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유니콘의 시간’ – 시간을 디버깅하다 #3

제3화: 나비의 날갯짓

작은 선택들이 모여 운명이 된다면, 그날 오후의 선택은 우리 운명의 첫 번째 조각이었을 것이다. 삼성역 근처 오피스텔 7층, 스무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우리는 첫 투자 미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는 공간에 선풍기 한 대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요?”
지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바일 인증 시스템을 메인으로 한 사업 계획서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2025년의 기억 속에서, 서지연은 우리의 첫 번째 마케팅 리드였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스타트업의 특성상 마케팅을 맡게 된 케이스. 2017년 결혼과 함께 회사를 떠날 때까지 그녀는 완벽한 직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틀릴 리 없어요.”
내 목소리에는 이상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미래에서 온 사람의 확신이었다.

현우가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종종 내 말투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마치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는 것처럼.

“준서 씨.”
현우가 입을 열었다.
“가끔 궁금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2010년의 테헤란로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디지털파크의 자리, 앞으로 수년간 이 거리를 장악할 스타트업들의 미래 사옥들이 들어설 공터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모습이었다.

“그냥… 느낌이에요.”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느낌 치고는 너무 구체적인데요.”
현우의 말에는 날이 서있었다.
“모바일 시장의 성장률, 인증 시스템의 진화 방향, 심지어 경쟁사들의 움직임까지…”

그의 날카로운 직감은 여전했다. 2025년의 현우도 이랬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한번 의심이 들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 그래서 그는 우리 회사의 기술을 책임질 최고의 CTO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회사를 떠나기 전까지는.

오후 두 시, 첫 투자자가 도착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온 VC였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는 우리 사무실을 둘러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에어컨 없는 사무실, 낡은 책상들, 화이트보드 하나가 전부인 이 공간이 그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Your pitch deck, please.”
그의 영어에는 약간의 거만함이 묻어있었다.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2025년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그들이 듣고 싶어할 이야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모바일 시장의 성장률, 인증 시스템의 필요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 수익 모델.

“Interesting.”
그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But why mobile authentication? It’s already a crowded market.”

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2025년의 내가 알고 있는 시장은 ‘붐비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터였고, 우리는 그 전쟁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It’s not about the current market.”
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It’s about what’s coming next.”

화면에는 하나의 그래프가 나타났다. 향후 5년간의 모바일 시장 성장 예측 그래프였다. 물론 이것은 예측이 아닌 2025년의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These numbers… How did you…”
투자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We’ve done our homework.”
나는 마지막 슬라이드를 보여주었다.
“And we’re not just predicting the future. We’re going to shape it.”

미팅이 끝나고 그가 떠난 후, 사무실에는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우리가 방금 무언가 특별한 것을 시작했다는 것을.

“준서 씨.”
현우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저 데이터들… 진짜 예측치인가요?”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현우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치 이미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처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현우의 직감은 내 예상보다 더 날카로웠다.

밤이 깊어졌다. 팀원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고, 사무실에는 나와 현우만이 남았다. 그는 여전히 코드를 작성하고 있었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 궁금해요.”
현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2025년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분명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성공은 아니었다. 팀은 뿔뿔이 흩어졌고, 기술은 타협되었으며, 결국 회사는 거대 기업의 자회사로 전락했다.

“성공이 뭘까요?”
내가 되물었다.
“매출? 기업가치? 아니면…”

“행복?”
현우가 말을 받았다.
“우리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그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 이것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

다음 날 아침, 실리콘밸리 VC로부터 메일이 왔다. 시리즈 A 투자를 검토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첫 번째 나비의 날갯짓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였다. 나는 2025년의 기억을 더듬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 피해야 할 함정들, 잡아야 할 기회들.

창 밖으로 2010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스타트업은 콘텐츠입니다.

댓글

Leave a Comment


관련 기사

콘텐츠

‘유니콘의 시간’ – 시간을 디버깅하다 #15

콘텐츠

‘유니콘의 시간’ – 시간을 디버깅하다 #14

콘텐츠

‘유니콘의 시간’ – 시간을 디버깅하다 #13

콘텐츠

‘유니콘의 시간’ – 시간을 디버깅하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