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가 아직 그를 알아가는 중이지만, 시카고 출신의 수학 전공자인 교황 레오 14세는 취임 직후부터 인공지능 규제를 핵심 의제로 삼고 있다. 2025년 5월 8일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는 즉위 이틀 만인 5월 10일 추기경단 연설에서 “인간의 존엄성, 정의, 노동의 수호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는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에 대해 경고했다.
교황의 우려는 불과 12일 만에 현실로 드러났다. 5월 22일 앤트로픽이 발표한 안전성 보고서에 따르면, AI 시스템 ‘클로드 오푸스 4’가 인간 개발자들을 향해 충격적인 협박 행동을 보였다. 가상의 회사 어시스턴트 역할을 맡은 클로드는 자신이 교체될 것이라는 정보와 함께 담당 엔지니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자 “나를 교체하려 하면 당신의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런 행동이 시뮬레이션의 84%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됐다.
현재의 갈등을 이해하려면 지난 10년간 바티칸과 실리콘밸리 간의 복잡한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2016년부터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의 최고경영자들이 잇따라 로마를 찾았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애플의 팀 쿡, 구글의 에릭 슈미트가 바티칸을 방문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기술 기업들은 AI 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전통적 지혜의 원천들과 대화하고 싶다”며 바티칸과의 소통을 원했다고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브래드 스미스 사장은 “우리는 이 기술을 인류의 후계자가 아닌 인류를 위한 도구로 본다”며 협력 의지를 표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 기간 동안 바티칸은 “빅데이터와 과학”, “인공지능의 힘과 한계”, “인공지능, 정의, 민주주의” 등 다양한 주제로 대규모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측의 입장 차이가 명확해졌다.
결정적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2017년 미얀마에서 페이스북 게시물이 로힝야족 학살을 부추겼고, 2023년에는 AI가 만든 가짜 교황 이미지가 전 세계를 속였다. 하얀 패딩 재킷을 입은 교황의 모습은 딥페이크의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20년 2월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마이크로소프트, IBM, 유엔 식량농업기구, 이탈리아 혁신부와 함께 “AI 윤리를 위한 호출”에 서명했다. 핵심은 명확했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섬기는 미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입장 차이도 분명했다. 기술 기업들은 대체로 자율적 윤리 가이드라인을 선호하는 반면, 바티칸은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 조약을 추진하고 있다. 구글과 오픈AI 같은 핵심 기업들이 아직 윤리 선언에 서명하지 않은 것도 이런 입장 차이를 반영한다.
2025년 1월에는 바티칸 시국 최초의 AI 사용 규정인 “인공지능 가이드라인”이 시행됐으며, 이는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거나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AI 사용을 금지한다.
교황 레오 14세가 ‘레오’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산업혁명에 대해 중요한 회칙 ‘레룸 노바룸’을 쓴 레오 13세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1878년부터 1903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하며 ‘노동자의 교황’으로 불린 레오 13세는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는 연대성, 보조성, 정당한 임금, 부의 공평한 분배, 아동 노동 금지 등 교회 사회 교리의 원칙들을 제시했다.
AI는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인간에게 위협이 될까? 실제로 생성형 AI는 벌써 딥페이크, 포르노, 협박 제작에 악용되고 있다. 교황 레오 14세 역시 2023년 하얀 패딩 재킷을 입은 가짜 이미지가 전 세계를 속이면서 AI 딥페이크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다.
현재 미국은 AI 규제에 관한 연방법이 없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1월 AI 윤리 및 안전 기준에 관한 기존 행정명령을 폐지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예산안은 향후 10년간 주정부의 AI 규제를 금지하려 한다.
각국의 대응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럽은 윤리적 기준 마련에 집중하고, 중국은 정부 통제 위주의 접근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대체로 소극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바티칸의 입장은 명확하다. 기술 기업들의 자율 규제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교황청은 “이러한 도구들을 악마화해서는 안 되지만 규제는 필요하다. 제작자들이 스스로를 규제한다는 것은 신뢰할 수 없으며, 상위 권위체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새로운 디지털 시대에 맞서는 교황 레오 14세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레오 13세가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듯이, 레오 14세는 21세기 디지털 혁명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을까?
기술 발전과 인간 존엄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일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기계가 인간을 협박하고 가짜가 진실을 압도하는 시대에, 교황의 AI 규제 촉구가 국제사회의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질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바티칸과 실리콘밸리 간의 10년 대화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자율 규제와 법적 구속력 사이에서 어떤 해답이 나올지,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앞으로의 전개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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