고 있다.
2021년 8월 개정된 「상생협력법」에서는 기술탈취 사건에서 피해 중소기업의 입증책임 부담을 완화하는 규정이 신설되었고, 2024년 9월 개정된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에서는 기술자료 유용행위에 대한 금지청구권이 도입되었지만, 현실에서 대기업에 납품을 해야 매출을 발생시킬 수 밖에 없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소송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부담이다. 본 글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기술탈취가 일어나는 주요 이유들에 관한 생각을 나눠보고자 한다.
기술검토과정에서 기술탈취의 경계가 불명확하다
대한민국에서 기술탈취가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술탈취와 기술검토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대기업 담당자나 연구부서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거나 기존 제품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사의 기술을 검토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기술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기업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던 연구와 협력사의 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변리사로서 일을 해보니,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기술이 독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쪽에서는 이미 유사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고 반박할 수 있다. 기술을 개발한 쪽에서는 ‘세계 최초’라고 주장하지만, 엄격한 선행기술조사를 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히 많다. 반면, 기술을 공급받으려는 쪽에서는 급한 마음에 절차를 지키지 않고 여러가지 자료들을 요청하면서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매는 경우들이 많다. 이미 이메일 등으로 기술자료를 받았으면, 기술을 제공한 쪽에서는 ‘내가 납품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기게 되지만, ‘협력사’로 선정되는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게 대기업 담당자들이 가지는 현실적인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탈취 여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강력한 특허를 통해 자신들의 기술적 차별점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소기업이 기술 제안시 해당 기술의 고유성을 명확히 설명하고, 특허로 이를 입증하면 기술탈취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특허를 갖고 있다.’는 것 만으로는 충분한 기술탈취 방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제품이라는 것은 여러 개의 기술로 구성되며, 그 기술은 여러 개의 아이디어로 구성되기 때문에, 각각의 아이디어를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여 제대로 보호해야한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1개의 특허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특허가 등록되더라도 무효심판에서 무효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변리사를 만나서 제대로 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한편, 대기업 담당자들의 입장에서는 엄격한 ‘선행기술조사’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장에는 어떤 기술을 찾아서 윗선에 보고하는 것이 급해보일 수 있으나, 그러다가 조직 전체가 기술탈취의 오명을 쓸 수 있다. 좋은 기술을 가진 기술기업을 만났다면, 엄격한 선행기술조사(선행특허조사)를 통해서 해당 기술기업이 제안한 기술이 정말로 세계최초의 아이디어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기술탈취 의혹을 많이 받은 대기업들은 이러한 부분을 이미 인지하여 기술 제안을 받는 과정에서 해당 기업의 기술과 특허에 대한 선행기술조사를 철저히 한다. 해당 조사결과를 기술을 제안한 기업에 제공하고, 해당 기업에게 선행기술조사를 통해 ‘이미 공지된 기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충분한 컨센서스를 맞추고 협업을 시작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최근 스타트업 기술을 탈취하여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된 대기업의 경우, 기업의 이미지에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고 많은 스타트업들이 해당 기업에 기술제안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오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술에 대한 충분한 선행기술조사와 기술제안사 측으로의 정보공유가 필수적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문화
기술탈취 문제는 종종 기록을 남기지 않는 거래 관행에서 비롯된다. 협력사들이 대기업과 기술 검토를 진행할 때, 비밀유지 협약(NDA)을 체결하지 않고 기술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NDA는 형식적인 문서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일단 자료부터 요구하는 마음 급한 대기업 담당자들이 많은데, 이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대기업이 자료를 빨리 달라고 하는데 ‘을’의 입장에서 거절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향후 분쟁이 발생했을 때, 법적으로 이를 입증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를 초래한다. 대기업이 기술을 탈취해도 이를 증명할 문서나 증거가 부족하면 법적으로 보호받기 어렵다.
따라서, 중소기업과 대기업 담당자들은 기술 제안 시 반드시 서면 기록을 남기고 NDA를 체결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 만약 NDA를 체결함에 있어서 대표이사 결재까지 필요하다면, 그 결재권한을 중간 간부에게 위임하는 문화가 확산될 필요가 있다. 빠르게 새로운 기술을 만나고, 협업을 스피디하게 추진해야 대기업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술적 차이점과 독창성을 입증하는 문서를 남겨야 하며, 이를 통해 기술탈취라는 불필요한 오명을 뒤집어쓰는 사태를 서로 예방해야한다.
원가경쟁력 중심의 경제 구조
대한민국의 경제 구조는 오랫동안 원가경쟁력에 의존해 왔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 등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러한 성공은 주로 낮은 원가에 기반한 것이었다. 낮은 원가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지금의 경제적 부를 만들어준 것이다. 대기업들은 협력사의 기술을 통해 원가 절감을 추구하며, 원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경영 목표의 핵심이 되었고, 원가경쟁력을 높이는데 성공한 사람이 임원으로 승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협력사의 독창적인 기술을 존중하지 않고, 기술을 탈취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양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는 한편, 해당 아이디어를 기존 협력사들에게 제공하여 제품에 탑재하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원가 절감 중심의 경영 문화는 기술탈취를 방조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대한민국이 기술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성장 전략을 채택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기술 선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경제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대기업들은 협력사의 기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전략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원가경쟁 위주의 경영은 중소기업들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경제적 박탈감을 증대시키며, 결국 대기업의 경쟁력도 무너트린다.
지식재산 분쟁 속도의 문제
기술탈취와 관련된 지식재산권 분쟁이 지나치게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도 기술탈취가 횡행하게 하는 큰 문제이다. 중소기업이 특허를 등록하고 보호하려 할 때, 대기업과의 분쟁에서 소송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 중소기업이 재정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소송하다가 회사 망한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중소기업인들에게는 너무나 널리 퍼진 이야기라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대한민국에서 ‘특허소송’은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특허침해소송의 1심이 ‘특허법원’이 아닌 ‘지방법원’에 제기되며, 변리사들은 침해소송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변리사법 제8조에는 변리사가 특허소송에 참여할 수 있다고 되어있으나,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특허침해소송 1심이 제기되면, 침해 고발을 당한 측은 특허심판원에서의 특허 무효심판 절차를 당연히 진행하며, 1심 지방법원은 특허심판원의 결과를 기다린다. 무효심판의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심결취소소송이 특허법원으로 진행되고, 대법원까지 가게되면 절차가 무한정 늘어난다. 그 사이 특허침해소송은 정지되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 소송이 장기간 지연된다.
특허권이 무효가 되지 않더라도, 변리사가 참여하지 못하는 구조에서 기술탈취를 당한 중소기업들은 1심 지방법원에서 자신들의 피해사례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어권을 얻지 못하고 소송이 지연되기 일수다. 이렇게 되면 특허소송이 2년이상 걸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회사는 재무적, 정신적 피로감으로 인해서 경영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게 된다. 법적 대응이 중소기업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상황에서, 기술탈취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지식재산 분쟁과 관련한 제도적 보완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필요성
대한민국에서 기술탈취 소송이 빈번히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송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비대칭적 구조이다. 중소기업은 기술탈취 소송에서 소송대리인을 선임할 자본력과 증거를 수집할 정보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 소송제도의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와 유사한 절차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미국의 민사소송 절차에서 중요한 요소로, 양측이 소송과 관련된 자료와 증거를 서로 공유하고 제공할 의무를 지닌다. 이 제도를 통해 피고와 원고가 동등한 수준에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며, 불공정한 정보 비대칭을 방지한다. 특히,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소송에서는 디스커버리 절차가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위와 관련된 증거를 확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디스커버리와 유사한 절차가 도입된다면,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위에 대한 증거를 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공정한 소송 절차가 보장될 것이다. 이는 기술탈취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중소기업의 권리 보호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결론
기술탈취는 단순히 지식재산권 침해를 넘어, 대한민국의 경제 구조와 기업 문화, 법적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대기업이 협력사의 기술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호한 경계, 기록을 남기지 않는 관행, 원가 경쟁력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 그리고 지식재산권 분쟁의 느린 속도는 기술탈취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비대칭적 증거수집 능력을 보완하는 장치도 없다. 기술탈취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기술 보호를 위한 절차를 강화하고, 법적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특허침해소송에서 변리사가 참여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을 개선해야하며,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와 같은 증거 수집 절차의 도입을 정치권에서 심각하게 검토해야한다.
중소기업이 기술탈취 문제에서 보다 공정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경제는 앞으로도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기술탈취의 늪에서 벗어나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길 기원한다.
원문 : 기술탈취는 왜 빈번할까?
필자소개 : BLT 엄정한 파트너 변리사는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직접 투자하는 ‘액설러레이터형’ 특허사무소 ‘특허법인 BLT’의 창업자입니다. 기업진단, 비즈니스모델, 투자유치, 사업전략, 아이디어 전략 등의 다양한 업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