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한국 프로야구는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중을 기록했다. 평균 관중 수도 1만 5122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고, 전년 대비 37% 증가한 수치였다. 그리고 2025년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시즌 294경기만에 500만 관중을 돌파하며 역대 최소 경기 기록을 갈아치웠고, 평균 관중은 1만 7346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9% 증가했다. 숫자만 보면 대단한 성과다. 그런데 이 지속적 성장의 이면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었다. 가장 비싼 중계권료를 지불한 플랫폼이 가장 많은 콘텐츠를 ‘무료로’ 풀어준 것이다.
2024년 3월, 티빙이 1350억 원을 투자해 3년간 KBO 중계권을 확보하면서 내놓은 정책은 경제학 교과서를 뒤엎는 것이었다. 40초 미만의 숏폼 영상을 팬들이 자유롭게 제작하고 SNS에 공유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상업적 수익화는 금지하되, 개인적인 팬 활동은 열어둔다는 조건이었다. 1350억 원어치 콘텐츠를 40초씩 나누어 무료로 배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전통적인 비즈니스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콘텐츠 산업의 기본 원칙은 ‘희소성 창출을 통한 수익 극대화’다. 그런데 티빙은 정반대로 갔다. 희소성을 포기하고 접근성을 선택했다. 소유권을 고집하는 대신 영향력을 택했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단순한 마케팅 전략이 아니라 ‘소유 경제학’에서 ‘영향력 경제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전통적인 비즈니스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파격적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팬들이 만든 40초 영상들이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을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홈런의 순간, 선수들의 표정, 감독의 반응까지, 팬들의 시선으로 포착된 순간들이 디지털 공간을 채웠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팬들이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한 것이 아니라 ‘큐레이터’가 되었다는 점이다. 720경기라는 방대한 콘텐츠에서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인 순간들을 선별해서 40초로 압축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미디어 생태계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다. 하나의 경기에서 수십, 수백 개의 서로 다른 관점의 콘텐츠가 생산된다. 이것이 바로 ‘분산형 편집실’의 등장이다.
상광량과 나건이 2022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사용자 생성 콘텐츠(UGC)가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부정적 영향보다 크다는 것이 실증적으로 확인되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소비자의 85%가 브랜드가 제작한 콘텐츠보다 UGC를 더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티빙의 사례가 특별한 이유는 UGC의 양적 확산을 넘어 질적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20대 여성들의 변화가 이를 증명한다. 이들의 SNS 활용 비율은 2023년 68%에서 2024년 76.6%로 늘었고, 2024년 올스타전 예매자 중 20~30대 여성 비율도 전년 48.4%에서 58.7%로 증가했다. 이들은 단순히 야구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만의 관점으로 야구를 재해석하고 공유하는 새로운 팬덤 문화를 만들어냈다.
더 흥미로운 건 이들이 ‘개인 미디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팔로워가 수백 명인 일반인이 만든 40초 영상이 때로는 공식 계정보다 더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이들 각각이 티빙의 마케팅 채널이 된 것이다.
상광량과 나건이 2022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사용자 생성 콘텐츠(UGC)가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부정적 영향보다 크다는 것이 실증적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티빙의 사례가 특별한 이유는 UGC의 양적 확산을 넘어 질적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서 티빙이 보여준 핵심 아이디어는 ‘마케팅의 분산화’다. 전통적으로 마케팅은 중앙집권적이었지만, 티빙은 이 권한을 팬들에게 분산시켰다. 수만 명의 팬들이 각자의 네트워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마케팅을 한다.
티빙이 설정한 40초라는 기준은 ‘완벽한 불완전함’을 구현한다. 충분히 재미있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그래서 더 보고 싶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갈망 마케팅’의 원리다.
상업적 수익화를 제한한 것은 ‘순수성의 보호’ 전략이다. 김수아가 2020년 발표한 “소비자-팬덤과 팬덤의 문화 정치” 연구에서 분석했듯이, 수익 구조가 개입되는 순간 순수한 팬심은 계산으로 변질된다.
결과적으로 티빙은 2024년 월간 활성 이용자 수 810만 명을 기록했고, 매출은 4353억 원으로 전년 대비 33.4% 성장했다. 2025년에는 이 성과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티빙슈퍼매치’ 시청률이 시즌 초반 5%에서 70%까지 치솟았고, 구독 기여 비중도 9%에서 50%로 급증했다. 하지만 더 주목할 만한 성과는 ‘마케팅 효율성의 혁신’이다. 기존 마케팅의 ROI는 투입 대비 산출로 계산되지만, 티빙의 경우는 다르다. 팬들이 만든 수천 개의 콘텐츠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지만, 각각이 마케팅 채널 역할을 한다. 이는 ‘ROI 무한대’ 현상이다.
이제 다른 산업들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무작정 따라 하기에는 위험하다. 팬들이 만든 콘텐츠의 품질을 통제하기 어렵고, 브랜드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콘텐츠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성공의 열쇠는 ‘통제와 신뢰의 균형’이다.
그렇다면 팬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티빙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은 ‘완벽한 불완전함’이다. 완벽하면 개입할 여지가 없고, 너무 불완전하면 관심을 잃는다. 40초 영상이 바로 이 지점을 노렸다. 충분히 재미있지만 뭔가 아쉬워서 더 찾아보게 만든다.
결국 티빙이 발견한 것은 ’21세기형 입소문의 공식’이다. 과거의 입소문은 일대일 전달이었지만, 이제는 일대다, 다대다 전달이 가능하다. 한 명의 팬이 만든 40초 영상이 수만 명에게 동시에 전달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수만 명이 다시 각자의 네트워크에 전파한다. 이것이 바로 ‘바이럴의 산업화’다. 2025년 현재까지의 지속적인 성장은 이 공식이 단순한 실험을 넘어 지속 가능한 모델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다른 기업들이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의 비즈니스에서 ’40초의 마법’은 무엇인가?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싶어 할 만큼 매력적인 순간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신뢰할 용기가 있는가?
티빙의 실험이 증명한 것은 단순하다. 미래의 마케팅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팬들의 창조력이 있다. 1350억 원짜리 콘텐츠를 40초씩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1350억 원으로 지속 가능한 마케팅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다. 2025년까지 이어지는 성공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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