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밤 늦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BBC 방송을 보게 되었다. 2005년부터 시작했다는 ‘드래곤스 덴’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무대 위에 선 한 남자가 땀을 흘리며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있었고, 그의 앞에 앉은 다섯 명의 소위 ‘드래곤’이라 불리는 투자자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평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구경하는 또 하나의 잔인한 리얼리티 쇼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프로그램에는 우리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 농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스 덴’은 창업자들이 투자자들 앞에서 자신의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피칭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꿈꾼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적어도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생각을 실현하지 못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손에 쥐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았다.
영국의 ‘드래곤스 덴’은 직설적인 평가와 실용주의적 접근이 특징이다. 투자자들은 감정보다는 사업성과 수익성에 초점을 맞추어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브루독은 2008년 방송에 출연해 투자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크래프트 맥주 시장을 혁신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레게 레게 소스는 자메이카 출신 음악가가 만든 소스로, 투자 후 큰 매출을 달성했다. 탱글 티저는 투자 거절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헤어브러시 시장에 혁신을 가져와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2009년부터 ‘샤크 탱크’가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마크 버넷이 기획한 일본의 ‘머니 타이거’에서 영감을 받았다. ‘샤크 탱크’는 미국식 쇼맨십과 드라마를 강조한다. ‘스크럽대디’는 주방용품 브랜드로 큰 성공을 거뒀고, ‘링’은 결국 아마존에 인수되었다.
한국에서도 2013년, KBS 1TV에서 ‘황금의 펜타곤’이 시작되었다. 글로벌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한국 환경에 맞게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수천여 건의 아이템 중 선발된 이들이 벤처캐피탈과 선배 창업가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검투사들이 콜로세움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모습 같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름을 알린 기업으로는 마이리얼트립, 플리토, 닷과 같은 익숙한 회사들이 있다. 지금은 스타트업계에서 알려진 이름들이 되었지만, 프로그램에 나왔을 당시에는 그저 꿈 많은 청년들에 불과했다. 이들 외에도 다수의 팀이 각자의 방식으로 도전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고, 어떤 이들은 성공했고 어떤 이들은 실패했다. 그것이 스타트업의 세계다.
사실 방송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매년 전 세계에서는 수백여 차례의 데모데이와 창업 경진대회가 열린다. 카메라가 없을 뿐, 그곳에서도 똑같은 인간 드라마가 펼쳐진다. 땀에 젖은 셔츠를 입고 자신의 꿈을 설명하는 창업자들. 그들의 이야기를 날카롭게 평가하는 투자자들. 그 관계는 TV 속 모습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 프로그램들에도 한계가 있었다. ‘드래곤스 덴’은 과장된 환경, 적은 금액에 큰 지분을 요구하는 탐욕, 작은 투자액이 문제였다. 출연자 중 상당수는 방송 후 투자 계약이 무산되었다. ‘황금의 펜타곤’은 IT 분야 편중 평가, 불필요한 버저 시스템, 단기 성과 중시 경향이 지적되었다.
이런 비판들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특정 분야만 중시하고, 화려한 포장에 현혹되며, 권위적인 태도를 용인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들은 각국의 창업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크라우드펀딩, 엔젤투자, 액셀러레이터의 확산으로 창업자들의 자금 조달 경로가 다양해졌다. TV 창업 오디션의 비중은 줄었지만, 여전히 창업 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매체다. 최근에는 유튜브, 팟캐스트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창업 콘텐츠도 늘고 있다.
우리의 삶도 일종의 ‘드래곤스 덴’이나 ‘황금의 펜타곤’ 같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피칭하고, 끊임없이 평가받고, 때로는 거절당한다. 그 과정에서 회복력과 적응력을 배우며 성장한다.
‘드래곤스 덴’이 영국의 실용주의와 직설적 평가를 반영한다면, ‘샤크 탱크’는 미국의 역동성과 화려함을 담았다. ‘황금의 펜타곤’은 한국의 치열한 경쟁과 교육적 측면을 강조했다. 각국의 문화와 사업 환경이 프로그램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이 창업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결국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하고, 평가받고, 때로는 거절당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이야기.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일 것이다.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그 안에서 빛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드래곤스 덴’을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아이디어가 심사위원들에게 거절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진정한 심사위원은 결국 시장이고, 사람들이며, 시간이다. 인생이란 아마도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품고 무대에 올라, 냉정한 평가자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의 연속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무대에 서는 용기, 바로 그것이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