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0만 달러의 역설
2025년 1월, 중국 항저우의 작은 스타트업 딥시크가 던진 한 방이 실리콘밸리를 흔들었다. 560만 달러로 만든 AI 모델이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은 미국 거대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5월 말 공개한 R1-0528 모델은 MIT 라이선스까지 내걸며 상업적 사용을 허용했다.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겠다는 파격적 선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딥시크의 관대함 뒤에는 분명한 계산이 있다. 사용자 데이터를 중국 서버에 저장하고 필요시 보관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중국 정부의 감시 도구라며 우려를 표한다. 과연 그럴까?
데이터 탐욕, 누가 더 심할까
보안업체 서프샤크가 주요 AI 챗봇 10종의 개인정보 수집 실태를 들여다본 결과는 흥미롭다.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중국 AI가 아니라 메타AI였다. 35개 항목 중 32개를 긁어모은다. 금융정보부터 건강 데이터, 심지어 종교관과 성적 성향까지 수집 대상이다. 구글 제미나이도 22개 항목을 챙긴다.
그럼 딥시크는? 11개 항목으로 중간 수준이다. 오픈AI 챗GPT의 10개와 큰 차이가 없다. 중국에 정보가 넘어가면 위험하고 미국에 넘어가면 안전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국적이 아니라 투명성이다. 수집한 데이터를 어떻게 쓰는지, 얼마나 오래 보관하는지, 누구와 공유하는지가 핵심이다. 메타가 사용자의 개인정보로 타겟 광고를 만드는 것과 중국 정부가 정치적 통제에 활용할 가능성,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10년 투자의 결실
딥시크의 성공을 단순한 행운으로 치부하기엔 중국의 준비가 너무 체계적이었다. 2015년 ‘중국제조 2025’를 선언한 후 일관되게 첨단기술 자립을 추진해왔다. 2024년 발표한 ‘AI+ 행동계획’은 제조업부터 의료, 농업까지 모든 산업에 AI를 접목하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이다.
숫자가 이를 증명한다. 중국 AI 핵심 산업은 연평균 20% 이상 성장하고 있다. 2025년 핵심 산업 규모 4,000억 위안, 연관 산업 5조 위안이 목표다. 텐센트, 알리바바, 바이두 같은 빅테크들이 각각 수조 원을 AI 인프라에 쏟아붓고 있다.
더 주목할 점은 인재 양성이다. 딥시크 핵심 연구진 2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만 교육받은 ‘토종’ 인재다. 서구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역량으로 세계 수준의 AI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의 현실적 선택
그럼 한국은 어디에 서 있을까. 미국의 챗GPT나 중국의 딥시크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나름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는 한국어 특화로 승부한다. AI 검색 ‘큐’를 통해 실제 서비스되며 한국어 맥락을 잘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다. 카카오브레인의 KoGPT는 2021년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국내 생태계의 토양을 만들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스타트업들이다. 업스테이지(문서 AI), 라이너(정보 추출), 뤼튼테크놀로지스(창작 지원) 등이 각자의 전문 영역을 파고들고 있다. 거대한 범용 모델로 정면승부하기보다는 틈새에서 깊이를 추구하는 전략이다.
이는 현실적 선택이다. 구글이나 오픈AI와 자본력으로 맞서기는 어렵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성으로는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 작지만 단단하게, 느리지만 확실하게 가는 길이다.
패권 경쟁의 어두운 면
화려한 기술 경쟁 이면에는 우려스러운 변화가 일고 있다. 미중 AI 패권 다툼이 신냉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수출통제와 관세, 경제 보복이 일상화되면서 글로벌 협력 체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AI 의존도의 급속한 증가다. 올리버 티안이 던진 경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AI가 우리 뇌에 독소 역할을 한다”는 그의 진단처럼, 학생들이 과제를 AI에 맡기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현실이 확산되고 있다.
편리함의 대가로 사고력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 AI가 답을 주기 전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기술 너머를 보는 눈
딥시크의 성공에서 배울 점은 분명하다. 명확한 비전과 일관된 투자, 장기적 관점의 인재 양성이 만들어낸 결과다. 하지만 그 성공 뒤에 숨은 정치적 의도나 데이터 수집 방식까지 무조건 따라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균형감이다. 기술의 혁신성은 인정하되, 그것이 가져올 부작용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국적을 따지는 편견에서 벗어나 플랫폼별 투명성과 사용자 보호 정책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도이체방크는 “딥시크가 서구의 기술 우위 신화를 흔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제 기술 패권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도 이 변화의 물결에서 우리만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남의 성공을 부러워할 시간에 우리의 혁신을 준비하자. 기술은 중립적이다.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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